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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4)성당 문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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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43 |
하느님의 신비로 이끌어 주는 성당 문
파스카 신비 기념·재현하는 공간
예수님 향한 마음의 문 먼저 열고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들어가길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대성당 정문. 성당 문은 ‘속’(俗)에서 ‘성’(聖)으로 들어가게 하는 공간으로, 부산하고 급하게 들어가기보다는 침착한 걸음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하여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것이 좋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문’ 하면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16년 방영된 ‘도깨비’에는 많은 명대사가 있는데, 그중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대사가 기억에 오랫동안 남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문’을 통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신기한 모습을 자주 연출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은 ‘내가 여는 문을 통해 내가 원하는 공간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환상을 꿈꾸기도 하지요.
문은 여닫는 기능을 통해 연결과 분리, 그리고 환영과 거부를 할 수 있습니다. 건물의 용도에 따라, 공간의 활용 방법에 따라 문은 다양하게 설치됩니다. 예를 들면 휠체어를 타는 분들을 위해서 화장실 문을 여닫이가 아닌 옆으로 밀게 하는 미닫이로 만들어 쉽게 들어가고 나오게 하지요.
성당 문은 ‘속’(俗)에서 ‘성’(聖)으로 들어가게 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당 문은 바깥과 안 사이에, 장터와 성역, 세속 것과 하느님께서 축성한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저명한 신학자인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는 「거룩한 표징」에서 우리가 성당 문을 지나갈 때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안에 속하지 않는 것은 생각, 근심, 걱정, 호기심, 허영 할 것 없이 모두 밖에 놓아두고 들어오시오. 성역에 들어오는 만큼 자신을 정화하시오.” 그래서 문을 부산하고 급하게 들어가기보다는 침착한 걸음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하여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당 문을 공식적으로 처음 들어가시는 분은 주교입니다. 주교는 성당 봉헌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하느님 집의 문을 주교 지팡이로 두드리며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내게 들어오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시편 24,9)의 시편 24장을 노래합니다.
성당 문은 사람을 바로 하느님의 신비로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의 신비를 실제 사건이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공간에 들어와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과 청원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거룩함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신앙인은 성당 문을 통해서 들어가 다양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성령 안에서 받는 성사 생활을 하다가,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위령 감사송 1)이라는 죽음을 맞이한 후에 시신이 되어 나가는 곳도 성당 문입니다. 곧 성당 문은 생과 사가 드나드는 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당 문을 들어서면서, 먼저 열어야 하는 문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 마음의 문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와 세상의 여러 잡다한 소리로 인하여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산 거처인 ‘성령의 성전’(1코린 6,19)이 못되면 나무와 돌로 쌓은 성당 문에 들어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높고 묵직한 성당 문을 열어본들 우리 안의 문이 안 열려 영광의 임금께서 들어오지 못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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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감정도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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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46 |
많은 이들은 분노도 죄라고 여겨
감정 그 자체를 죄로 볼 수 없어
예수님도 불의에 화내신 적 있어
상담을 하다 보면 죄가 아닌 것을 죄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질책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특히 화를 낸 것에 대해 죄스러워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마음 안에 분노가 생긴 것까지도 죄라고 여기는 분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왜 화를 내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거의 모든 분들이 “주님께서 화내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냐?”, “본당 신부님께서도 화내는 것은 물론 마음 안에 분노를 품은 것도 죄라고 하셨다”고 답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정말 화를 내신 적이 한 번도 없는 늘 온유한 분이셨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전에서 상인들이 장사하는 것을 보고 상을 뒤집어엎으실 정도로 주님께서도 화를 내셨습니다.
세상 불의한 것을 보면 분노하셨던 분이 주님이십니다. 영성심리에서는 분노나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서상의 문제를 가중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 속성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오해가 주님의 메시지에 대한 오해와 결부될 때 심한 내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인간적 속성과 주님 메시지 간의 양립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이런 혼란은 불필요한 고통과 병적인 죄책감, 수치심을 유발한다. 죄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부적절한 행위에 존재한다. 즉, 감정은 내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것일 뿐 그것 자체가 죄가 아닌 것이다.”
