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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10) 신부님도 가끔 ‘핑크’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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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2 | |||
일 년에 두 번 입을 수 있는 ‘장미색 제의’
각각의 축일과 전례 시기에 따라
상징과 의미 드러내는 색깔 지정
사순 제4주일과 대림 제3주일에
장미색 제의로 기쁨·즐거움 표현
신부님하면 어떤 색이 떠오르시나요? 평소에는 수단의 검은색이 떠오르고 미사 중에는 전례시기에 따른 여러 색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핑크’를 입을 때도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전례에서 색깔은 전례의 의미를 한눈에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제는 전례에 따라서 다른 색깔의 전례복을 착용해서 신자들에게 그날 전례의 의미를 알려주고, 전례에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거룩한 옷에 여러 가지 색깔을 쓰는 것은 거행하는 신앙의 신비의 특성과 전례주년에 따라 진행되는 그리스도교 삶의 의미를 겉으로도 더욱 효과 있게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345항) 전례복의 색깔을 활용한 것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12세기 인노첸시오 3세 교황님은 전례 축일과 각 시기에 따라 전례복의 색상을 사용하도록 규정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례 안에서 활용했습니다. 이후 비오 5세 교황님이 이 규정을 「로마 미사 경본」에 반영했습니다. 교회는 오랜 전통에 따라 각각 전례를 나타내는 색깔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먼저 흰색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한 그리스도의 옷을 상징하면서 영광, 결백, 기쁨을 드러냅니다. 주로 부활·성탄 시기나 주님과 성모님, 성인들의 축일에 사용합니다. 뜨거운 사랑과 피와 불을 상징하는 빨간색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성령 강림 대축일, 주님의 수난 행사, 순교자들의 축일 등에 사용합니다. 초록색은 신자들의 생활과 소망을 의미하며, 연중 주일과 연중 평일에 쓰입니다. 보라색은 죄에 대한 뉘우침과 속죄, 그리고 고행과 금식을 나타냅니다. 사순·대림 시기나 위령미사에 사용합니다. 이 밖에도 성대한 전례 중에는 황금색을, 장례·위령미사 때는 검은색을 쓰기도 합니다. 또 각 주교회의가 사도좌에 제안해 각 지역교회에 필요한 전례색을 쓰기도 하는데요. 한국 교구들에서는 특별히 성대하고 기쁜 전례 예식 때는 황금색을, 죽은 이를 위한 미사와 시간 전례에서는 흰색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1년에 딱 2번 입을 수 있는 색이 있습니다. 바로 장미색이라고도 부르는 분홍색입니다. 장미색 제의는 오늘 사순 제4주일과 대림 제3주일에 입습니다. 이날들은 장미색 제의를 입는 주일이라 해서, ‘장미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두 주일은 각각 즐거워하여라 주일(Gaudate, 사순 제4주일), 기뻐하여라 주일(Laetare, 대림 제3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각각 그날 주일미사 입당송의 첫 단어에서 따온 말입니다. 사순과 대림은 각각 참회와 절제를 통해 부활과 성탄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만, 곧 다가올 부활과 성탄을 희망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장미색 제의를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장미색 제의를 사용하지 않는 본당도 있습니다. 혹시 오늘 ‘핑크’ 옷을 입은 신부님을 보지 못하더라도, 장미주일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다가오는 예수님의 부활을 장밋빛처럼 환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어떨까 합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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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12) 전례 개혁에 따른 미사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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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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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믿음’과 ‘들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서로 연결된 삼각형 같은 구조를 연상시킵니다. ‘믿음’은 무엇을, 누구를 믿느냐는 질문을 동반하고, ‘들음’은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서 듣느냐는 질문을 동반합니다. 그 결정적인 열쇠 역할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되겠지요.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을 이룰 메시아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했던 구약과 나자렛 예수님이 참된 구원자인 그리스도임을 설명하는 신약의 사도서 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적은 네 복음서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말씀’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1년 주기에 2독서(독서와 복음)로 구성됐던 예전의 ‘미사 독서’ 배열을 전례 개혁을 통해 재구성합니다. 현재의 주일과 축일 독서 목록의 세 가지 특징은 ▲세 독서(구약, 사도서, 복음) ▲3년 주기(가나다 해) ▲두 가지 원칙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원칙은 전례 시기를 고려하고 독서들 사이 주제의 일관성을 고려한 ‘주제의 조화’와 시작한 서간서나 복음서를 계속해서 읽어나가지만, 필요성이 적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빼는 ‘준연속 독서’를 말합니다. 