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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평화를 기원하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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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6 | |||
제1차 세계 어린이의 날(2024년 5월 25~26일) 담화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린이들은 ‘평화의 창조자’가 돼야 합니다”라고 하시고, “고통받는 또래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에게 기도해달라고 당부하시는 교황의 말씀은 평화가 어느 특정 그룹이 아닌 모두의 과제이며,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부터 시작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교회는 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주님의 기도 이후에 평화 예식을 배치하여 평화는 바로 옆의 이웃부터 시작해서 널리 퍼져가야 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 예식은 예수께서 산상 설교에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려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가르침(마태 5,23-24 참조)에 따라 이미 2세기부터 미사에 들어왔습니다. 155년경 기록된 유스티노의 「호교론」 제1권 65장에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빛을 받은 이와 모든 곳의 다른 모든 이를 위해 함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 기도가 끝나면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합니다”라고 합니다. 곧 지금의 ‘보편지향기도’를 하고 ‘평화 예식’이 뒤따랐고 ‘예물 봉헌’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식 순서는 동방 전례에서 아직도 유지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5세기 초엽, 대 그레고리오 교황에 의해 오늘날의 자리인 ‘감사 기도’ 후 ‘평화 예식’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중세에는 성직자 중심으로 거행되던 전례 경향에 따라 이 예식은 성직자들끼리만 나누는 평화 예식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고대 전통에 따라 평화 예식을 빵 나눔과 분리시키고, 신자 모두가 참여하여 이웃과의 화해를 통한 영성체 준비 성격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평화 예식은 세 부분, 기도 초대문을 포함한 ‘평화의 기도’, 공동체를 위한 ‘평화의 기원’, ‘평화의 인사’로 진행됩니다. 사제는 평화의 기도로 이끄는 초대문에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는 평화에 관한 예수님의 약속을 확인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샬롬)는 싸움이나 전쟁이 없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평화는 예언자들이 예고한 것과 같이 미래의 구원자,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평화로서 하느님과 인간 및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를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당신의 현존과 관련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요한 복음 주해」에서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때 영혼은 언제나 평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는 평화의 인사는 아우구스티노 시대 이전부터 전례에 들어왔습니다. 이 인사를 통해 교회는 자신과 온 인류 가족의 평화와 일치를 기원합니다. 또한 사제가 교우들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자세는 기도 권고나 주례 기도 때와 달리 교우들을 포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 5,14)에서 사랑의 입맞춤과 평화를 연결시킵니다. 2~3세기 교부들인 유스티노와 히폴리토 등의 저서에서 이미 전례 예식으로 소개됩니다. 평화의 인사는 민족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정할 수 있는데, ‘한국 교구들에서는 평화의 인사로 가벼운 절’을 하기로 했습니다(「로마미사경본 총지침」, 82항). 평화 예식은 주님과 함께 그분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마중물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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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인내하며 하느님을 찬미한 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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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2 | |||
오래전 일이다. 어느 겨울 몹시 추운 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초등학생 형제가 있었다. 뒤에 귀마개와 장갑을 낀 동생이 털모자도 없이 낑낑대며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돌리는 형의 양쪽 귀를 잡고 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면서도 목이 메었다. 나도 형과 동생에게 저렇게 따듯던 적이 있나 자연히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느 저녁 형과 영화를 보러 갔다. 막상 극장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의 푯값에서 딱 10원이 모자라 영화를 보지 못했다. 풀이 죽은 내가 측은했는지 형은 나를 청계천의 중고 서점으로 데려가 책을 골라주었다. 그때 처음 본 소설이 삼국지였는데 며칠 동안 열심히 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형제자매 사이는 무척 친하면서도 경쟁심을 갖고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고 한다. 그래서 형제자매 사이의 어린 시절의 관계는 평생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면 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며 어른이 되어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예쁘고 아름다운 동생 라헬에 비해 레아는 눈에 생기가 없었다고 표현한다. 시력이 약하다는 것은 무엇을 볼 때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거나 이마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시 근동 지방의 미적 기준의 큰 결점이 되었다. 야곱이 라헬을 선택하는 순간 레아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레아는 야곱의 편애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여성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 한 레아는 평생을 동생 라헬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 야곱을 지켜보아야 했다. 레아는 인내심이 강하고 인성이 좋은 여성이었다. 레아의 아들들의 이름에도 남편에 대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첫아들을 르우벤이라 부르며 이제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희망했다. 레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살펴주셔서 아들을 낳아준 자신을 야곱이 사랑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겼고 호소를 들어주었다며 시메온이라 불렀다. 셋째는 레위였다. 