고해성사를 볼 때 마음 안에 분노를 품었다고 고백을 하면 더 힘들어집니다. 그럴 때는 분노 해소를 해야지 자신을 죄인시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골본당 신부님이 늘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강론을 입버릇처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 미사 시간에 청년 하나가 조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감히 내 강론 시간에 졸아!’라고 생각한 신부님은 졸고 있는 청년 옆자리의 할머니에게 성질을 부렸습니다. “할멈! 그 옆에 조는 놈 깨우지 뭐하고 있는겨~” 그러자 그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재우기는 지가 재워 놓고~ 왜 나보고 지랄이여 지랄이!”
그 말을 들은 노인 신부님은 너무나 화가 나는데 화를 내지는 못하고 끙끙 앓다가 새벽녘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깊은 의미를 내포한 말씀입니다. 앞으로 더 상세하게 분노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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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1) 성직자의 복장 ‘수단’ 단추는 모두 몇 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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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47 |
수단 단추 개수, ‘이것’ 따라 다르답니다
수단의 단추가 예수님의 생애를 상징하는 33개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 수단의 단추는 입는 사람의 키에 따라 개수가 다르다.
해마다 새해가 밝으면 많은 분들이 새로운 일을 다짐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역시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중요하겠죠? 모든 일의 시작도 그렇지만, 우리는 실제로도 종종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처음부터 다시 단추를 끼우는 곤란한 경우를 겪곤 합니다. 모든 옷이 그렇겠지만, 특별히 더 곤란한 옷이 있습니다. 바로 수단입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자락이 특징인 수단은 목에서부터 발목에 이르기까지 단추로 연결돼있습니다. 수단에 있는 이 수많은 단추를 보면 몇 개나 되는지 궁금증이 들기도 합니다.
수단은 ‘신부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복장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영화, 드라마 등의 매체를 통해 비신자들에게도 ‘신부님’들의 의복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수단을 입었다고 무조건 ‘신부님’이라고 부르면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주교님, 추기경님들도 수단을 입으시기 때문이죠. 성직자의 지위에 따라 입는 수단의 색이 다릅니다. 신부님들은 검은색이나 흰색, 주교님들은 진홍색, 추기경님은 적색, 교황님은 항상 흰색 수단을 입으시죠. 특히 ‘수단’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검은색’은 성직자로서 자신을 봉헌하고 세속에서 죽었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합니다. 이런 수단의 복장 규정은 트리엔트공의회(1546~1563년)에서 규정됐습니다.
그러면 검은 수단을 입었으니 ‘신부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역시 아닙니다. 수단은 사제로 양성되고 있는 신학생들도 입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착의식을 거친 신학생들이 수단을 입습니다. 하지만 착의식을 하는 시기가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수원가톨릭대학교 학생처장 정진만(안젤로) 신부님은 “신학생들이 수단을 입는 시기는 신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면서 “일반적으로 독서직 받기를 앞둔 시기에 착의식을 하고 수단을 입는다”고 하십니다.
