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나눔게시판 > 궁금해요?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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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5) 욕심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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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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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걸으면서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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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6 | |||
마음 속 분노 쌓일 때 생기는 ‘살기’ 걸으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려도 감정 표출되며 속풀이 될 수 있어
일본인 사회학자인 모리 박사. 그가 걸어가며 무언가 중얼중얼 하자 제자가 묻습니다. “교수님은 걸어가시면서도 연구를 하십니까?” 그러자 모리박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니야. 난 지금 조금 전 내 기분을 상하게 한 녀석 욕을 하는 중이야~” 모리 박사는 화가 나는데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고 참자니 힘들고 할 때 걸으면서 속을 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작은 소리로 구시렁거리는 것인데 그렇게만 해도 속이 풀린다고 합니다. 걸으면서 욕하는 것이 일종의 분노 해소 심리 치료법이란 것을 그를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설마 그게 효과가 있을까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날 밤에 동네를 걸으면서 실행을 해봤습니다. 대박! 효과 만점입니다. 한 30분을 걸으면서 풀었더니 속이 편안해지더군요. 그 후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참거나 삭이지 않고 걸어가면서 구시렁거리며 풉니다. 어떤 때에는 영어회화도 할 겸 영어로 풀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강의 중에 했더니 “어떻게 신부님이 그런 세속적인 방법을 가르치느냐?”고 항의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자기는 어린 시절 반듯한 집안에서 자라 입에 욕을 담아본 적이 없다면서요.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자매님은 그렇게 반듯하게 사시라고, 그런데 자매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욕을 입에 담지 않고 사는 분들은 욕을 마음 안에 품고 삽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분들은 신경증적 부작용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얼굴 근육이 굳은 분들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억누르고 사는 분들은 대개 자기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기 위해 ‘포커페이스’를 하는데, 그러다보면 얼굴 근육이 굳어버려 늘 굳은 표정으로 다니게 됩니다. 또 눈에 살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에너지라 어디론가 발산되려고 하는데, 눈이 탈출구입니다. 눈은 마음의 상징이라고 하듯 마음 안에 분노를 키우는 분들의 눈에선 살기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웃을 때,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풀고 살아야 사람다운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가 이 방법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동네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얼굴을 다 아는지라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멀리가자니 피곤한 일이고요. 고민하다 아침에 성당에서 했다고 합니다. 긴 복도를 걸으며 손에 묵주를 들고 구시렁구시렁 속풀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할머니 신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아침마다 기도하시더니 성령을 받으셔서 드디어 방언이 터졌다고요. 그 신부는 지금도 자기만의 속풀이를 비밀로 하고 성령 받은 신부 행세를 한다고 합니다. 풀어야 산다! 심리치료의 기본원리입니다. 풀지 못하면 쌓이고 쌓이면 병이 생기는 것이 사람입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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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상식 팩트체크] (12) 성지는 무슨 나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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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5 | |||
주님 수난 성지 주일하면 빠질 수 없는 예식이 있습니다. 바로 성지(聖枝) 예식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당시 유다인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환호하던 모습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의 전통입니다. 신자들은 4세기 무렵부터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맞던 유다인들처럼 나뭇가지를 들고 행렬하는 예식을 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이 나뭇가지를 축복하면, 우리는 이 나뭇가지를 ‘성지’라고 부르면서 한 해 동안 자기 집의 십자가 근처에 두고 지냅니다. 이를 통해 우리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또 이 성지를 다음 사순 시기 전에 수거해, 불에 태워서 ‘재의 수요일’에 사용할 재를 만듭니다. 흔히 ‘성지가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성지의 ‘지(枝)’가 ‘가지’을 의미하는 한자라서 ‘성지가지’는 동어반복으로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지는 무슨 나무로 만들까요? 아무래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당시를 기념하는 만큼, 유다인들이 사용한 나뭇가지를 사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나뭇가지인지는 성경에 기록돼 있는데요. 요한복음 사가는 유다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갔다”고 전합니다.