아들을 셋이나 낳았는데도 남편의 마음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레아는 넷째 아들을 출산하여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송하리라는 뜻의 유다라고 이름을 붙였다. 레아는 소극적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끊임없이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레아는 삶이 힘들었어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라반의 이기적인 행동과 남편의 냉대, 라헬에 대한 열등감에도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았던 레아를 하느님은 잊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창세 29,3) 하느님은 레아의 마음을 알아주셨고 은총을 내려주셨다. 마태오복음서 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며, 그 다윗은 레아의 아들인 유다의 후손이다. 결국 레아는 세상을 구할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선조가 되었다. ![]()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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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마음의 치유제인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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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53 | |||
누구나 마음 속에 품고 사는 응어리 울고 싶은 마음 억제하기보다는 자기감정 오롯이 쏟아 실컷 울어야
마음 건강을 챙기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눈물입니다. 예전 우리 어른들은 “남자가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여자가 울면 집안에서 복이 나간다”고 하며 눈물을 보이며 우는 것에 깊은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심리치료가 발전하면서 울음이 마음의 치유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실컷 울고나면 치유가 된다는 것인데, 그러질 못하고 울지 못할 때 그것이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있다 병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음 안에 수많은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가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나오려고 하는 것은 그때의 한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컷 울어야 합니다. 아기들을 보면 울다가 자다가를 반복합니다. 이런 아이들처럼 해주어야 합니다. 울고 싶은 마음을 윽박지르면 안 됩니다. 마음이 가는 데로 따라가 줘야합니다. 그렇게 울다보면 서럽던 마음이 가라앉고 한 덩어리도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 중에 서러운 일이 생기면 목 놓아 우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런 아이들은 건강한 어른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질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건강치 못한 어른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자기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로봇처럼 보이는 어른이 됩니다. 무엇을 봐도 감동을 못하고 무표정한 어른들은 울지 못한 어린 시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울지 못하고 어른이 된 사람들은 우는 사람들을 보면 불편해합니다. 울지 못한 자기 마음안의 어떤 것이 투사가 돼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치료에서는 하루 30분 실컷 우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합니다. 울어야 산다!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더위 가시라고 꼰대유머 하나 올립니다. 난 성인신부가 되고픈 신부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성당에 가서 조배한다. 근데 천박한 신자들이 그런 나를 보고 대인기피증이라고 수군댄다. 난 성인신부가 목표다. 그래서 가능하면 침묵을 지키려 한다. 근데 그런 나를 두고 자폐증이라느니 치매라느니 말들이 많다. 천박한 것들은 사람을 몰라본다. 난 성인신부라는 칭호가 좋다.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신자란 것들이 기도할 때마다 왜 ‘우리 본당신부님이 성인신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일까. 사람을 몰라보는 천박한 것들이다. 나는 나의 영성이 성인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강론 때도 항상 성인들의 영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왜 내 미사에는 젊은것들은 하나도 안 오는 것일까? 왜 귀가 어두운 노인들만 오는 것일까? 그래도 지난번에 할매 한 분이 내 강론시간에 눈물을 흘려서 나도 울컥했다. 그래서 미사 후 물어봤다. 자매님 제 강론의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드셔서 눈물을 흘리셨나요? 그러자 할머니 왈, 강론은 잘 모르겠고 내 목소리가 얼마 전 죽은 반려견 소리와 비슷해서 울었단다. 헐! 내 강론이 개소리?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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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기도 이야기] 짝을 찾으며 바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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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1 | |||
중대한 일 앞에서 늘 하느님께 도움 청하길
“아내를 얻은 이는 행복을 얻었고 주님에게서 호의를 입었다.”(잠언 18,22)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은 뒤 이사악의 부인감을 자기 고향에서 얻어 오도록 자신의 가장 나이 많은 종을 파견합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에 함께해 주시고 자기에게 미래를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를(창세 24,7 참조) 그에 앞서 보내시리라 믿습니다. 자신의 짝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짝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자신의 사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종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 오늘 일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제 제가 샘물 곁에 서 있으면, 성읍 주민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것입니다. 제가 ‘그대의 물동이를 기울여서, 내가 물을 마시게 해 주오.’ 하고 청할 때,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먹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 소녀가, 당신께서 당신의 종 이사악을 위하여 정하신 여자이게 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자애를 베푸신 줄 알겠습니다.”(창세 24,12-14)
