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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제목 | 이름 | 조회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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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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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9 | |||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온전한 공감
상대방 마음을 읽고 함께해 주는 것
경청·존중 바탕에 둔 최고의 대화법
돈 안들이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공감입니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같이 느껴주고 함께해 주는 것인데, 공감은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심리학자 로저스는 “사람은 온전한 공감을 받으면 마음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이는 가정이나 성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싸움 때문에 상담을 청하는 분들의 대부분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해 주기는커녕 자기 이야기만 퍼붓다가 싸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부싸움의 대부분은 공감 부족에서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부 여러분~ 남편이 여러분에게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어?”라고 소리칠 때 “아 맞아요”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대부분 “아~ 그럼 내가 돈 벌어 올테니 당신이 집안일 해봐!”하고 소리 지를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집 남자들은 돈만 잘 벌어오는데~ 당신은 왜 그래?”하고 부인이 타박을 주는데 “아 당신 말이 맞아~ 난 못난이야”라고 말할 남편이 어디 있을까요.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이 본당 신부를 따르고 떠난 다음에도 잊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 그 본당 신부가 공감을 잘해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미사시간에 늦게 들어왔는데 강론 중인 본당신부가 그 신자들을 보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천천히 숨 돌리고 앉으세요~”하면 신자들 모두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자란 것들이 어떻게 미사에 늦을 수가 있어?!”하며 소리소리 지르거나 아예 성당문을 닫아버리는 경우, 상처 입은 신자들은 말 그대로 냉담하게 됩니다. 대개 신자들을 야단치고 눈을 부라리는 신부들은 성격장애자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짓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목자답게 행동했다고 자부심을 갖지만 사실은 공감 능력 부족자들입니다. 보좌신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이들이 떠든다고 미사시간 내내 벌을 주는 보좌신부 옆에는 아이들이 가질 않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신부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습니다. 어떤 보좌신부가 미사 중 떠드는 아이들을 보더니 가장 심하게 떠드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야 임마! 너 생긴 건 공유처럼 생겼는데 왜 떠드냐?”라고 했더니 갑자기 아이들이 “우~”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리고 공유같다는 말을 들은 아이는 그날부터 그 보좌신부의 오른팔이 됐다고 합니다. 이처럼 공감은 어떤 사람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는 최고의 대화법입니다. 어떤 동네에 남편에 대한 공감이 뛰어난 세 자매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동반 모임을 가게 됐는데, 한 자매가 “난 우리 남편 머리가 하얗게 셌으니 흰옷을 입어야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자매가 “난 우리 남편 머리가 아직은 검은색이니 검은색 옷을 입어야지”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남은 한 자매가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응. 우리남편 머리가 대머리라서 어떤 옷을 입어야할지 모르겠어.”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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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4) 이집트로의 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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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9 | |||
역경도 하느님 섭리… 받아들이고 의미 발견해내길
시련 마주한 미성숙한 사람은
세상·하느님 원망하며 무너져
성숙한 사람은 시련을 기회로
자아 단련하며 한 번 더 성장
■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세 분을 피신하라고 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그런 역경을 막아주지 않고 힘든 과정을 겪게 하시는지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기 예수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서 낯선 이국땅으로 피신을 가야하는 두 분의 마음도 몹시 심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분이 이집트로 피신한 것은 하느님의 큰 계획이 있어서 입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하기 위한 섭리셨던 것입니다. 두 분은 이스라엘이란 문화적 후진국 사람들, 그것도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두 분에게 이집트는 두 분의 눈을 뜨게 해주는 더 넓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별 문화적 발전이 없는 이스라엘과는 달리 이집트는 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오랫동안 갖추어온 나라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집트라는 대국의 문명이 두 분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특히 성모님의 경우 후일 교회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가지시게 된 것은 이집트에서의 생활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두 번째 의미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은 맞대응하지 말고 잠시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상대와 맞대응하는 만용을 부리기도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두 분에게 피하는 지혜를 알려주시려고 이집트로 피신을 권하셨던 것입니다. 