평신도도 수단을 입는 경우가 있는데요. 평신도 중 교회 내에서 직무를 부여받은 사람들, 예를 들어 시종직, 독서직 등을 받은 분들은 미사전례 중에 수단을 입기도 합니다. 이런 예외도 있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수단은 성직자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특별한 의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궁금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수단의 단추는 몇 개일까요? 어떤 분들은 수단의 단추가 예수님의 생애를 상징하는 33개일 것이라고도 하는데요. 정말로 수단 단추 개수에도 의미가 있을까요. 같은 궁금증에서 의정부교구 청소년사목국도 유튜브를 통해 신부님들의 수단 단추 개수를 세어봤는데요. 신부님들마다 수단 단추 개수가 서로 달랐습니다. 신부님 각자의 키에 따라서 서로 달랐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신부님께 수단 단추 개수를 여쭤봤습니다. 수원교구 갈곶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계신 인진교(요셉) 신부님은 키가 207cm로 장신을 자랑하시는데요. 인 신부님의 수단 단추 개수는 27개였습니다. 33개가 되려면 키가 좀 많이 커야겠네요. 인 신부님은 “수단은 아무래도 미사 전례를 앞두고 입는 경우가 많다보니 입을 때 마음가짐이 다른 것 같다”면서 “수단을 입을 때는 주로 마음을 가다듬고 미사를 더 정성스럽게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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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3)성당 문을 들어서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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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57 |
성당 문을 들어서기 전에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사진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복장규정 안내 표지.출처 Flickr
존경과 정중함과 기쁨 나타내는 몸가짐 필요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만나는 것
존경하는 인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복장·마음가짐도 적절하게 갖춰야
금요일이 되면 할머니는 다리미와 분무기를 준비하시고 주일에 성당에 갈 때 입을 옷을 정성스럽게 다립니다. 그리고 꾸깃꾸깃한 500원짜리 종이돈을 펴고 그 위에 수건을 덮고 분무기로 물을 조금 뿌리고 다렸습니다. 어린 저의 눈에는 꾸깃꾸깃한 종이돈을 펴는 할머니의 모습이 참으로 이상하면서 경이로웠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을 주의 깊게 보고 있는 손주를 보시고 “하느님 앞에 가려면 정성껏 준비해야 한다. 몸도 깨끗하게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연보 돈도 미리 잘 준비해야 한단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으신 할머니는 하느님 학교의 모범 학생인 것이 분명합니다. 성당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들을 잘 기억했다가 그대로 실천하는 하느님 학교의 모범 학생!
여러분은 성당 문을 들어서기 전에 어떤 준비를 하시나요? 먼저,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 중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성찰부터 해야겠지요. 교회는 “중죄(peccatum grave)를 자각하는 이는 먼저 고해성사를 받지 아니하고서는 미사를 거행하지도 주님의 몸을 영하지도 말아야 한다”(교회법 제916조). 여기서 ‘중죄’를 다른 곳에서는 ‘대죄’(peccatum mortale)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트렌토 공의회에서는 “모든 대죄들은 비록 생각의 죄라 하더라도 사람들을 ‘진노의 자식들’(에페 2,3)과 하느님의 원수들이 되게 하기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고백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중죄는 무엇일까요? 저명한 윤리신학자 칼 H. 페쉬케는 「그리스도교 윤리학 제1권 기초도덕신학」에서 “죄스러운 내용이 인간의 실존적 목적과 궁극 목표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과 그분의 명예와 존경을 거슬러 심각한 해악을 낳게 할 경우, 국가와 교회와 일반적인 인간 공동체에 심각한 상해를 입힐 경우, 또는 자기 동료들에게 심각하게 현세적이거나 영적인 상해를 입힐 경우에도 중죄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중죄 외에도 하느님 앞에 서기에 마음이 불편하다면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준비 중에 영성체를 하기 위해서는 ‘공복재’(ieiunium Eucharisticum)를 하라고 합니다. 3세기부터 영성체 전 금식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고, 1917년 교회법전에 따르면 자정부터 금식하도록 규정했다가 일선 사목자들 요청을 받아들인 비오 12세 교황이 1953년 병자나 저녁 미사 참례자를 위한 예외 규정을 두었고, 순수한 물은 허용했습니다. 1983년 교회법전 제919조는 “영성체 전 적어도 한 시간 동안은 물과 약 외에는 어떤 식음도 삼가야 한다”라고 공복재 시간을 현실적으로 완화했습니다. 영어의 아침 식사인 ‘Breakfast’가 자정부터 금식(fast)하던 공복재를 깨는 행위(breaking)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성사를 받기 위한 적절한 준비로 “신자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정한 공복재를 지켜야 한다. 몸가짐(행동, 복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님이 되시는 그 순간에 걸맞은 존경과 정중함과 기쁨을 나타내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7항)는 말씀은 하느님 학교의 모범 학생인 할머니를 떠오르게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만나러 갈 때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미사에 참례하러 오는 자세와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은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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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인생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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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30 |
자신과 타인 모두 행복한 사람
나이 들수록 존경받는 어른 돼
부정적 영향 없도록 노력해야
“사람이 사는 게 거기서 거기지~ 뭐가 다를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쎄요.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가까이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까요?