(요한 12, 13) 종려나무는 성경에 ‘야자나무’, ‘대추야자나무’라고도 등장합니다. ‘팔마(palma)나무’라고도 하지요. 종려나무는 키가 크고 줄기가 곧은 상록수입니다. 게다가 척박한 이스라엘의 광야에서도 잘 자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소중한 과실나무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로부터 머리, 곧 수장, 임금을 나타내고, 의인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초막절에 종려나무 가지를 썼고(즈카 14, 16), 솔로몬이 성전에 종려나무를 새겼다(1열왕 6, 29)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종려나무는 임금이신 하느님을 나타내는 나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성수를 뿌려 축복한 성지는 영원한 생명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종려나무가 자라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종려나무와 마찬가지로 상록수 중 하나인 편백나무를 성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편백나무도 따듯한 지역에서 자라기 때문에 성지로 사용하는 편백나무의 가지들도 대부분 남부지방, 특히 제주도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제주교구에서는 10여 개 본당 신자들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 나뭇가지를 보낼 준비로 구슬땀을 흘린다고 합니다. 나뭇가지 숫자만 100만 개 이상이라고 합니다. 판매기금은 각 본당의 복음화 사업에 사용됩니다. 제주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오충윤(야고보) 위원장님은 “우리나라에서 선교하던 에밀 타케 신부님도 식물을 판매한 돈으로 선교에 활용하셨는데, 지금도 식물을 팔아 복음화 사업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아! 혹시 성지 예식을 위해 나무들이 희생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가지치기를 해야 할 편백나무에서 가지를 치면서 나오는 나뭇가지들을 활용하기 때문에, 생태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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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14)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하느님! 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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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8 | |||
하느님 사랑에 감사·찬미 드리는 응답의 노래
여러분은 언제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아버지, 어머니 사랑해요’라고 했나요? 저의 경우에,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처음 사용한 것은 군대에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에서입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대부분 가는 군대에서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 ‘아버지도 이런 힘든 훈련 과정을 거치셨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병상련의 마음에서, 그동안 저에게 베푸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감사함이 흘러나왔던 것이지요. 사람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형성되고 더욱 굳건해집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 사이의 대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말씀 전례에서 ‘화답송’은 그 말 그대로 하느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그에 따른 구원의 사건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응답의 노래입니다. 화답송은 말씀 전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전례적으로 사목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화답송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묵상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사목자는 화답송에서 바치는 시편의 내용을 연구하여 교우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소위 ‘화답 시편’(Psalmus Responsorius)은 고대 유다인들이 회당 예배 중에 성서를 봉독하기 전이나 후에 시편을 읊던 관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4세기경에는 대부분 지역에서 독서 후에 시편이나 창작 성가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다. 그런데 4세기 이후에 교리적 이유로 대부분의 창작 성가가 폐지됨에 따라 시편은 교회의 공식 성가로 굳어졌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나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 화답 시편으로 불렀던 구절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초기 화답송은 독서대에서 불렀는데, 7세기경부터 서방 전례의 중심이 로마에서 프랑크 지역(현재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 노래와 복음의 등급 차이를 드러내려고 층계에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층계’(Gradus)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의 ‘층계송’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층계송을 모은 성가집을 ‘Graduale’라고 했습니다. 현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통해 본래의 의미를 살려서 ‘층계송’이 아니라 ‘화답송’(Responsorium)이라는 용어를 되찾았으며, 고유한 몇 가지 특징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화답송은 시편으로, 일부는 성서 찬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 모든 화답송은 제1독서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것으로 그 내용에 있어서 제1독서와 조화를 이룹니다. 