힘이 없을 때 힘을 키우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피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만약 마리아와 요셉이 그저 그 자리에서 기도만하고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아마도 잡혀서 처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때를 기다리기 위한 피함은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또한 마리아와 요셉 두 분은 우리에게 힘겨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다급한 상황이 되면 하느님이 우리를 버렸다고 울고불고 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세로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만약 두 분이 당신들의 뜻과는 전혀 다른 타향살이에 대하여 매일 한탄이나 했다면 이집트에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집트 카이로에 가면 성가정성당이 있는데 그 옆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습니다. 두 분은 그 회당에서 하느님의 뜻을 되새기며 이집트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의 시간이 끝날 무렵에는 한층 성숙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을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이란 조금이라도 힘든 일과 마주하면 자지러지고 세상과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이란 시련이 사람의 자아를 강하게 해준다는 것을 믿고 시련 속에서 자신을 다이아몬드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집트는 마리아 요셉 두 분을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준 자리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다이아몬드가 되고자 한다면 두 분의 삶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 마태 2,13-15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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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 |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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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6 | |||
연도는 연옥 영혼 위해 바치는 위령기도 박해시대부터 자리잡았다 추정…우리 문화·전통에 잘 융화된 기도 “연도가 났다.”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많은 분들이 “이 말을 왜 모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아마 비신자들에게는 마치 암호처럼 알쏭달쏭한 말이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연도(煉禱)라고 불러왔습니다. 연도는 연옥의 영혼을 위해 바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온 말인데요. 지금은 ‘위령기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연도가 났다”는 말은 주로 ‘상이 났으니, 위령기도를 바치러 가야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어느 신자의 집에 상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연도가 났다”고 서로에게 알립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여러 신자들과 함께 빈소를 찾아 빈소에 ‘연도 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요. ‘연도 소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의 위령기도, 연도는 보통 선창자와 후창자가 주고받으며 우리 고유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맞춰 바칩니다. 우리 소리에 담긴 기도문에 어쩐지 더 정감이 가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토착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입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위령기도를 노래로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도는 단순히 노래로만 바치는 위령기도가 아니라 보편교회의 기도가 우리 문화와 정서, 전통에 잘 융화된 우리 고유의 기도입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렇게 위령기도에 우리 가락을 붙여 연도를 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미 박해시대부터 연도가 자리 잡았다고 추정됩니다. 박해시대 우리 선조들은 신자 집에 장례가 나면 밤을 새워 기도해 줬다고 하는데요. 이때 연도를 바쳤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연도는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가락으로 노래해 왔는데요. 1991년 연도의 가락이 오선악보에 수록됐고, 2003년 한국교회 차원에서 「상장예식」을 마련하면서 전국 모든 신자들이 같은 가락으로 연도를 바칠 수 있게 됐습니다.
왜 신앙선조들은 연도를 노래로 바쳤을까요? 신앙선조들이 상장례 때 사용한 「텬쥬셩교례규(천주성교예규)」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텬쥬셩교례규」에는 “왜 소리 높여 노래하며 연도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노래하는 소리로써 내 생각을 들어 주께 향하게 해 내 마음을 수렴하게 하고 더욱 구원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밝히고, 또 “우리가 죽음의 슬픔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슬픔은 희망 없는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라 전합니다. 혹시 ‘연도를 노래로 바치면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들다’고 불편해하신 적 없으신가요? 하지만 가족이 세상을 떠나 슬픔에 잠겨있을 때, 빈소에서 이어지는 연도 소리는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에게 연도는 신앙 공동체가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부활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노래하는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이번 위령 성월이 가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한 번쯤 연도를 바치시면 돌아가신 분께도, 또 우리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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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심리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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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3 | |||
커 갈수록 심리적 공간 확보돼야 관계 안에서도 편안함 느낄 수 있어 마음 그릇 작으면 상대방 말 끊고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내기 일쑤 잠시라도 가만히 있는 시간 가지며 심리적 공간 넓히기 위해 노력해야
나무들은 어릴 때에는 촘촘하게 심어줍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커지면 옆 나무와 거리를 두게 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크질 못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옆에 붙어 있어야 하지만 커갈수록 공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즉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심리적 공간’이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가 다 챙겨주는 자식들, 심리적 공간을 주지 않은 자식들은 제대로 성장하지도 성공하지도 못하고 부모에게 기생해서 사는 ‘루저’들이 됩니다.