평일 독서 목록의 네 가지 특징은 ▲두 개의 독서(구약이나 사도서, 복음) ▲사순 시기는 세례와 회개를 주제로 한 해 주기로 배정 ▲대림·성탄·부활 시기의 평일에 한 해 주기로 배정 ▲연중 시기 평일에는 복음은 한 해 주기, 독서는 2년 주기(홀수, 짝수)로 배정입니다. 현재의 「미사 독서」는 4권입니다. 1권은 대림과 성탄, 연중(제1주간-제9주간 화요일까지), 사순, 부활이며, 2권은 성령 강림 대축일 후 연중 시기(제6주일-제34주간), 3권은 성인 고유와 성인 공통, 4권은 예식, 기원, 신심, 죽은 이를 위한 미사의 독서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집」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2017년 공식 출판되었습니다. 「복음집」은 ‘구원의 경륜에서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근거하여 가장 큰 경의를 표현합니다. 입맞춤(한국교회에서는 고개를 숙여 경건하게 절함)과 분향, 높이 들어 올림 또는 촛불과 향로를 든 행렬을 합니다. 주교가 집전한 미사에서는 「복음집」으로 강복을 할 수 있으며, 주교는 부제 서품식에서 「복음집」을 부제에게 수여하고, 주교 서품식에서 후보자 머리 위에 「복음집」을 펼쳐 얹습니다. 교회는 “미사 거행에서 성경 독서와 성경에서 따온 노래들은 생략하거나 줄여서는 안 되며, 어떤 사유로든 결코 성경이 아닌 다른 독서로 대치해서는 안된다”(「미사독서목록지침」 12항)라고 강조합니다. 기록되어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으로 지금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하느님 백성은 성경을 끊임없이 읽음으로써 믿음의 빛을 받아 성령의 활동에 순응하고, 자기 삶과 행동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건네실 때는 언제나 응답을 기대하십니다. 그 응답은 들음이며,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3)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령께서는 그 응답을 유효하게 하시어,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는 권고대로(야고 1,22 참조), 전례 행위에서 들은 것을 삶에서도 실천하게 하십니다. 귀로 듣고 입으로 고백하며 마음에 새기어 손과 발로 행동하는 신앙인이길 오늘도 기원합니다. ![]()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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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2)인류 최초 살인 범죄자, 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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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8 | |||
아담과 하와는 카인과 아벨 두 형제를 두었다. 성경은 영화대본처럼 스토리가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물론 문장의 행간(行間)에는 수없이 많은 고뇌와 걱정,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내 경우 세 살 터울인 동생이 태어나고 난 후 동생과 많이 싸웠다. 싸움의 이유는 이념,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자체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마루에서 매일 저녁기도를 바쳤다. 우리 둘은 맨 뒤에서 몸을 배배꼬면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뭘 봐! 임마”하며 서로 잡고 뒹굴며 싸웠다. 나와 동생의 싸움이 끝난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보통처럼 동생에게 주먹을 날렸는데 동생이 맞기만 하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형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수십 년간 말다툼 한번 한 적도 없다. 카인은 유목민, 아벨은 정착민으로 추정되는 두 계급은 사는 방법과 문화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봉헌 이야기는 폭력의 이유에 대해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한다.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은 거부하시고 아벨의 것만 받으셨다. 카인이 바친 예물은 굳이 원문으로 보면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바치는 예물이며 맏배가 아니었다. 반대로 아벨은 원칙대로 맏배와 함께 자기 자신도 봉헌했다. 카인에게는 동생에 대한 하느님의 편애(?) 때문에 생긴 질투심 등 자신도 이해 못할 감정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카인이 가장 섭섭한 것은 사실 하느님이지만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 비겁하게 약한 동생으로 표적을 바꾸었다. 카인의 분노, 섭섭함, 창피함 등 여러 감정들이 대폭발을 일으켜 결국 아벨을 죽인다. 하느님이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하신 질문은 아벨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카인의 양심의 문을 두드리시는 것이다. 이때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카인은 죄를 부정한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왜 그것을 저에게 물어보십니까?” 우리 마음 안에는 사실 카인과 아벨의 모습이 어느 정도 내재해있다. 우리나라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보다 내가 잘 알고 속으로는 나보다 못한 점도 많은 것 같은 사촌이 땅을 샀다고! 정신적으로 느끼는 현타(?)는 실제 몸에도 슬슬 나타난다. 분명히 죄라고 하는 상황은 오늘날 우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카인이 낙원에서 쫓겨난 죄의 결과는 ‘하느님께로부터 이탈’이며 결국 죽음이다. 질투는 모든 인간이 갖는 보편적 특성이다. 이것도 성장하면서 훈련을 통해 성숙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주님은 한 번의 잘못으로 내치는 분이 아닌 자비로운 분이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약속한다. “다른 사람들의 위협에서 보호하겠고 표를 찍어 어느 누구도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 “행복의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하게 된다.”(헬렌 켈러)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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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공상도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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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08 | |||