여기서 자기에게도, 또 달리 말하지 않아도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소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러한 소녀는 친절하고, 다른 이를 돌보고, 나그네를 맞아들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까지 배려하는 부지런한, 훌륭한 여인의 덕을 갖춘 이를 의미합니다. 목마른 낙타 한 마리가 70리터의 물을 마시니 그가 데려온 열 마리 낙타에게 주저함 없이 물을 샘에서 길어 먹이는 소녀는 배려심과 수행 능력을 겸비한 아름답고 뛰어난 여인으로서 이사악의 아내,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종의 행위와 하느님의 도우심이 복합되면서 하느님이 누구를 이사악의 아내로 정하셨는지가 드러납니다. 종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창세 24,15 참조) 레베카가 등장하고 자신이 기도한 대로 그녀가 행동하자 종은 무릎을 꿇어 주님께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에게 당신 자애와 신의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창세 24,27) 그는 주님께서 그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어 그는 주인의 아우 집안인 레베카의 집에 들어가고 그 가족들에게 자기가 바친 기도와 그 기도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증언합니다. 이로써 그의 말을 듣는 가족들은 이 일에 분명히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고, 하느님께서 몸소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사악과 레베카의 결혼을 승낙합니다.(창세 24,50 참조) 이에 다시 한번 종은 땅에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합니다(창세 24,52 참조). 평생의 반려자를 찾는 것은, 또 그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매우 어렵습니다. 결혼 문제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 더 이상 자신의 힘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는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많은 종은 그런 자세의 모범입니다. 그는 사건 전체에서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다섯 번이나(24,12-14;26-27;42-44;48;52) 기도합니다. 누구에게나 미래를 향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에서 보이듯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셨고 앞으로도 우리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누구나 혼자 길을 걷지 않고 그분과 함께 갑니다. 그분의 도움을 믿고 그분과 함께 내리는 결정에 큰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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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의 꽃은 장미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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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7 | |||
백합·로즈마리 등 다양한 꽃들로 성모님 기억
계절의 여왕인 5월,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참 아름다운 시기입니다. 장미하면 또 다른 여왕이 생각나지요. 바로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입니다. 성모님하면 장미가 떠오를 정도로 장미와 성모님의 관계는 깊습니다. 성모님이 처음 발현하신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는 한겨울에 장미꽃들이 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의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장미로 둘러싸인 신발을 신고 있었고,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발치에도 노란 장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성모님과 장미를 결부시키곤 하는데요. 잘 아시는 것처럼 묵주기도(Rosario)는 라틴어로 ‘장미 꽃다발’을 의미합니다. 또 성모호칭기도를 바칠 때는 성모님을 ‘신비로운 장미’라 부르며 전구를 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상징하는 꽃은 장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다미아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백합으로 입히셨고, 장미로 덮으셨으며 꽃들로 치장시키셨도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꽃은 장미, 백합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백합은 성모님의 동정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중세기 화가들은 성화에 흰 백합을 그려 성모님이 동정녀임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에는 백합이 특별히 더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그래서 서구권에서는 흰 백합을 성모님의 백합(Madonna lily)이나 성모영보의 백합(Annunciation lily)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성모님을 표현하는 성미술에는 백합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꽃이 또 있는데요. 바로 제비꽃입니다. 제비꽃은 성모님의 겸손과 겸양을 보여주는 꽃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신비의 포도나무」라는 저서에서 성모님을 “겸손한 제비꽃”이라고 칭송했는데요. 성인은 “작고 땅에 가깝고 향기롭고 색이 소박한” 제비꽃에서 겸손을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제비꽃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겸손을 상징한다”고 전합니다. 아예 이름에 성모님의 이름이 담긴 꽃들도 있습니다. 메리골드는 마리아와 황금(Gold)이 합쳐진 이름인데요. 16세기 무렵 유럽에 이 꽃이 유래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이 꽃을 성모님에게 봉헌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장미’라는 의미의 로즈마리는 성모님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요. 전설에 따르면 성모님이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던 당시 로즈마리 위에 옷을 두고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때 원래는 흰색이었던 로즈마리의 꽃이 오늘날처럼 파란색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파란색은 하늘의 모후인 성모님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라벤더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습니다. 이 전설에서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의 옷을 라벤더 위에 널어 말리셨는데요. 그때부터 라벤더에 향기가 머물게 됐다고 하네요. 