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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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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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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성월을 맞아 많은 분들이 성모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바치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모님하면 떠오르는 기도도 많은데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바치는 기도로는 성모송이 있겠고요. 그리고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흔히 묵주기도는 로사리오(rosario), 바로 장미꽃다발이라는 의미로 성모님께 장미꽃다발을 봉헌하는 기도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성모상을 유심히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성모상 중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성모님의 모습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성모님이 자기 자신에게 장미를 선물하고 싶으신 것은 아닐 테고요. 성모님은 왜 묵주를 들고 기도하시는 걸까요? 교회는 그 이유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섭리의 계획에 따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시자 겸손한 종이셨기 때문에 우리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물론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다만 성모님은 “영혼들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고자 온전히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고 계십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61~62항) 전구는 누군가가 바라는 것이 이뤄지도록 함께 기도해주는 중재기도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기도가 필요할 때 가족이나 주변 신자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경을 통해 고백하듯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천상교회에 있는 성모님이나 성인, 복자들에게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전구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 하고, 부활삼종기도에서도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는 기도들이 실은 성모님께 바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달라고 성모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 중에서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기적이 이뤄지도록 전구하신 성모님께 청하는 전구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 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헌신함으로써 교회를 위해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67항)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함으로써 성모님의 덕행을 본받아 신자들이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성모님을 향한 이 공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공경하는 일은 오히려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줍니다.(「교회헌장」 66항)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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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성변화와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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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73 | |||
성체·성혈 축성의 순간 알리는 중요한 의미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의 뜻은 프랑스어 ‘L’Angelus’로 ‘삼종기도’입니다. 들판에서 일하다가 성당 종소리를 듣고 기도하는 농부 부부가 가운데 있고 한쪽에 성당의 종탑이 멀리 보이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종’을 교회에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유를 얻은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로 추정됩니다. 라틴어로 ‘종’을 ‘campana’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시 이탈리아 캄파나 지역에서 청동 산업이 발전했기에 그곳에서 종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비니아노 교황(재위 604-606년)이 처음으로 기도와 미사 시간에 성당 종을 울리도록 규정했습니다.
현재 미사 중 복사가 작은 종을 사용하는 경우는 성변화와 관련됩니다. 곧 교회 공동체가 봉헌한 예물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하는 축성의 순간들이지요.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하는 축성 시점은 동방 전례와 서방 전례가 서로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동방은 축성을 기원하는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를 성체·성혈 축성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지만, 서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까지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찬 제정문’으로 축성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서방 교회가 예수님 말씀에 중점을 두는 계기를 마련한 교부 중에 암브로시오 성인이 있습니다. 그는 저서 「성사론」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축성 전에 빵은 그저 빵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말해지는 즉시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 포도주와 물이 든 잔도 그리스도의 말씀 전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는 즉시 그것은 백성을 구원할 피가 된다.” 약 1600년 동안 로마 교회의 유일한 감사 기도이고 현재의 ‘감사 기도 제1양식’인 ‘로마 전문’(Roman Canon)에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마지막 영광송(Doxologia)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성령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예물에 대한 성령의 역할을 언급합니다. 성찬 제정문을 하기 전에 하는 “주 하느님, 이 예물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강복하시어 참되고 완전하며 합당한 제물 사랑하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라는 부분이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이브 콩가르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 연구에 힘입어 ‘예수님의 성찬 제정 말씀’과 함께 성령을 빵과 포도주를 성체·성혈로 변화시키는 축성의 주인공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전문인 제1양식 이외 나머지 양식에는 ‘축성 기원 성령 청원 기도’가 포함되었으며, 이 순간에는 사제가 예물 위에 손을 펴 얹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미사에서 종을 치는 순간이 축성과 관련 있다는 차원에서 볼 때, 기본적으로 세 번의 순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 청원을 하며 사제가 손을 예물 위에 얹는 순간과 빵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하고 축성된 빵을 들어 올리는 순간, 또 잔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하고 축성된 피를 담은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입니다. 이에 더하여 성체와 성혈에 대해서 깊이 절을 하는 순간에 종을 칩니다. 