무의미한 시간때우기 아니라 스트레스 쌓인 몸에 긴장 풀어줘 우울하거나 불안한 이에게 필수
직장 없는 백수들은 돈이 없으니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납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집 안에서 공상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부모님들은 역정을 내십니다. 공상을 무의미한 시간때우기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상은 의의로 심리치료적 효과가 있습니다. 백수들이 건강한 것은 공상 덕분이란 것입니다. 공상을 오래 하면 그것이 현실처럼 여겨져 심리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상은 우울증 치료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울증에 대해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으며 원인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는 우울증을 ‘보이는 어두움’(darkness visibl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스타이런은 우울증이 다른 질병과 확연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익사나 질식사와 비교하면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좀비처럼 걷고 말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인간으로는 살아가기 힘들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이런 환자들에게 나름의 효과를 갖는 것이 공상입니다. 공상을 하면 스트레스가 쌓인 몸의 긴장이 풀립니다. 피로물질 분비가 적어지며 재충전이 됩니다. 그래서 살기 힘들어 우울하거나 불안한 분들일수록 즐거운 공상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영국 작가는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늘 공상 속에 살았고, 그 공상을 글로 써서 자기 인생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도 공상을 마음껏 한 아이들은 건강합니다. 공상을 못하고 메마른 삶을 산 아이들은 영혼 없는 어른이 되어 갑니다. 나이 들어 공상을 하면 나잇값 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자신은 현실적인 삶을 산다고 자부하지만 내적으로는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공상은 메마른 사람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마음과 몸이 지쳐가는 지금이야말로 공상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재 유머’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천당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정하는 자격시험 문제로 잡초 하나를 주셨습니다. 잡초를 보고 소감을 쓰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1번 지원자가 나오더니 “잡초는 쓸 데 없으니 뽑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저 아이는 강박증 환자 같으니 풀 뽑는 데로 보내라”고 해서 그는 천당 정원사가 됐습니다. 2번 지원자는 잡초를 보자마자 징징 울면서 “잡초를 보니 꼭 제 인생 같습니다. 아무도 저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고 하자 하느님께서 “저 아이는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니 격리된 보직을 주어라” 하셔서 그는 천당 영안실에서 곡소리 하는 자리로 배정됐습니다. 3번 지원자는 “잡초는 아무도 물도 안 주고 신경도 쓰지 않는데 저렇게 튼튼하게 자라니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고 하자 그는 천당 상담소로 발령이 났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눈에 잡초는 어떤 것으로 보이시나요?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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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9) 주님 부활 대축일은 양력일까? 음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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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00 | |||
양력과 음력 모두 사용한 방법으로 결정
니케아공의회에서 결정된 방법
‘춘분 뒤 보름달 다음에 오는 주일’
역법 다른 정교회와는 차이 있어
2025년 희년엔 날짜 통일되길 기대
주님 성탄 대축일은 12월 25일입니다. 그럼 주님 부활 대축일은 몇 월 며칠일까요? 대충 4월쯤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날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올해 주님 부활 대축일은 3월 31일입니다. 그런데 지난해는 4월 9일이었고, 지지난해는 4월 17일이었습니다. 설·추석을 음력으로 쇠는 우리로서는 양력 날짜가 들쑥날쑥한 것이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어쩐지 음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주님 부활 대축일의 음력 날짜를 보니 올해는 2월 22일, 지난해는 2월 19일, 지지난해는 3월 17일입니다. 양력도 음력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부활 대축일은 어떻게 정할까요? 주님 부활 대축일은 춘분 뒤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주일로 정합니다.