심리적 공간이란 관계 안에서의 자유라고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은 대화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그 대화 안에서 심리적 공간의 제공은 아주 중요합니다. 즉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심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들어줄 때 상대방은 마음의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상담 기법은 처음도 경청이고 마지막도 경청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것을 잘못합니다. 아이들이 잘못한 듯하면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냅니다.
어른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상대방의 말을 끊고 자기 이야기만 쏟아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고~”하며 다 듣지도 않고 끼어드는 사람들, 대화중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본인의 심리적 공간이 좁아서입니다.
즉 마음그릇이 너무 작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크기가 안 될 때 그런 현상이 생깁니다. 이렇게 상대방에게 심리적 공간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더 문제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내재화돼서 자기가 자기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심리적 공간이 좁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퍼붓거나 새치기식 대화를 합니다.
이사람들은 자기 안의 심리적 공간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잠시라도 커피를 마시며 그냥 앉아있는 시간을 갖거나, 그림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냥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런 느긋함이 심리적 공간을 제공해줄 것입니다.
아재 유머 하나 하겠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성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가 절대로 성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럼 정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가 정상적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성격장애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 성격에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자기는 늘 깨어있고 정의롭고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 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다. 세상에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스승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말귀 제대로 못 알아듣는 놈 가르치겠다고 용쓰는 미친놈이다. 왜!”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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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 |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 동방박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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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62 | |||
별 하나만 보고 길 떠난 이들에게 별은 ‘희망’이었다
동방박사들 삶의 태도에 집중
희망 찾는 여정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경험 향하며 모험 즐겨
낙천적 태도로 모든 일 대해
■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별 하나만 보고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인지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방박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는 여러 가지 심리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별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별은 지구에 물을 제공하는 물질이기도 하고 인간의 신체구성요소가 물과 유사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별이 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친숙한 별들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찾아 길을 떠난 것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희망에 대해 옛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소설가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란 책에서 인간이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다고 했고, 괴테도 사람은 아무리 괴로운 처지에 있을 지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희망의 전도사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들은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심리학자 고든 알포트는 “건강한 사람은 긴장 감소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긴장을 원한다. 새로운 감동과 도전으로 끊임없이 여러 가지 다양한 욕구를 가지며, 판에 박힌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경험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새로운 긴장 산출 경험과 모험을 통해 성장한다”고 했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 역시 사람의 정신은 고정돼있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모험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런 건강한 모험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모험적인 삶을 시도한 동방박사들이 가진 정신적 덕목은 낙천성입니다. 하늘 높이 떠있는 별을 보고서 초행길을 가면서도 불안감 없이 가고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에도 별로 흔들림 없이 다시 길을 찾아간 것은 그들의 마음이 낙천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낙천적인 사람들은 인간관이 남다릅니다. 이들은 인간은 의미와 사명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삽니다. 또한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다 할지라도 그렇게 된 것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기에 무언가에 대해 깨닫고 배우도록 하는 배려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인생이란 그와 같은 배움과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며 정신적 성장과 영적 성장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런 마음가짐을 지니고 살아왔기에 낯선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조건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조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에 관한 자유라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이 그저 불편하고 지나가기만 바란다면 그 시간이 지난 후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생이란 내게 주어진 귀한 시간 안에서 나를 꽃 피우는 과정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동방박사들처럼 나에게 주어지는 것들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바친 예물들은 세 분이 이집트로 피신 가셨을 때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고 합니다.