이런 관점에 볼 때, 사제가 영성체하는 순간에 치는 종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 청원 기도’와 ‘예수님의 성찬 제정문’을 통하여 축성돼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 성체와 성혈을 들어 올릴 때, 가만히 보기만 하지 않고 성 비오 10세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토마스 사도가 한 고백인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을 속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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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1) 뛰는 야곱 위에 나는 삼촌 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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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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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거짓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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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55 | |||
자기방어에서 시작된 거짓의 습관
한순간 모면하려는 수단으로 사용
자기 문제 외면한 채 남 탓 일삼아
나라가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를 따질 때 얼마나 믿음이 가는가, 즉 거짓의 여부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물건을 사면서 속아본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은 불쾌감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거짓은 신뢰에 금이 가게 하고 결국에는 파멸로 이끕니다. 그런데 거짓이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거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원인은 부모님입니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 야단을 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정도 이상으로 아이를 야단치는 경우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을 자기방어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이 습관이 된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들이 문제라고 강변을 합니다. 성당에 가끔씩 사기를 치는 분들이 찾아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의 눈을 보면 눈동자가 불안하고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심지어 상대방을 비웃는 듯한 눈빛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네가 어떻게 내 속을 알겠냐’는 듯한 눈빛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어두움이 느껴집니다. 또 이렇게 거짓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등에 음산한 기운이 가득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밝으면 몸에서 밝은 기운이 나는데 마음이 어두우면 몸에서도 음산하고 어두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얼굴표정으로 아무리 연기를 능숙하게 해도, 달변으로 사람을 홀려도 눈과 등에서 나오는 기운은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짓은 한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거짓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을 파멸시키고 영혼을 악의 노예로 만들기에 거짓이라는 도피처로 도망가는 습관은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아재개그 하나 하겠습니다. 한 정직한 신부의 푸념입니다. 난 정직한 신부다. 유아영세 후 신자들이 “우리아기 예쁘죠?”라고 하는데 이 신부는 거짓말을 하기 싫어 아무 말도 안했다. 근데 왜 나를 보면 눈을 흘길까. 어떤 자매가 “우리 며느리 될 아이에요. 미인이죠?”라고 해서 “그건 모르겠고 후덕하게 생겼네요~”라고 폼 나게 말해줬는데 며느리 된다는 처자가 나를 볼 때마다 눈을 흘긴다. 지 분수를 모르고! 정직한 게 탈이다. 한 신자가 “우리 아이 성공하겠지요?”라고 묻길래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고 말해줬다. 그런데 왜 가족 전체가 냉담을 할까. 사실대로 말한 게 잘못인가 보다. 난 정직한 신부다. 그래서 신자들 모임에서 나만한 본당 신부 만난 걸 은총으로 여기라고 했는데, 왜 다들 헛기침하며 똥 씹은 얼굴들일까. 여긴 내 수준에 안 맞는 곳인가 보다. 근데 신자들이 왜 날 보고 혼자 살길 잘했다고 하는 걸까. 하긴, 한 여자와 살기엔 내가 봐도 내가 아깝다. 그런데 속이 왜 이리 불편할까.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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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 |
여름철 올바른 ‘미사 참례 복장’ 기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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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201 | |||
각 문화권마다 기준 달라도 최소한의 격식 갖추도록 권고 ‘하객패션’ 준비하듯 미사에도 예의·배려 필요 하느님 향한 마음가짐으로 복장 상태 스스로 점검해야
여름철만 되면 본당 사목자의 고민거리가 늘어난다. 미사 참례자 ‘복장’ 때문이다. 이미 많은 본당 주보에 ‘민소매’, ‘반바지’, ‘핫팬츠’ 등을 지양하라는 공지가 속속 올라오고 있다. 다양성이 중시되는 사회, 올바른 미사 참례 복장에 대해 알아본다. 교회는 미사 복장을 따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교구, 본당 사목자 성향에 따라서 기준은 달라진다. 실제로 일명 ‘핫팬츠’ 로 불리는 과하게 짧은 반바지를 제외한 웬만한 반바지를 허용하는 본당도 있지만 여름철이라도 반바지를 일절 입지 않도록 지도하는 본당도 많다. 또 연령대에 따라서도 바라보는 기준이 다르다. 중고등부 미사에는 반바지를 입은 학생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비교적 참례자의 연령대가 높은 미사일수록 반바지 착용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교회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가톨릭대 전례학 교수 윤종식(티모테오) 신부는 “미사 참례 복장에 대해선 각 나라, 문화권마다 기준이 다르다”며 “미국교회의 경우 하의를 중요시하고 상체 노출의 경우 관대한 편인 반면, 우리 한국교회는 주로 상체를 가리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예를 들었다. 복장에 대한 대처도 다양하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은 참례자가 미사에 적절하지 않은 복장을 입었을 시 수건이나 담요 등으로 가리도록 지도하고 있다. 또 몇몇 유럽 성당은 성당 안에 담요를 비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본당 사목자들은 미사 참례 복장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실제로 중고등부나 청년 미사를 주로 맡는 본당 부주임·보좌 신부들의 경우 젊은 층의 복장을 지도하기 어렵다 보니 아예 공지만 간단하게 내보내고 자율에 맡기거나, 복장의 노출이 심각한 수준이 아닌 이상 딱히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서울 암사동본당 보좌 박주륭(이사악 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사람마다 생각과 기준이 달라 복장 문제를 지도할 때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또 참례 복장을 지도하는 것 자체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기는 신자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시대적 흐름을 따라 복장을 비롯한 미사 참례의 장벽을 낮추고 어느 정도 자유로움을 허용한 바 있다. 이후 참례 복장 기준이 모호해지고 일부 참례자들의 경우엔 자유로움을 넘어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에 대한 인식이 다소 희미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혼식 등을 위해 SNS에 ‘추천 코디’가 성행하는 것처럼 의상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많다. 이런 면에서 미사 복장도 과하지 않은 선에서 신자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윤종식 신부는 “성당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곳인 만큼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복장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복장 문제가 계속된다면 교구나 본당이 복장을 규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라면서도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옷을 입었는가보다는 자신의 복장이 교우들이 미사를 드리는 데 혹여나 방해되지는 않을지 스스로 점검하고, 교우로서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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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상에도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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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365 | |||