사람 사는 모양이 사람마다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왜 다를까요? ‘인생대본’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의 인생대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주위 환경이나 사람들로부터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것으로 인생길을 결정합니다. 이것을 인생대본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 어른들의 언어적·비언어적 메시지는 초기결정을 지을 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데 이렇게 해서 생긴 인생대본은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자아긍정 타인긍정’입니다. 가장 건강한 인생대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자기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대인관계가 넓을 뿐만 아니라 인생 경험의 폭도 넓어 나이 들수록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어른이 됩니다.
다음으로 ‘자아부정 타인긍정’은 자신은 불행해도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왠지 안쓰러워 보이고 추워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성인이 되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신경과민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니요”라고 거부하는 말 한마디 못하고 순종이 아닌 복종적인 삶을 살아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자아긍정 타인부정’입니다. 나는 행복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불행해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죠.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명 ‘진상족’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을 종처럼 부리고 분위기를 초토화시키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괜찮은 사람이라는 병적인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가장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아부정 타인부정’은 나 죽고 너 죽자 하는 식의 인생대본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마치 물귀신처럼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죠. 자기가 못 먹는 밥에 재를 뿌리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은 귀신이 왜 저런 것을 안 데려가나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몸에 상해를 입히고 다른 사람들을 협박하는 ‘자해 공갈단’ 같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인생대본을 가지고 사는가.’ 자기 점검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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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2)믿음의 증거인 십자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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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44 |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계 표현하는 행위
세례의 은총 새롭게 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 표현
하느님의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것
성당 입구에는 성수반이 있어서 신자들이 성수를 찍어 십자 표시를 하면서 기도한다. 십자 표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뜻도 되고,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한다는 의미도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길들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막여우를 만난 어린 왕자는 함께 놀자고 말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난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거든”이라고 답하지요. 여우는 길들여진다는 것은 ‘관계가 생긴다는 뜻’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또한 여우는 길들이는 과정에서 참을성이 필요하고, 하루하루 조금씩 가까워지며, 관계가 생긴 친구를 만나기 전부터 행복한 설렘으로 안달하게 된다고 어린 왕자에게 알려줍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성부, 성자, 성령과 관계가 생기며 길드는 과정을 걷게 됩니다. 예술이나 스포츠 등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유명인을 동경하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으면서 크는 아이들을 ‘누구 키즈’라고 부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예수 키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친 십자가를 떠올리며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자유민주주의 나라인 한국에서는 십자성호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동작이지만, 공산주의 국가이거나 종교적 박해가 심한 지역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유아세례에서 부모와 대부모는 세례 받는 아이의 이마에 십자 표시를 해주며,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식을 해줍니다. 십자 표시는 이렇게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뜻도 되고,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가 가장 싫어하는 동작이기도 하지요. 구마 예식에서 사용되는 동작과 예식에는 안수, 입김 불기, 성수 뿌림, 그리고 십자 표시가 있으며 구마 예식 지침에서 “구마 사제는 모든 축복과 은총의 샘인 주님의 십자가를 마귀에게 시달리는 신자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악마를 물리치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가리키는 십자 표시를 한다”(27항)라고 강조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추기경 시절에 쓰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서 십자성호를 정성껏 긋는 것의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아무 생각 없이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지요?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십자성호는 언제나 세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 교회는 처음부터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성당 입구에는 성수반이 있어서 신자들이 성수를 찍어 십자 표시를 하면서 “주님, 이 성수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로 성당에 들어오면서 성수로 십자 표시를 하는 좋은 전통이 사라진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의 첫 단계는 십자성호를 잘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관계가 맺어진 것을 확인한 하느님이 여러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시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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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자기 앞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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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41 |
지금보다 나은 미래가 되기 위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필요
자주 웃을수록 복 오고 건강해져
자기 앞날을 알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실험을 했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칠순 잔치를 상상해 보세요. 내 옆에 누가 있는지, 상에는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는지 보세요. 잠시 호흡을 고르고 이번에는 팔순 잔치를 상상해 보세요. 내 주위가 어떤 모습인가요? 호흡을 고르고 구순 잔치를 상상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과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상 속의 자신이 보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나의 무의식에 물음을 던지면 무의식은 지금의 상태를 근거로 해서 앞날 내가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100% 믿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마음 안에 예지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앞날이 아무것도 안 보여요. 혹은 나 혼자만 보여요”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지금 마음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또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만약 자제분이 자매님과 똑같은 인생길을 간다면 기분이 어떠실까요?”