셋째, 화답송의 내용은 말씀을 들려주신 하느님께 올리는 찬미, 감사, 고백, 결심, 청원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넷째, 반복하여 부르는 후렴은 화답의 기능을 강화하며, 화답 시편의 주요 구절이나 그에 상응하는 환호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들려주시고 사랑을 풍성히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인 화답송은 전례에서 울려 퍼지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자체가 화답송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베트남의 응우옌 반 투안 추기경은 오랜 감옥살이를 통해 얻은 신앙의 지혜를 담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에서 참된 응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적 삶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에 가장 참되게 응답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자신의 열정을 쏟으며 인정받기를 원하는 뿌리 얕은 신앙인이 되기 쉬움을 통찰하는 영적 가르침이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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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4) 한발자국 내딛은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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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7 | |||
아브라함을 묵상할 때 늘 떠나는 것에 초점을 두었는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묵상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김미소진(마리아) 작가의 「그래도 앞으로 가보지, 뭐!」를 읽으면서 마음에 두려움을 간직한 채 하느님을 믿고 삶을 한발자국씩 내딛는 작가와 아브라함이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편안한 안주에 대한 미련, 미지에 대한 두려움, 갈까 말까하는 망설임, 그런데 그때 내딛는 그 한발자국이 인생의 지도를 바꿔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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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가끔은 망가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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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4 | |||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 쓰다 보면 심리적·신체적 병 얻을 가능성 높아
편하게 마음 푸는 것 건강에 도움
화를 내는 것은 양반이 할 짓이 아니라고 화가 안 나는 척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내는 자신을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초연한 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신앙인은 그런 수준 낮은 감정에 빠지지 말고 성당에서 기도를 하라거나, 혹은 주님께서 모욕을 참으셨듯이 참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니고 이런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그렇게 수준 높은 듯한 삶을 살면 생기는 것이 피부병입니다. 속풀이가 안 된 심리적인 문제가 피부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영국 심리학자들이 관찰한 결과 서민층보다 소위 귀족층 사람들의 피부병이 더 심각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심리적·신체적 질환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영국 심리치료사인 데이비드 위크스 박사는 이런 사람들에게 “가끔은 망가져도 좋다”, “남들이 보기에 괴짜 혹은 괴벽스런 행동을 해 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처방합니다. “짜증을 내는 사람은 늙는다. 그러나 괴벽을 지닌 사람은 수명이 길다. 그들은 더 좋은 항체를 가지고 있으며 심리적 압박을 갖지 않기 때문에 삶을 즐기며 산다. 따라서 남이 보기에 어떤지 상관하지 말고 자기 안의 긴장을 푸는 데 집중해야 한다.” 재개발 본당 사목을 할 때 스트레스가 극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피부병이 생겼습니다. 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고 그러다가 위크스 박사의 글을 보고 그의 처방을 따라 하기로 했습니다. 차를 달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방에서 샌드백을 두들겨 패고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막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누가 봤으면 ‘저 사람 돌았구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런데 이렇게 거의 매일 속풀이를 했더니 어느 날 피부병이 없어졌습니다. 마음 안의 심리적 배설물들을 다 해소하고 나니 속이 편해서 회복이 된 듯합니다. 지금도 마음이 불편하면 일단 몸을 움직여서 그 자리를 피합니다. 그리고 속이 풀릴 때까지 무엇인가를 합니다. 이렇게 마음에 과부하가 걸린 것을 풀어 준 후 성당에서 마무리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힘이 생긴 느낌이 듭니다. 간혹 성당에서 하루종일 앉아서 화를 삭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주님께서도 거북하시겠다’, ‘말 걸기가 어려우시겠다’ 싶은 마음이 듭니다. 잘못하다간 당신도 삿대질을 당할지 모르니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습니다. 24시간 반듯하게 정장을 입고 살면 없던 병도 생깁니다. 혼자 있을 때는 널브러진 채, 망가진 채로 있는 것이 건강 유지 비법입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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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11) 성유는 어떻게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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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86 | |||
각 교구마다 일 년에 한 차례 축성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에서 예비 신자·병자·축성 성유 축성 재료로는 올리브기름 사용하고 축성 성유에는 발삼 항료 섞어