사실은 이밖에도 성모님과 관련 있는 꽃은 수십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꽃을 통해서 아름다운 어머니, 성모님과 성모님의 덕행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꽃들이 아름다운 이 시기, 꽃들을 바라보며 성모님과 함께 기도한다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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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영성체를 위한 준비 기도인 주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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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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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는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전능하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특히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자기 자녀들의 이런 마음을 잘 헤아리는 부모는 자녀가 행한 결과에 대해 인정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좋은 결과가 있을 때만 ‘칭찬’해 주는 부모보다, 자녀가 어떤 일을 해 나가는 과정의 노력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격려’해 주는 부모의 자녀가 훨씬 자존감이 높다고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하느님 아버지의 격려를 잘 드러내는 것이 ‘주님의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로 가기 위한 여정에서, 하느님에 대해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며 무엇보다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현행 미사에서 교회는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신 기도, 곧 마태오 복음(6,9-13)과 루카 복음(11,2-4)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주님의 기도를 평화의 인사 전에 바칩니다. 이미 4세기에 로마 교회는 이 기도를 대부분의 동방과 다른 서방 교회에서처럼 빵을 쪼갠 후에 낭독했습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재위 590~604년)은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감사 기도 다음으로 배치했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기도가 감사 기도의 완성을 이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이미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를 일상생활에 필요한 양식 외에 천상 양식인 성체로 여겼으며,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훌륭한 청원을 영성체 준비로 간주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주님의 기도를 ‘주례자의 기도’로 삼아 사제 혼자 바쳤으며, 신자들은 마지막 청원인 “악에서 구하소서”만 함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1964년 「전례 헌장」의 올바른 실천을 위한 첫째 훈령 「세계 공의회」 48항은 이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로 복귀시켰고, 기도 끝에 부속기도가 이어지기 때문에 “아멘”은 삭제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자세는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부속기도는 이미 초세기 동방과 서방 전례에서 나타납니다. 부속기도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주님의 기도 마지막 두 청원인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와 “악에서 구하소서”를 확대한 내용으로, 모든 악으로부터 해방과 현세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와 근심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라는 권고에서 알 수 있듯이 초 세기부터 주님의 기도는 오직 세례받은 신자들만이 바칠 수 있는 신자 전용 기도입니다. 2세기 초에 작성된 「디다케」 8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기도를 ‘하루에 세 번’ 바치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성무일도의 아침과 저녁기도, 그리고 미사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도록 배치했습니다. 또한 신자 전용 기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옛 전통인 ‘주님의 기도 수여식’을 현행 「어른 입교 예식」에 복구시켜서 ‘정화와 조명의 기간’의 세례 전에 뽑힌 이들에게 ‘수련식과 수여식’에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뽑힌 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정신을 더욱 깊이 깨닫고, 이 정신으로 특히 성찬 모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어른 입교 예식」 25항)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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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대축일 ‘믿을 교리’에 따라 기리는 의무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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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2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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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믿을 교리’에 따라 기리는 의무 축일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경에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른다. 예루살렘(동방) 지역에서는 이미 6세기부터 8월 15일에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날을 지내왔다. 서방은 동방에서 전파돼 8세기에 이르러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이미 마리아가 육신과 함께 승천했다는 확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성경에서 승천의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승천 교의가 진리에 어긋나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성경과 성전을 바탕으로 성모님의 생애 마지막에 관해 탐구한 하느님 백성의 영적 여정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 하늘로 오름을 받으심은 그분께서 걸으신 믿음의 여정이 마지막 목표인 구원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과 교부들의 확실한 증언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성모 승천 교의가 선포되기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하던 20세기 들어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할 수 있다는 신학자들이 증가했다. 당시 성모 승천 교의에 대한 교회 입장을 신학적으로 종합한 예수회 신학자 필로그라씨(G. Filograssi)는 교의를 입증하는 방법 중 하나로 현재 교회의 신앙 의식에서 출발해 그 신앙이 계시적 성격을 지닌다고 결론지었다. 성모 승천은 이미 교회가 분명하게 믿고 있는 교의 진리들 안에 내포돼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마침내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 교의 선포의 근거는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이다. 즉 기도의 법은 믿음의 법을 세운다는 원칙을 적용한 것인데, 신자들이 이미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교리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승천을 통해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원하는 구세사적 목표에 이르렀다. 