대답이 각기 다릅니다. “좋을 것 같아요”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나보다 낫게 살았으면 한다”는 분, 심지어 “절대로 나처럼 살면 안 된다”고 펄쩍 뛰는 분도 계십니다. 자기 자신을 싫어하거나 심지어 미워할 경우 이런 대답을 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답은 하나,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면 과거는 추억이 되고 미래는 희망이 되며 지금은 살맛 납니다.
마틴 셀리그먼이라는 심리학자는 “행복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훈련으로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가? 웃는 훈련입니다. 많이 자주 웃을수록 복이 들어오고 건강이 찾아오고 앞날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항간에 떠도는 웃음주기표를 알려 드릴까 합니다.
월요일은 원래 웃는 날
화요일은 화가 나도 웃는 날
수요일은 수시로 웃는 날
목요일은 목이 터져라 웃는 날
금요일은 금방 웃고 또 웃는 날
토요일은 토할 때까지 웃는 날
주일은 주구장창 웃는 날
매일 실행하시고 건강과 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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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억지로라도 웃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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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52 |
심리적 건강은 웃음과 깊은 연관
자신을 보고 웃으면 건강한 사람
매일 거울보고 웃는 시간 갖길
심리적인 건강이 최고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 봉사 많이 하는 사람 등 신앙적 관점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심리적 건강은 웃음과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보고 웃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건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바로 자신의 정신적 건강상태를 말해 줍니다. 거울 속 자신이 너무나 예뻐서 정신을 못 차리면 거울공주, 자기애적 성격장애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대로 귀엽다고 여기면 정상, ‘왜 이렇게 못생겼지?’ 하면 우울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울을 깨 버리면 자기혐오증, 아예 거울을 보지 않는 것은 가장 위험한 상태라고 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보고 웃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살기 힘들어서 웃을 일이 없는데 어떻게 웃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때에도 웃으셔야 합니다. 일명 억지웃음! 억지로 웃어도 심리치료 효과가 있는가? 있습니다.
이것을 몸으로 입증한 사람이 100m 단거리 선수였던 미국의 칼 루이스입니다. 이 선수는 숨이 차도록 달리는 중에도 미소를 지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궁금했던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힘든데도 웃는 이유가 뭐냐고. 그러자 칼 루이스가 답하길 “힘들다고 해서 인상을 쓰면 더 힘든데 억지로라도 웃으면 덜 힘들다”고 했답니다.
일본의 이타미 니로 박사가 남녀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한쪽은 억지웃음 짓게 하고 다른 한쪽은 그냥 무표정하게 뒀는데 2시간 동안 실험한 결과 억지웃음만 웃어도 암세포를 공격하는 NK(Natural Killer, 자연살상)세포가 활성화됐다고 합니다. 매일 거울을 보고 웃어 주는 시간을 가지면 마음이 건강하게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재 유머 하나. 신부, 목사, 스님이 모여 서로 청빈함을 자랑했습니다. 스님이 나서더니 “내가 가장 청빈하다. 난 절에 돈이 들어오면 부처님 앞 불전함에 던져서 들어가면 부처님 것, 밖으로 나오는 건 내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나서더니 “넌 도둑놈이다. 난 헌금통에 돈을 던져서 들어가면 주님 것, 밖에 나온 건 내꺼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나서서 이렇게 큰소리를 쳤습니다. “니들은 다 도둑들이야. 난 돈을 하늘로 던져서 하늘로 올라가면 하느님 것, 떨어지면 내 것이다!” 그래서 신부가 ‘상도둑’이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웃으면 복뿐만 아니라 건강도 옵니다. 억지웃음이라도 짓고 사시길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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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26절 말씀이 궁금합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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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 93 |
찬미예수님!