■ 마태 2,1-12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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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 |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백성 전체를 위한 기도,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1열왕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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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76 | |||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과 같이(2사무 22장) 주님께 긴 기도를 바칩니다.(1열왕 8장) 8장 전체는 겹겹으로 앞뒤 대칭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임(1-4), 제사(5-13), 축복(14-21), 기도(22-53), 축복(55-61), 제사(62-64), 모임(65-66) 등 장 전체가 그러하고, 둘째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23), 찬양과 기억(23-28), ‘눈을 뜨시고’(29), 일곱 청원(31-51), ‘눈을 뜨시고’(52), 찬양과 기억(53),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53) 등 기도 부분(22-53)도 그러합니다. 성전 봉헌에서 기도가 중심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신 분이고 예수님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교회 건물이 기도에 꼭 필요한 것일까요? 솔로몬은 기도의 시작에서 이미,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턱없이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27) 하느님은 ‘짙은 구름 속에’ 계시지만(12) 성전을 향해 올려지는 기도와 간청과 부르짖음을 ‘눈으로’ 보시고 들어 주십니다.(28-30) 성전은 ‘하느님께서 굽어보시고 들으시는 특별한 자리’이고 사람이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성경을 통해 하느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래된 성당에 앉아 있으면 고요함 속에 갑자기 지난 세월 동안 거기에서 근심 보따리를 하느님 앞에 풀어 놓았던, 기쁨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한 수많은 신앙의 선인들이 되살아나고 시간을 초월해 인간을 살피시는 하느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성전에서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모든 성인의 통공을 특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마치 사제처럼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황님은 매주 수요일 일반 알현 때와 주일 삼종기도에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을 언급하시고 그 일을 겪은 이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하십니다. 주교님들과 신부님들도 각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개인은 각자의 기도를 바치지만, 그것이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의 전부일 수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전체를 대표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사회는 시멘트와 모래로 만든 튼튼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바람에 끊임없이 흩날리는 사막의 모래알과 같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사회에서 생긴 갈등을 의롭게 판결해 주시기를(31-32), 적과의 싸움에서 도와주시기를(33-34.44-45), 가뭄 때 비를 내려주시기를(35-36), 온갖 환난과 질병에서 개인이나 전체를 도와주시기를(37-40), 이방인을 도와주시기를(41-43), 장차 바빌론의 포로가 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시기를(46-51) 청합니다. 이 집을 향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내용은(48)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 실제와(다니6,11)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관습을 연상시킵니다. 솔로몬은 거듭해서 “용서해 주십시오”(30.34.36.39.50)라고 청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늘 새로이 용서해 주심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과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 뒤에는 상대방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증오가 자리합니다. 용서는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샬롬)의 길이자 기도의 목적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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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 |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연미사는 위령미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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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223 | |||
박해 시대부터 사용하던 ‘연미사’
연옥 영혼들을 위한 미사라는 뜻
위령미사와 같은 말이나 옛 표현
‘연미사’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옛 말이라서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은 들어보지 못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당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전에는 성당에 성가를 표시하는 안내판에 ‘연’, ‘생’ 등으로 미사 지향을 표시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연(煉)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생(生)은 ‘산 이를 위한 미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연미사와 위령미사는 다르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위령미사도 역시 죽은 이를 위해 드리는 미사일 텐데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요? 먼저 ‘연미사’와 ‘위령미사’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미사라는 말은 박해 시대부터 사용하던 말입니다. 