춘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입니다. 태양이 기준이다 보니, 보통 양력으로 세는 날이지요. 양력으로 평년에는 3월 21일이, 윤년에는 3월 20일이 춘분입니다. 그런데 ‘보름달이 뜨는 날’은 음력 15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일’은 양력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주님 부활 대축일은 양력과 음력을 모두 사용해서 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이런 복잡한 계산법이 나왔을까요? 주님 부활 대축일은 그리스도인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한 날, 곧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구약의 파스카 축제와 연결되는 날이다 보니 초기 유다인 신자들은 유다력으로 파스카 축제일인 니산(nisan)달 14일에 성찬례를 지내며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념했습니다. 유다력은 우리 음력처럼 달의 삭망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입니다. 그러면서도 춘분이 있는 달을 한 해의 첫 달인 ‘니산’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지역의 신자들은 유다력의 파스카 축제일이 아니라 그 다음에 오는 주일에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념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다음날, 바로 주간 첫날인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유럽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과 유다력, 이집트 지역 등이 정한 춘분 날짜가 달라 각 지역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날짜가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어느 곳에서는 단식과 참회를 하고, 어느 곳에서는 부활 축제를 벌이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325년 니케아공의회 교부들은 「거룩한 부활절에 대한 거룩한 니케아공의회 교령」을 통해 춘분 후 보름달 다음 주일에 온 교회가 함께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주님 부활 대축일의 일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16세기 기존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수정·보완한 그레고리오력이 도입됐지만, 동방 정교회는 기존 율리우스력을 따르면서 ‘춘분’ 날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동방정교회의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양측 대표가 주님 부활 대축일 날짜를 통일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며 “주님 부활 대축일 통일은 2025년 희년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2025년은 니케아공의회 1700주년이라 주님 부활 대축일의 통일이 더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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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11) 말씀 전례는 하느님과 우리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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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3 | |||
‘선포’와 ‘응답’이라는 대화 구조로 이뤄져
하느님과 소통·공감을 위한 구조
말씀을 귀로 듣고 입으로 응답하며
보이지 않는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마음에 새기고 몸이 움직일 수 있어
서로가 말하고 듣고 하는 대화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감’(共感)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공감이라는 관점에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플랑드르의 전장에서 있었습니다. 독일군 병사들이 위문용으로 보내온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수천 개에 촛불을 붙이고 캐럴을 부르기 시작하고 얼마 후에 영국군들도 캐럴을 함께 부르고 손뼉도 치며 화답하면서 전장은 적이 아닌 대화의 상대자로 서로를 인정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2005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로 재조명됩니다. 동료 인간과의 유대감에 대한 갈망에서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공감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낸 일화로 기억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공감을 위한 구조를 전례에 반영했습니다. 특히 미사에서 하느님과의 소통과 공감을 위해 대화와 식사라는 두 구조, 곧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거행합니다. 그래서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이하 ‘총지침)에서 “미사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부분은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오직 하나의 예배 행위를 이룬다”(28항)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 전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대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씀을 먼저 시작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이 봉독될 때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총지침, 29항)하십니다. 이때 참석한 모든 이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석한 이들은 듣기만 하는가?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응답합니다. 말씀 전례에서 ‘선포’된 하느님 말씀은 제1독서, 화답송 본문, 제2독서, 알렐루야 본문, 복음, 강론입니다. 