즉 마리아처럼 자신을 하느님께 개방하고 그분의 구원 의지 실현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은 마리아와 같이 ‘전인적 완성’에 이른다는 사실을 승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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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2)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 라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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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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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마음이 병든 사람들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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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52 | |||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왜곡 감추는 데 급급해 감정 표현 서툴러 내면의 상태 정직하게 볼 수 있어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툽니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스스로 왜곡하는 일이 많습니다. 화가 났어도 그것이 화가 난 것인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부인합니다. 서운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고 부인합니다. 왜 그런가?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했다가 속 좁은 사람이란 비난을 들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또 자기 마음 안에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데도 끝까지 자기감정을 감추려고 합니다. 자신이 지금 이러는 것은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변명하기 급급합니다. “이게 다 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식으로 자기 분노를 합리화하는데 달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고 술로 달래거나 감정회피를 하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생기는 부작용이 ‘뒤끝’입니다. “저 사람은 뒤끝이 안 좋아”라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감정 표현을 회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속과 겉이 다른 사람, 끝이 좋지 않은 사람이란 악평을 듣습니다. 간혹 성인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 중에 이런 분들을 보곤 합니다. 성인들은 자기 마음 안에 어떤 불순한 감정도 없는 양 자기 안의 불편한 감정들을 다 외부의 악이 던지는 유혹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은 순수결정체라고 믿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과 내 마음 안, 특히 무의식 안의 시궁창 같은 상태를 직면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생활에 필수입니다. 이런 자기 직면을 거부하면 세심증, 결벽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신경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을 속칭 ‘짝퉁 성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더위에 유머 바람 한 자락 보냅니다. 어느 ‘기품 있는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기품 있는 신부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품 있게 말해준다. 새로운 보좌가 강론 때 버벅거리길래 ‘넌 왜 강론을 비빔밥처럼 하냐? 왜 나처럼 기품 있게 하지 못하냐’고 조언했다. 그런데 신자란 것들이 보좌가 버벅대는 건 귀엽다하고 기품 있는 내 강론은 식상하단다. 천박한 것들이다. 신자들이 깔깔댈 때 보좌가 같이 깔깔대는 걸 보고 기품 있게 살라고 조언했다. 근데 신자란 것들이 보좌가 귀엽다고 하면서 나 같은 주임 밑에서 잘 견딘다고 위로해준단다. 천박한 것들끼리 잘 논다. 강론 때 어려운 전문 용어를 잘 사용하는 나는 박식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다. 근데 천박하게 웃기는 보좌신부 강론은 녹음까지 하면서 왜 내 강론 시간에는 자빠져 자려고 하는 것일까? 수준 낮은 천한 것들이다. 식사 때는 모든 것이 세팅돼 있어야 하고 먹을 때도 절대 소리를 안 낸다. 근데 보좌놈은 손으로 먹기 일쑤고 소리도 요란하다. 태생이 상 것 같다. 근데 신자란 것들이 날 본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보좌의 먹성을 칭찬하며 내 주둥이가 짧단다. 헐! 사람을 몰라보는 천박한 것들이다.”
홍성남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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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기도 이야기] 이사(移徙)하면서 바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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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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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연말까지 기도에 대해 여러분과 생각을 나눌 신정훈 미카엘입니다.
나이 마흔의 야곱은 형 에사우를 피해 부모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야곱의 기도는 여러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야곱은 하느님을 ‘당신’으로 표현하면서 그분과 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야곱은 되돌아오는 길에 형이 장정 사백 명과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하느님을 찾습니다. “저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당신 종에게 베푸신 그 모든 자애와 신의가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사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 요르단강을 건넜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이 두 번째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 말씀으로 시작하고 맺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야곱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위안과 도움을 찾는 야곱은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하느님과 친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기도가 야곱에게 힘을 줍니다. 학교나 일자리 등 많은 이유에서 우리는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낯선 환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분에게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이끕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기획 ‘성경 속 기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전 교수인 서울대교구 신정훈(미카엘) 신부가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기도를 바로 알고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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