세례성사 혹은 견진성사를 거행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이마와 목에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바로 거룩한 기름, 성유를 바르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사 중에 신부님이 세례수를 축복하는 모습은 봤지만, 성유를 축성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성유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요? 성사 중에 성유를 바르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부르는 이 말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기름 부음의 중요성 때문에 성령과 기름 부음이 동의어로 쓰일 정도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죽음을 이긴 당신 인성 안에 충만히 ‘그리스도’로 세워지신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넘치게 부어 주시어, 그들이 하느님 아들의 인성과 결합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에페 4,13) 하신다”고 가르칩니다.(695항) 성유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바로 ‘예비 신자 성유’, ‘병자 성유’ 그리고 크리스마 성유라고도 부르는 ‘축성 성유’입니다. 세례수를 만들려면 물이 있어야 하듯, 성유를 만들려면 기름이 있어야겠죠? 성유의 재료는 주로 올리브기름입니다. 올리브기름은 예수님께서 살던 이스라엘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사용한 기름입니다. 올리브기름을 구할 수 없다면 다른 식물에서 짜낸 기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기름은 풍요와 기쁨의 표징이었습니다. 기름은 정화와 치유를, 그리고 아름다움과 건강, 힘을 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성사 안에서도 이런 의미들을 찾을 수 있는데요. 세례 전에 예비 신자에게 ‘예비 신자 성유’를 바르는 의식은 정화와 강화를 뜻하고, 병자성사 때 바르는 ‘병자 성유’는 치유와 위안을 의미합니다. ‘예비 신자 성유’와 ‘병자 성유’는 순수하게 기름만을 사용하는 반면,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품성사 때 사용하는 축성 성유는 기름에 발삼을 섞어 만듭니다. 발삼은 침엽수에서 분비되는 끈적한 액체로 만드는 향료의 일종입니다. 이렇게 축성 성유에 향료를 섞는 것은 기름 바를 때에 성령의 현존을 암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축성 성유를 바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 그분이 가득히 지니신 성령의 충만에 더 깊이 참여함으로써, 삶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를 풍기게 해줍니다. 재료가 준비됐다면 축성을 해야겠죠? 성유는 보통 1년 중 한 번, 성 목요일 아침에 거행되는 ‘성유 축성 미사’에서 주교님이 축성합니다. 한 교구에서 1년 동안 사용할 성유를 이 자리에서 한 번에 축성하는 것이죠. 이날 미사가 끝나면 신부님들은 기름을 나눠 받아 각자 본당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성유는 주교님만 축성할 수 있는데요. 다만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다른 성사와는 달리 위급하게 앓고 있는 신자를 위한 병자성사를 위해 필요하다면 어느 신부님이든지 병자 성유를 축성할 수 있습니다.(교회법 제999조 2항 참조)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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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13) 독서대와 독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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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237 | |||
성당에서 하느님 말씀 선포하는 자리 독서대 오를 때 하는 인사 제각각…각 교구에서 관련 지침 마련해야
1980년대 초까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는 한국에서 유일한 ‘설교대’(pulpitum)가 제대를 바라보며 오른쪽 세 번째 기둥에 있었습니다. 현대적 음향 시설이 없던 시절, 성당 회중석 중간에 이런 ‘설교대’를 만들어 복음과 강론 및 특별한 설교를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했지요.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Trastevere)은 ‘설교대’에 마이크를 설치해 여전히 복음 선포를 위하여 사용하는 전통과 발전의 조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사의 말씀 전례는 독서대에서 주로 이뤄집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독서대에서는 오로지 독서들, 화답송, 파스카 찬송을 한다. 그러나 강론과 보편 지향 기도도 할 수 있다”(309항)라고 합니다. 화답송의 경우 ‘시편 담당자 또는 독서자가 시편 구절을 바치고, 일반적으로 교우들은 후렴을’(129항) 바칩니다. 한국 성당에서는 대개 해설자와 성가대가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각 성당에 가면 독서자가 독서대에 가면서 인사하는 곳이 있는데, 대개 세 곳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대입니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성사적 표지로 재현되는 곳이며, 미사에 모인 하느님 백성이 다 함께 참여하는 주님의 식탁’(296항)인 제대는 성찬례로 이뤄지는 감사 행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집전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집전자의 인격 안에’(27항) 현존하시며, 이를 통하여 집전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회중을’(30항) 이끌어 거룩한 백성 전체와 모든 참석자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칩니다. 세 번째는 독서집이지요. 하느님 말씀을 전례 주년에 따라 배분한 독서집을 하느님 말씀을 대하듯 인사합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곳이 각기 다른 이유는 현재 전례 규정에 독서자가 인사해야 하는 곳에 대한 지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 교구에서 관련 지침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제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당하여 제단 아래에서 제대를 향하여 인사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퇴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독서자도 독서를 하기 위해 제단 위 독서대로 오르기 전과 후, 제대에 인사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부활 시기에 명동대성당을 가보면 파스카 촛대가 독서대 옆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주간 파스카 성삼일」 예식서에 “부제는 독서대 옆이나 제단 안에 마련된 큰 촛대에 파스카 초를 놓는다”(195쪽)는 지침에 의한 것이며, 파스카 촛대를 파스카 선포 장소인 독서대 옆에 두는 오랜 교회 전통을 강조한 배치입니다. ‘용약하여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로 시작하는 파스카 찬송이 부제나 사제의 입을 통해 독서대에서 울려 퍼지며 그 옆에 어둠을 이기고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파스카 초 촛불이 타오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찬미의 시간입니다. 