성모 발현·교리·표현에 따라 다양한 모습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을 맞이하는 성상이 있지요. 바로 성모상입니다. 성모님은 가톨릭신자라면 아마 누구나 사랑하는 성인이 아닐까합니다. 그런데 여러 성모상을 자세히 살핀 분이라면, 성모상의 모습이 대체로 몇 가지 모습으로 나뉜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듯합니다. 성모상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저 유명한 작품을 따라 만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많은 성모상이 ‘성모 발현’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 발현이란 성모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일입니다. 기적의 메달에 새겨져 있기도 하고, 레지오마리애 회합에 사용해서 볼 수 있는 성모상은 1830년 프랑스 파리 뤼드박에서 성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님에게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이 성모상은 머리에는 흰 수건을, 어깨에는 푸른 망토를 두르고 양손을 아래로 펼쳐 보이는 모습인데요. 발로 지구를 감싼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이 특징입니다. 혹시 성모상이 동굴에 모셔져 있다면,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나타나신 성모님의 모습이 아닐까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루르드 성모상은 흰 머리 수건과 흰 옷, 푸른 허리띠를 착용하고,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형상입니다. 발 등에는 노란 장미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루르드의 마사비엘르 동굴에서 성 베르나데트 수녀에게 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세 어린 목동에게 발현한 성모님은 전신을 감싸는 흰 베일에 지구 모양을 한 금색 목걸이를 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묵주를 팔에 걸고 두 손을 모은 채 구름 위에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모상은 비오 12세 교황님이 1946년 ‘세계의 여왕’으로 선포해 왕관을 쓴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또 푸른 망토에 붉은 옷, 검은 허리띠를 두르고 기도하는 인디언 여인 형상의 성모상이라면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이고, 루르드 성모상 같은 복장인데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인 성모상이라면 1933년 벨기에 바뇌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할 때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전하셨지요. 물론 성모 발현과 관계없이 예술적으로, 또 성모님에 관한 교리를 담아 성모님을 표현한 성모상들도 다양하고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양한 성모상을 통해 성모님을 기억하는 이유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성화를 증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어머니로 세우신 천주의 성모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특별하고 효성 지극한 공경을 권장”하고 “신자들이 성인들의 모범으로 성장하고 성인들의 전구로 도움을 받는 올바른 경배도 장려” 합니다.(교회법 제1186조) 성모상을 앞에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지나치기보다 이 성모상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성모님은 이 성모상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지 생각하며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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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감사 기도인가 성찬 기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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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68 | |||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준 것을 기억하고 받은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준 것을 잊어버리고 받은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을 감사하게 여깁니다. 어떤 것을 기억하느냐의 차이가 불행과 행복을 나뉘는 듯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많이 기억하나요? 미사의 가장 핵심 단어는 ‘기억’입니다. 단순한 회상을 넘어서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만드는 창조적 힘을 지닌 ‘기억’은 히브리어 ‘다바르’(dãbãr), 그리스어로 ‘아남네시스’(anamnesis)라고 합니다. 교회는 성찬 전례, 특히 감사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 전체를 ‘기억’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미와 찬양을 합니다. 예전에는 ‘감사 기도’(Prex eucharistica)를 ‘성찬 기도’라고 했는데, 그것은 ‘Liturgia eucharistica’(직역 ‘감사 전례’)를 ‘성찬 전례’로 번역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그리스도께서 ‘사제요 제대이며 어린양’(부활 감사송 5)으로 주재하시는 거룩한 잔치라는 의미를 살려서 ‘성찬 전례’라는 용어는 그대로 사용하고, 대신에 ‘성찬 기도’를 본래의 뜻인 ‘감사 기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감사 기도의 용어들을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종교적 식사에서 가장이 빵과 잔을 들고 바치는 찬양 기도를 ‘베라카’라 하고, 사도 교회는 이 기도를 찬양 기도라는 뜻으로 ‘에울로기아’(Eulogia) 또는 감사 기도라는 의미로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라 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에우카리스티아’를 선호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며, 동방 교회는 ‘봉헌’이라는 의미의 ‘아나포라’(Anaphora)라고 부릅니다. 감사 기도를 이루는 주요 요소는 감사(감사송), 환호(거룩하시도다), 성령 청원(축성과 일치 기원), 성찬 제정과 축성문, 기념(주님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기억), 봉헌(흠 없는 제물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봉헌), 전구(하늘과 땅에 있는 온 교회가 하나 되어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음), 마침 영광송(삼위일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입니다. 감사 기도의 핵심은 ‘감사’와 ‘축성’입니다. ‘감사송’에서 사제는 거룩한 백성 전체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구원 업적 전체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 축성은 ‘축성 기원 성령 청원’과 ‘성찬 제정과 축성문’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봉헌한 예물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경이로운 신앙의 신비가 이루어집니다. 이 순간에 모두 집중하라고 복사는 종을 칩니다. 