박해 시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해 1880년 출판된 「한불자전」에는 연미사를 “연옥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위한 미사”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연옥은 죽은 신자들이 천국에 이르는 거룩함을 얻기 위해 정화 과정을 거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신자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연옥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대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미사인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위령미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미사”라면서 “위령미사와 연미사는 본래 동일한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연미사는 위령미사의 옛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연미사와 위령미사는 다르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아마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전례와 죽은 이를 지향으로 하는 미사의 차이점을 두고 하신 말씀일 듯합니다. 앞서 예전에는 안내판에 ‘연’이라고 표시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는 미사 지향을 의미합니다. 교회법은 “사제는 산 이들이거나 죽은 이들이거나 누구를 위하여서든지 미사를 바쳐 줄 자유가 있다”(제901조)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신부님께 돌아가신 분을 미사 지향으로 부탁한다면 그 신부님은 그 돌아가신 분을 위해 미사를 바칩니다. 그러나 미사 지향이 연미사, 즉 죽은 이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전례가 ‘죽은 이를 위한 미사’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본당에서는 연미사여도 그날의 전례에 따라 미사를 봉헌하곤 합니다. 「미사 경본」에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로 죽은 이를 위한 고유한 기도문과 독서가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미사 지향은 신부님 개인이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바치는 것이라면, ‘죽은 이를 위한 미사’는 전례를 통해 미사를 드리는 공동체 전체가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바친다 것이 다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어떤 지체를 위해 영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다른 지체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379항) 돌아가신 분들도, 살아있는 우리도 모두 예수님을 통해 연결된 지체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연미사, 위령미사를 포함해 모든 미사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지체인 우리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잔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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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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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2 | |||
타인에 대한 공공연한 적개심 표출
열등감서 비롯된 ‘우위욕구’도 커져
‘공격성 배타적 집단주의’ 벗어나야
모든 이슬람 신도들이 탈레반은 아니다. 그러나 탈레반은 이슬람 신도들이다. 어떤 마을에 붙은 현수막의 내용 때문인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사회 안에 이슬람 신도들에 대한 혐오감이 생긴 듯하다. 문제는 이런 혐오감이 혐오감을 갖는 사람 자체를 괴물로 만들 가능성이 높으니 깊이 숙고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해외에서 동양인을 혐오하는 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혀를 차던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란 외피를 뒤집어쓰고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탈레반이란 자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종교적이 아니라 심리분석적인 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탈레반이 지나치게 자기들의 율법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모습은 그들이 ‘집단적 강박성 성격 장애자’임을 알게 해준다. 더 큰 문제는 ‘열등의식’이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의식 구조인데, 탈레반 자체가 이슬람 신학생들로 시작했기에 태생적으로 미숙하고 열등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가진 문제가 열등감이란 것을 확신하는 것은 이들의 행위가 미성숙하고 충동적이며, 극단적이고 공격적이라 그렇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 야심을 갖는 경우 생기는 가장 큰 부작용으로 ‘우위욕구’를 지적한다.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들 위에 서려는 욕구를 말하는데, 이런 도덕적 우위욕구는 당연히 자기도취를 유발하며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고픈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또 열등감은 ‘자아팽창’이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여기에 당연히 자기반성은 없다. 본인들이 무류지권을 가진 사람들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런 도덕적 야망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세상을 자신들의 왕국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소위 이슬람 왕국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왕국에서는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이단시하고 적대시한다. 대화와 소통, 존중은 배척된다. 이렇게 집단화된 종교병 환자들이 탈레반이다. 이들의 행위는 흡사 망상적 신앙에 집착했던 사이비 광신도들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이 이런 심리를 가지게 된 근본 배경은 이들의 성장과정이 학대적인 환경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학대받으며 성장한 아이들이 학대적인 종교를 만든 것이 탈레반이다.