성당에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공간, 독서대는 이미 구약의 느헤미야서에서 미리 보여졌습니다.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가 ‘나무 단 위에’(느헤 8,4) 서서 낭독하는 율법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건이 선포되는 독서대를 향해 집중하여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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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3) 알코올중독자,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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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0 | |||
나의 형님 신부님은 오랫동안 알코올중독에 빠졌지만, 이젠 극복을 하고 단중독 사목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형님 신부님이 알코올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면 어머니가 더 오래 사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시절, 첫 번째 기도는 형님 신부님이 술을 끊는 것이었다. 나는 형님 신부님이 알코올중독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의지도 컸지만 어머니의 기도가 이룬 기적이라 믿는다. 알코올중독은 술 한 잔만 다시 마셔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중독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알코올중독은 보통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자신의 삶을 황폐화시키며 가족에게 큰 해를 끼치거나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도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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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짜증 줄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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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36 | |||
기대감 높을수록 짜증도 심해져
‘기대목록’ 만들고 하나씩 지워가며 기대수준 낮출 때 마음의 짐 덜게 돼
살다보면 짜증날 때가 많습니다. 남편이나 자식에게, 직장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 혹은 자신에게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짜증이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체적으로 피곤함이 과부하가 걸렸을 때 짜증이 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몸 상태가 좋은데도 짜증이 나는 것은 심리적인 원인 때문입니다. 즉 기대수준이 너무 높을 때 짜증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기대감이 필요합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주는 기대감은 필수 영양소와도 같은 것입니다. 기대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죽을 때까지 피어나지 못하고 시들시들하다가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기대는 상대방을 죽게 합니다. 마치 꽃이 빨리 크라고 물을 너무 많이 주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도 적당히 하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은 편입니다. 결혼 후에 부부싸움을 자주 하고 급기야 이혼 까지 하는 것, 본당 신부가 처음 왔을 때는 열광하다가 나중에는 ‘언제 떠나지?’하며 지루해 하는 것 등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수준이 너무 높은 데서 생기는 심리적 후유증들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짜증이 심하고 잔소리가 심한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인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데,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가끔 방송에 나온 사람들이 자랑삼아서 자신을 늘 채찍질하며 산다고 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얼핏 ‘열심히 사는구나~’하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 자신을 소나 말처럼 대한다는 말이기에 들으면서 안쓰러움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소나 말처럼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나친 기대수준은 완전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심합니다. 이들은 멀리서 보기에 성인같은데 같이 살면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짜증을 줄이고 편안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주 간단합니다. 기대수준을 낮추면 됩니다. 기대수준을 낮추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목록을 만들고 그중에서 상대방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입니다. 그럼 잔소리가 줄어들고 ‘그래~ 너는 네 방식대로 살아라’하며 놓아주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바라는 기대목록을 만들고 하나씩 지워가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 동안에 마음 안의 짐이 하나씩 줄어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 시작합니다. 편안함이 느껴져서입니다. 열심히 사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멀리하는 느낌이 들면 자기의 삶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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