반면에 ‘응답’에 속하는 것은 각 독서 후 ‘아멘’, 화답송의 후렴, 알렐루야의 후렴, 강론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독서 내용에 대한 반향들, 신앙 고백, 보편 지향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서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 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천이 되는 힘과 능력”(계시헌장, 21항)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활동’이 꼭 필요합니다. “귀에 들려온 하느님 말씀이 참으로 마음속까지 움직이게 하려면 성령께서 활동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영감과 도움으로 하느님 말씀이 전례 행위의 토대가 되고, 온 삶을 받쳐 주는 규범이 됩니다”(「미사 독서 목록 지침」, 제9항). 귀로 듣고 입으로 응답하며, 마음에 새기고 몸이 움직이는 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성령의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매 미사의 말씀 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서 왜 우리는 그만큼 변화되지 못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9; 마르 4,1-9; 루카 8,4-8)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잘못된 태도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성서 주석가인 아돌프 줄리허는 잘못된 청취 형태를 인간 마음의 세 가지 잘못된 태도, 곧 둔감하거나 경솔, 그리고 세속적 물욕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말씀 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은 과거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을 넘어서 ‘지금 여기’에서 선포되는 기쁜 소식임을 모든 이가 깨닫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rn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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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로 바치는 또 다른 기도가 있다? '자비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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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76 | |||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알려주신 '자비의 기도
성당에 가면 묵주를 들고 기도하시는 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묵주알을 넘기는 속도가 남다르신 분들을 볼 수 있는데요. 성모송을 아무리 빠르게 외워도 그렇게 빨리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기도를 하시는 걸까요? 어쩌면 그분은 묵주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기도(이하 자비의 기도)’를 바치고 계시는 걸지도 모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성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M. Faustyna Kowalska, 1905~1938) 수녀님을 시성하면서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선포하셨는데요.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환시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 가르치셨고, 또 이 신심을 널리 퍼뜨릴 것을 당부하면서 자비의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묵주는 전통적으로 묵주기도(로사리오기도)를 바치는 도구입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도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셨고요. 자비의 기도는 묵주기도와는 다른 기도입니다만,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고자 한다면 묵주를 사용해서 자비의 기도도 바칠 수 있습니다. 자비의 기도를 바칠 때는 성호경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먼저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1번씩 바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 해당하는 1개의 묵주알에서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라고, ‘성모송’에 해당하는 10개의 묵주알에서 각각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묵주기도처럼 1개와 10개의 묵주알이 넘어가면 1단이 됩니다. 자비의 기도는 모두 5단을 바치게 되는데요. 5단을 마친 후에는 “거룩하신 하느님, 거룩하신 용사님, 거룩하신 불사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를 3번, “오, 예수 성심, 저희를 위하여 피와 물을 흘리신 자비의 샘이신 주님, 저는 주님께 의탁하나이다”를 1번 바치고 기도를 마무리하면 됩니다. 주교회의는 2022년 춘계 정기총회에서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기도’의 통일된 변역문을 승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파우스티나 수녀님을 통해서 “마음이 완고한 죄인이라도 이 기도를 한 번만 바치면 그는 나의 무한한 자비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라면서 “나는 온 세상이 나의 무한한 자비를 알게 되기를 갈망한다”고 전하셨습니다. 특별히 자비의 기도를 바친 사람이 임종할 때, 또 임종하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 줄 때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자비의 기도는 특별히 오후 3시에 바치면 좋은 기도입니다. 오후 3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님에게 “오후 3시에 나의 자비 속으로 잠겨들라”고 명하시면서 “이 순간에 나의 자비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넓게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 자비 신심을 전하는 천주교사도직회(팔로티회) 한국지부장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는 “예수님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님을 통해서 자비의 기도를 널리 전하라 가르치시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약속을 해주셨다”며 자비의 기도의 중요성을 설명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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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내가 만약에 아담, 하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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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68 | |||