유사 이래 광신도 집단들은 광적인 신앙으로 온갖 만행을 저질러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집단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탈레반의 수명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탈레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천국을 만들려는 자들이 결국에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오래된 이야기가 맞음을 그들이 보여주고 있다. 탈레반은 비단 아프가니스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공공연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대화 없는 ‘공격성 배타적 집단주의’ 안에 살고 있다면 그가 바로 탈레반인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 안의 탈레반들이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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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2) 요셉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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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85 | |||
아기 예수 보호하는 ‘지킴이’ 역할 충실히 해낸 분 자기 행복 추구는 하위 욕구 현대인들은 소유·인정만 좇아 최상위 삶은 영적 행복 추구 삶의 의미 깨닫고 살아가는 것
■ 요셉성인께서 주님 탄생에 큰 기여를 하셨다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비웃기도 합니다. 자기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돌아가셨다고요. 저도 성경을 읽으면서 요셉 성인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어서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요셉 성인은 어떤 분이셨고 그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운동시합에서 사람들은 슈퍼스타만 쳐다봅니다. 마치 그 한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해낸 것처럼. 그러나 한사람의 슈퍼스타는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축구스타 손흥민 선수가 혼자 시합을 할 수 없듯이 어느 분야이건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께서 아기 예수를 낳으셨지만 보호하고 돌보아준 것은 요셉 성인이십니다. 만약 요셉 성인이 없었다면 성모께서는 아주 심한 고생을 하셨을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빛이 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요셉 성인과 같은 분들은 어느 조직에서나 필요합니다. 어떤 사회학자가 말하길 어느 사회나 그 사회가 유지가 되는 것은 권력자 때문이 아니라 권력자보다 국민을 생각하는 공무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회이건 종교이건 마찬가지입니다. 국민만 생각하는 공무원, 신자들만 생각하는 사목자들이 사회와 종교가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버팀목인데 그런 의미에서 요셉 성인의 존재가치는 아주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을 마치 장난감처럼 함부로 대하신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요셉 성인의 인생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은 사람의 인생을 낮은 욕구의 단계에서만 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을 선택하신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 속에서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려고 할 때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지요.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들은 돈에 집착하거나 탐욕을 부리지 않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사기 치지 않고 주어진 것을 성실하게 이행해서 결과를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사람을 선택하는데 당신의 구원사업의 시작을 아무나 마구잡이로 부르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영성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의 하위욕구는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더 많이 갖고 더 인정받는 것.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그런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복관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요셉 성인은 자기 선택권도 못 가진 ‘신의 노리개’였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행복, 즉 가장 수준 높은 영적인 행복을 추구한 분이셨습니다. 무언가를 가지는 것보다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요셉 성인이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칭찬한 것은 요셉 성인의 행복이 영성적인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을 아기 예수의 양부로, 지킴이로 부르신 것입니다.
■ 마태 1,18-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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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 성월] 교회 가르침에 맞는 상장례 상식 바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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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0 | |||
불교 윤회관 바탕 ‘사십구재’…교회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달라 한국교회의 상장례 문화는 조상 제사 금지로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사를 드리는 대신 부활 신앙 안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고, 고유한 ‘위령기도’(연도)는 아름다운 관습으로 이어졌다. 교회의 상장례 예식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드러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조하는 기회다. 한국교회는 주교회의 결정에 따라 2003년 「상장 예식」 출판을 통해 전통 상제례와 현대 감각에 맞춘 우리만의 예식서를 선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상장 습속과 교회의 상장례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상장례 예식에서 궁금한 내용들을 정리해 본다.