「천주교 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답은 감사 기도의 의미와 연결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救)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천주를 알아 공경하는 기본은 하느님이 하신 구원 업적을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고, 자기 영혼을 구(救)하는 첫걸음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와 ‘축성’을 이루는 감사 기도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행해야 하는 이치대로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손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들어 올리며’(애가 3,41) 감사를 드릴 때, 하느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어 창조 때의 모습, 곧 ‘하느님의 모습’(창세 1,27)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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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0)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에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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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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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감사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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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5 | |||
삶에 대한 실망으로 무기력해지거나 자포자기 하려는 마음 막아주는 약 일상에서 감사할 일 찾는 것이 중요
가끔 신자들이 불평하는 말 중에 감사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성당에서 신부들이 감사하며 살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난다”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되는 일도 없고 하는 일마다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는데 무슨 감사냐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만도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감사의 영성을 강조합니다. 왜 그런가? 감사기도는 우리가 삶에 대해 실망하여 자칫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예방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삶에 대해 기대를 갖습니다. ‘나는 적어도 이 정도는 살아야 한다’는 그런 기대감과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감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자기 삶을 버리고 방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심지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망가트리는 일조차 벌입니다. 이럴 때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을 찾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가정도 사람도 모두 잃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감사하며 사는 것이 어려운가?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을 계속해서 갖고 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사한 일에 대해 기억을 잘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섭섭한 것, 손해본 것만 잘 기억하는 이기적인 성향이 강해서 그렇습니다. 또 사람의 마음은 덜 성숙한 어린아이와 비슷해서 사탕을 처음 받았을 때와 실컷 먹고 난 후의 마음이 다릅니다. 성당 할머니들께서는 물 한 잔을 드셔도 성호를 긋고 감사기도를 하고 드십니다. 작은 기도이지만 보기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이런 모습이 사람의 눈에도 아름다워 보이는데 하느님께서 보시기엔 얼마나 좋으실까요. 어떤 본당신부가 새 임지로 갔는데, 영 마뜩지 않아서 매일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순박한 신자들은 본당신부가 성질 부릴까봐 피해다니고요. 그러던 어느날 신자 한 사람이 성당에 성체조배하러 갔는데, 마침 본당신부가 십자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주님께 항의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주님! 도대체 나 같은 인재를 왜 이런 시골구석으로 보내신 것입니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본당신부를 보던 신자는 그 다음 순간 깜짝 놀랄 구경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십자가의 주님이 내려오시더니 다짜고짜 본당신부의 면상을 후려치시면서 “이런 싸가지 없는 놈! 내가 네놈을 그동안 챙겨준 게 얼마나 많은데…” 그 모습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신자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인데 본당신부가 주님께 얻어맞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고민 고민하던 신자는 주교님을 찾아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주교님께서 비밀을 지키라 당부하신 후, 그 후로 진상 신부들을 그 본당으로만 보내셨다는 후문이 전해져 내려오면서 그 성당이 성지 아닌 성지가 됐다고 합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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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기도 이야기] 이사(移徙)하면서 바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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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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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연말까지 기도에 대해 여러분과 생각을 나눌 신정훈 미카엘입니다.
나이 마흔의 야곱은 형 에사우를 피해 부모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야곱의 기도는 여러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야곱은 하느님을 ‘당신’으로 표현하면서 그분과 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야곱은 되돌아오는 길에 형이 장정 사백 명과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하느님을 찾습니다. “저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당신 종에게 베푸신 그 모든 자애와 신의가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사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 요르단강을 건넜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이 두 번째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 말씀으로 시작하고 맺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야곱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위안과 도움을 찾는 야곱은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하느님과 친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기도가 야곱에게 힘을 줍니다. 학교나 일자리 등 많은 이유에서 우리는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낯선 환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분에게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이끕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기획 ‘성경 속 기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전 교수인 서울대교구 신정훈(미카엘) 신부가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기도를 바로 알고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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