초등학교 주일학교는 모두 개근을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싹수부터 파릇파릇했냐고? 절대 아니다. 온갖 핑계와 잔병치례로 정작 학교는 많이 결석했다. 주일미사와 주일학교는 빠지면 평소 인자하던 아버지가 화를 내시고 회초리를 드셨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교리 중에 지금도 생생한 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하느님은 왜 사과를 따먹지 말라하셨나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대학생인 주일학교 선생님이 당황하고 얼굴이 빨개지고 말씀도 꼬이셨다. 그러자 옆에 개구쟁이 친구가 발로 툭차며 “짜식아, 하느님이 먹지 말랬잖아” 하니까 “그러니까? 왜 먹지 못하게 했냐고요?”하면서 두 놈이 엉겨붙어 뒹굴면서 수업이 끝났다. 호기심 많던 친구는 대학교수가 되었고 선생님을 도우려했던 친구는 변호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중요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을 완벽한 장소로 창조하셨다. 창조사업의 갑과 을은 확실하다. 인간에게 이미 창조된 피조물들을 관리할 책임과 권리를 주셨고 단 하나 하느님이 지적한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아담 부부는 동산의 모든 것이 내 것인데 저 나무 열매 하나쯤이야 하고 쉽게 생각했다. 이때 유혹자 뱀이 등장한다. 구스의 작품 ‘뱀에 유혹당하는 아담과 하와’(1470년경)를 보면 뱀의 앞부분은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하와를 올려다보고 있다. 뱀이 사람을 유혹할 때 송곳 질문을 한다. 왜 그 열매는 안 먹냐고. 하와는 열매를 먹으면 우리가 죽는다고 대꾸한다. “이 바보들아, 거짓말이야. 그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는 거야.” 피조물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 내가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는 유혹의 말이 아담 부부에게 꽂힌다. 아담 부부는 결국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어지럽힌다. 하느님과 우리를 떼어놓으려는 악의 유혹은 항상 달콤하다. 우리나라의 범죄 중 가장 많은 범죄는 사기라고 한다. 사기인줄 미리알고 넘어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탄은 본시 고발자라는 뜻으로, 뱀(사탄)의 역할은 인간 삶 안에 있는 끝없는 욕심과 한계성을 지적한다. 우리는 늘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사탄의 가장 은밀한 간계는 오늘날 사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시키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오죽하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저서에 ‘악마는 있다’라는 제목을 붙이셨을까.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아담 부부는 하느님이 무서워 나무 뒤로 숨었다. 하느님은 사람을 부르신다. “ 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장소를 묻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하는 질문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올해 이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나의 삶은 좀 더 겸손해지고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 같다.
※ 허영엽 신부는 1984년 서울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성서못자리 지도, 홍보국장, 교구장수석비서,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교구대변인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성서의 인물 구약 신약」 「성서의 궁금증」 등이 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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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8) 우리나라에는 성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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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0 | |||
성지(聖地)와 성지(聖趾)는 구분되는 용어 성지(聖地, terra sancta), 예수님 활동하셨던 팔레스티나 성지(聖趾, loci sancti), ‘거룩한 장소’로 교회법상 ‘순례지’
겨울의 추운 기운이 물러나고 봄이 다가오면서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오셨거나 계획하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사순 시기인 요즘은 성지순례 중 십자가의 길을 바치기 참 좋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나라에는 성지(聖地)가 없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 위원회가 펴낸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에는 전국 곳곳의 성지가 167곳이나 있습니다. 또 이 책에는 모두 실리지 않았지만, 각 교구에서 성지로 부르는 곳들도 더 있습니다. 그런데 “성지가 없다”니 이상하게만 들립니다. 먼저 성지(聖地, terra sancta, holy land)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봐야겠습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은 성지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 생활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땅인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정의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오신 적이 없으니 우리나라에 성지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성지’라고 부르는 곳들은 어떤 곳들일까요.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순교자들이 순교한 곳, 순교지를 ‘치명 터’라 불러왔습니다. 순교지를 성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56년 세웠던 새남터 순교 기념탑이 계기가 됐습니다. 새남터 순교 기념탑에는 순교지인 새남터를 성지(聖址), 바로 ‘거룩한 터’라고 표기했습니다. 