창세기를 읽다가 궁금증이 생겨서 질문글을 남깁니다!
창세기 1장26절의 하느님 말씀은, 천지창조 중의 다른 명령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집니다.
다른 명령들은 절대자 한 분이 명령하는 느낌이라면, 26절은 어떠한 집단에서 리더가 주도하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모습으로'처럼 복수형을 사용한 점과 '~~하자.'와 같은 말투가 마치 다른 여러 신들이 회의하는 과정 중에 '대장'이 의견을 내는 것 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같습니다.
유독 왜 이 구절만 다른 문체를 사용한걸까요?
혹시 성서원문에서도 "나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우리"로 작성이 되어있나요?
2장에서 사람을 땅(사흗날)과 하늘(이튿날)을 만들던 날 만드셨다고 되어있는데, 1장을 보면 엿샛날에 만든 것으로 나오는데, 이 부분은 그냥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구나'라고만 이해하고 넘어가나요?
창세기는 구전되어오던 여러 이야기를 종합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러한 흔적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성서를 집필하였던 필자가 자기가 임의로 어떤부분을 생략하기 어려웠을까요?
성서의 한 단어/구절에 집중해서 이해하는건 지양하라고 어디선가 들었지만, 제대로 성서공부를 시작하려고하니 한 문장문장이 너무 궁금하고 흥미로워서 질문글을 남깁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미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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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1)누가, 누구를 만나러 미사에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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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52 |
미사, 하느님 만나 즐겁게 보내는 시간
신앙인의 반려자 ‘삼위일체 하느님’
언제 어디서나 현존 느낄 수 있지만
특별히 미사참례로 하느님과 만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마다 성당에서 거행하는 미사에 참례하러 온다. 미사는 우리를 기다리고 사랑하며 행복하길 바라는 하느님과 즐겁게 지내는 시간이다. 사진은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전경.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제공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이 생기면서 동물 축복을 요청하는 신자들이 늘어났다고 신부님들이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인생의 ‘반려자’(伴侶者), 사전적 의미로는 ‘짝이 되는 동무’라고 하여 부부가 서로에게 하는 애정 어린 표현이었지만, 이제는 사람보다는 함께 사는 동물들에게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반려자’는 누구인가요? 특히 믿음의 차원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닐까 합니다. 이승뿐만 아니라 저승까지도 함께 하는 생명의 반려자는 하느님이시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분을 만나러 적어도 주일마다 성당에서 거행하는 미사에 참석하러 옵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자연이라는 공간과 일상이라는 시간에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을까요? 물론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은 늘 우리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현존을 보다 더 잘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하느님 스스로가 정해주셨습니다.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바쳐진 예수님은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마태 28,1)에 부활하여 인류의 참된 주인인 ‘주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을 ‘주님의 날’이라는 “주일”(묵시 1,10)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에 따라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이 부활하신 날에 모여서 그분이 명한 예식을 행하면서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기념하고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알리며 그분이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인도했습니다.(마태 28,20 참조)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사도 11,26)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입문 예식, 곧 세례가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원죄와 자신이 지은 본죄에서 벗어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세례명’이라는 새 이름을 받습니다. 세례 예식을 통해 마귀를 끊어버리고 하느님을 굳게 믿겠다고 고백합니다. 교부 시대에는 마귀를 끊어버림은 서쪽을 바라보고 하며, 신앙고백은 동쪽을 바라보며 했는데, 이는 태양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흰옷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를 새옷으로 입었습니다”(갈라 3,27)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새로운 사람이 됨을 의미합니다. 파스카 초에서 세례 초에 불을 당겨서 대부모를 통하여 새 세례자에게 전해주는 것은 어두움에 빛을, 냉기가 위협하는 세상에 온기를 전해줌을 드러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미사에 참석하여 영원한 반려자이신 하느님과 만나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곧 미사는 우리를 기다리고 사랑하며 행복하길 바라는 하느님과 즐겁게 지내는 시간이지요.
※윤종식 신부는 1995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며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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