Q. 49재(四十九齋) 연미사 봉헌해도 되나? 가끔 본당 사무실에서는 사십구재 미사를 신청하는 신자들이 목격된다. 한 사목자는 “사십구재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며 49대의 연미사 예물을 접수하는 신자가 있었다”고 들려줬다. 한 마디로 이는 교회에서 수용할 수 없는 잘못된 관습이다. 사십구재는 불교의 윤회관을 바탕으로 한 제례 양식으로서, 죽은 영혼이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기도하는 천도 의식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대개 새로운 몸을 받아 환생하기 전까지 저승에서 49일 동안 머문다고 한다. 그때 7일마다 저승의 왕들에게서 선행과 악행에 대한 심판을 받는데, 그 심판을 통과하면 조건에 맞는 곳으로 환생할 수 있다. 심판을 통과 못 하면 다음 7일째 되는 날 다시 심판을 받는다. 최종 심판을 받고 누구나 환생하게 되는 날이 49일째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사십구재는 가톨릭의 죽음에 관한 이해와 전혀 의미가 다르다. Q. 돌아가신 분 유골을 뿌리거나 집에 보관할 수 있나? 세상을 떠난 이를 화장한 뒤 남은 유골을 허공이나 땅, 바다 등의 장소에 뿌리거나(산골, 散骨) 집에 보관할 수 있을까.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훈령 「그리스도교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5항에서 “합법적 이유로 시신의 화장을 선택한 경우, 세상을 떠난 신자의 유골은 거룩한 장소, 곧 묘지 또는 어떤 경우에 교회나 이를 목적으로 마련되어 교회의 관할 권위가 지정한 장소에 보존되어야 한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유골을 거룩한 장소에 보관하는 일은 유가족이나 교회 공동체의 기도와 추모, 유골에 대한 존중과 부적절하거나 미신적인 관습의 방지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따라서 위생적,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도 산골을 하거나 유골을 기념물이나 장신구 또는 다른 물건에 넣어 보관하려는 시도, 혹은 유가족들이 유골을 나누어 가지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봉안 기간이 지난 유골도 산골을 해서는 안된다. 적당한 안치소에 이름을 표기하고 매장해서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산골을 반대하는 것은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나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 등의 표현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연과 물질을 움직이시되 그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고 자연 안에만 얽매여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은 덧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게 하는 소중한 과정이고 일부이기에, 세상이 덧없다는 의미 혹은 자연에서 나온 사람을 다시 자연에 맡기는 것은 정당하다는 입장은 용납될 수 없다. 수원가톨릭대 교수 김의태(베네딕토) 신부는 “산골에 관한 교회 가르침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 통념상 이미 산골을 한 경우는 양심을 거슬러 자유 의지로 행산 잘못과는 구별된다”며 “산골을 후회하며 고인을 기억하기를 원한다면 기일에 고인을 위한 지향으로 위령 미사를 봉헌하고 위령기도를 드리면 된다”고 조언했다. Q. 수목장(樹木葬)은 가능할까? 그리스도교 부활 신앙에 반대되는 이유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면 수목장은 허용된다.(「그리스도교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6항) 수목장은 화장한 분골을 지정된 수목의 밑이나 뿌리 주위에 묻는 것으로 매장의 의미도 포함되기에 산골과 같은 행위에 직접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골을 나무 주위에 뿌리는 행위는 산골로 여겨지기에 교회는 허용하지 않는다. 주교회의 사목 자료 ‘산골에 관한 질의응답’에서는 “분골을 수목 밑이나 뿌리 주위에 묻을 경우 나무와 함께 상생한다는 관점에서 범신론이나 자연주의 사상의 표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Q. 삼우제는 지낼 수 있나?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시신을 묘소에 두고 돌아온 다음, 영혼을 달래어 안정시키려고 초우(初虞)와 재우(再虞), 삼우(三虞)를 지냈다. 「상장 예식」에는 삼우제를 토착화해 전례로 실천하도록 한 예식이 제시돼 있다. 이 예식에서는 초우와 재우, 삼우에 연미사 봉헌을 권고한다. ‘삼우미사’는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전례 용어다. 가톨릭대 교수 윤종식(티모테오) 신부는 “삼우미사는 그날 미사에 죽은 이를 위한 지향으로 미사 예물을 봉헌하고 유가족이 미사에 참례하는 형태일 뿐 연미사의 다른 형태가 아니다”며 “삼우제는 천주교회에서 민족 전통 장례 풍습 정신인 효의 표양으로 받아들여져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 후 사흘간 무덤에 묻히심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유럽교회에서도 죽은 지 3일과 5일, 7일째에 미사를 드리는 관습이 오래전부터 전승돼 있다고 한다. 특히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신 3일을 기념하는 3일 미사가 많았다. 삼우제는 유교에서보다 한국 천주교회 전례에서 토착화된 예식으로 더 잘 드러나게 실천되는 사례다.
Q. 세례받지 않고 죽은 이를 위한 위령기도(연도)와 장례 미사는? 세례받지 않고 죽은 이를 위해서도 위령기도를 바칠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산 이와 죽은 이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을 말하는 ‘연령’(煉靈) 호칭은 ‘죽은 이가 여럿일 때’(「상장 예식」, 35항) 사용 가능하다. 죽은 이가 한 분인 경우는 ‘아버지’나 ‘어머니’, 세례명으로 호칭한다. 죽은 비신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000 형제에게’ 혹은 ‘000 자매에게’ 등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례미사는 반드시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봉헌할 수 있다. 성당에서의 장례식은 생전에 교회적 친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임종 세례(예전에는 ‘대세’라 칭함)를 받은 이,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는 예비신자도 포함된다. 예비신자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으나 교회적 친교의 입문을 준비하는 사람이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로 여겨야 한다.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기들을 위해서도 장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죽은 이들을 위해서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 곧 연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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