거룩한 땅이라는 의미의 성지(聖地)와도 구분되면서 ‘치명 터’의 의미도 담은 용어였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도 성지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보편교회에서도 예수님의 삶과 수난을 상기시키는 장소, 성인들의 순교지나 묘소, 성모발현지 등을 거룩한 장소(loci sancti, holy place)라고 성지(聖地)와 구분해 불러왔습니다. 우리말로는 발자취, 자리, 터라는 뜻의 지(趾)를 사용해, 성지(聖趾) 혹은 성역(聖域)이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글의 전용화로 성지를 한글로만 표기하면서 거룩한 땅을 뜻하는 성지(聖地)와 치명 터를 일컫는 성지(聖址)를 혼용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순교지가 아닌 곳들도 성지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지’라고 부르는 곳들은 교회법적으로 ‘순례지’(Sanctuariis)에 해당합니다. 교회는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를 교구 직권자의 승인을 통해 순례지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교회법 제1230조) 국가 순례지의 경우 주교회의가, 국제 순례지의 경우 교황청이 승인하게 됩니다.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 위원회는 우리나라의 성지를 크게 3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성인·복자·하느님의 종이 순교한 곳이나 무덤이 있는 곳 중 지속적으로 전례가 이뤄지는 곳은 ‘성지’(聖趾), 국내 순교자들과 연관 있는 장소들은 ‘순교사적지’, 순교자들과 관련이 없지만 신앙선조들의 삶과 영성이 담긴 곳, 또는 교구 직권자가 순례지로 지정한 곳은 ‘순례지’입니다. 그냥 떠나는 성지순례도 좋지만, 내가 가는 곳이 어떤 의미를 지닌 성지인지 알아보고 순례한다면 성지순례에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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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10) 본기도인가 모음 기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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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70 | |||
미사의 방향성 드러내는 공동체 전체의 기도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면, 그의 손이 열린다고 합니다. 이는 죽음으로 완성되는 자기 포기를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자세입니다”라고 에곤 카펠라리 주교는 「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에서 말합니다. 처음으로 로마의 카타콤바를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벽화 중 하나가 ‘오란스’(Orans), 곧 손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 옛날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가 하느님을 향해 항상 팔을 벌려 기도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사를 드릴 때 주례 사제가 담당하는 기도를 할 때면, 팔을 벌리고 공동체의 모든 마음과 정성을 모아 바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본기도’(Oratio)와 ‘모음 기도’(Collecta)라는 용어가 함께 사용되는 주례자 기도입니다. 로마 전례에서 이 기도를 5세기 이래 줄곧 단순히 ‘기도’(Oratio)라고 불렀습니다. ‘모음 기도’(Collecta)는 옛 갈리아 전례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제가 모든 교우들의 기도를 모아서 바친다는 의미와 시작 예식 중에 바친 모든 기도를 종합하고 마무리 짓는다는 의미이지요. 본기도는 기도 권고, 침묵, 기도, 아멘의 차례로 진행됩니다. 이 기도는 “기도합시다”라는 초대로 시작되며,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사제뿐만 아니라 함께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본기도 안에서 종종 “당신의 백성”, “당신의 가족”, “당신의 교회”라고 하며 신자 공동체를 지칭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잠깐 침묵하는 가운데,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간청하는 내용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하고 개별적으로 기도할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침묵이 끝나면 사제는 팔을 벌리고 기도를 바칩니다. 중세 중엽까지는 사제와 교우들이 모두 동쪽을 향해 양팔을 올리고 기도했습니다. 본기도의 내용은 대체로 전례 시기, 축일, 거행하는 미사 등의 특성을 반영합니다. 기도의 전반부는 축일이 기념하는 하느님의 본질이나 구원 업적 등을 묘사하며, 후반부는 그에 상응하는 은총을 청합니다. 연중 주일의 경우 일반적인 진리나 구원 신비를 제시합니다. 맺음말은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삼위일체, 곧 하느님 아버지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바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기도가 끝나면 교우들은 “아멘”하고 환호하여, 이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습니다. 이 기도를 바칠 때 사제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본기도가 비록 짧지만 미사 전체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경건하고 명확하게 천천히 바쳐서 모든 교우가 한마음으로 참여해 공동체 전체의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및 공동체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이기에 함부로 다른 내용을 삽입하거나 수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기도를 하면서 사제는 팔을 벌리고 입술로 기도하지만, 교우들은 손을 모으고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전례 시기와 축일에 맞게 구성된 기도문은 항상 같은 분이시지만 때와 필요에 따라 다른 목소리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을 깨닫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혼자가 아닌 ‘한마음 한뜻’(사도 4,32)인 교회 공동체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입니다.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rn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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