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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제목 | 이름 | 조회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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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4 |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이 다 아시는데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다윗의 감사 기도 (2사무 7,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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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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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와 사무엘 또 다윗과 솔로몬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물려 줄 수 있음을, 기도는 부모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다윗은 공도 많고 흠도 많은 사람이지만 하느님과 매우 가깝게 지냅니다. 그는 여러 번 하느님께 여쭙고, 그분으로부터 답을 받으며(1사무 23,10-12; 30,8; 2사무 2,1; 5,19.) 하느님을 찬미하며(1사무 25,32.39) 그분 앞에서 흥겹게 춤을 춥니다.(2사무 6,5.14.21) 이러한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다윗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기를 원합니다.(2사무 7,2.5) 하지만 하느님은 이를 거절하시면서 오히려 그에게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하느님은 똑같이 집을 말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집은 하느님의 거처할 성전이고 하느님이 지어주실 집은 다윗의 가문입니다. (2사무 7,11) 다윗은 하느님으로부터 큰 약속을 받고 긴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2사무 7,18-29) 다윗은 하느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18절) 기도합니다. 다윗은 11번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르고 (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하느님’, ‘주’, ‘주님’ 등으로 문맥에 따라 번역하는데, 모두 굵은 글씨로 표기합니다) 그중에서 7번은 그 앞에 ‘주님’을 덧붙입니다.(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주 하느님’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열 번이나 자신을 ‘당신의 종’으로 칭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다윗이 하느님과 얼마나 친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겸손함을 보이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제가 누구이기에”(18절)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부당함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다윗이 당신께 무슨 말씀을 더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알고 계십니다” (20절)라는 구절은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다면 그분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청하는 다윗은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더라도 인간의 기도는 새로운 것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25.28.29절)라는 말과 함께 다윗은 하느님께 자기 집안에 복을 내려주시길 청원하는데, “당신이 하신 말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25절),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28절),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29절) 등은 다윗의 청원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함을 잘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다룹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당신께서는 당신 종의 귀를 열어 주시며, ‘내가 너에게서 한 집안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종은 이런 기도를 당신께 드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27절)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셨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께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돈독하고 생생한 관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귀한 것을 선물하시는데도 인간이 그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다윗이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원의는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십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거절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허락하시는 바를 수행할 때 필요한 믿음만큼 큰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다윗은 하느님과 친하게 지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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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 |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핼러윈은 원래 교회 축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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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91 | |||
교회 축일에서 유래한 핼러윈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라는 뜻
하루 전날인 10월 31일에 기념
가정에 어린이가 있으시다면, 핼러윈 행사를 챙겨보신 일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은 이날 유령이나 캐릭터 등으로 분장을 하며 사탕을 나누는 활동을 하곤 합니다. 청년들 사이에서도 핼러윈은 널리 퍼졌는데요. 청년분들 중에도 이날 또래들과 파티를 열어본 일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핼러윈하면 호박머리를 한 유령이나 귀신, 괴물 같은 다소 공포스러운 것들이 떠오릅니다. 또 과자나 사탕 같은 간식들도 생각나지요. 그러다보니 아주 세속적인 행사라고만 여겨지기 쉬운데요. 실은 핼러윈은 교회 축일에서 나온 날입니다. 핼러윈이 교회 축일에서 온 날이라는 것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핼러윈(Halloween)은 올 핼러우스 이브(All Hallows’ Eve)를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이브’는 잘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전야를 뜻하는 말이고요. 핼러우(Hallow)는 ‘성인’(聖人)을 뜻하는 말입니다. 핼러윈은 바로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를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 전날인 10월 31일에 핼러윈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사실 10월의 마지막 날은 고대 영국과 아일랜드 지역에서 생활하던 켈트족이 한 해를 마무리하던 날이었습니다. 켈트족들은 이때 사윈(Samhain)이라는 큰 축제를 지냈는데, 축제기간에 죽은 이들이 찾아온다고 생각했고, 죽은 이들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가면을 쓰거나 귀신으로 분장하곤 했다고 합니다. 켈트족 국가들이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자,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 핼러윈을 지내며 켈트족들이 오랜 풍습을 교회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사윈이 죽은 자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축제였다면, 핼러윈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의 핼러윈은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지 않는 개신교가 널리 퍼지면서 사라졌는데요.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지역 출신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핼러윈 풍습을 가져간 것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핼러윈으로 변화했습니다. 핼러윈의 배경이 된 모든 성인 대축일을 시작으로 교회는 특별히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시기를 보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날인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고, 11월 1~8일 교회 묘지 등을 찾아 전대사의 조건을 채우면, 죽은 이에게 양도할 수 있는 특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월 전체는 위령 성월이지요. 이처럼 핼러윈은 특별히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시기와 이어지는 날입니다.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축제처럼 변한 핼러윈이지만, 지난해와 올해 핼러윈은 그리 떠들썩하지 않은 듯합니다. 많은 분들이 2022년 10·29참사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추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핼러윈은 핼러윈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아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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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진상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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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88 | |||
마음은 겹겹이 쌓인 총체물이기에 구조·생리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어 종교인일수록 마음 앞에 겸손하며 마음에 대해 무지함 받아 들여야
심리치료 하는 상담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골치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어떤 심리처방을 해주어도 듣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나는 내 마음을 다 알아!’ 하면서 고집을 부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는 마음 치유법에 귀를 막습니다. 그리고 자기식대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일에 충고 아닌 충고까지 합니다. 그래서 진상들이라고 하는데, 이들보다 더 골치 아픈 사람들이 종교인들입니다. 심리공부를 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몇 가지 어설픈 지식으로 마음에 대해 다 아는 듯이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위험천만해 보입니다. 마치 시장에서 만병통치약을 파는 사람처럼 보여서입니다 제로 의존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돌팔이 처방을 따르다가 마음병을 키우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사람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마음은 단순하지 않고 층층이, 겹겹이 쌓인 총체물이라서 그 구조와 생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무의식은 바다와 같이 깊고 넓어서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심리학자 프로이드가 자기가 평생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려고 애썼는데 다 보질 못했다고 고백했겠습니까.
몸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대상입니다. 해부하면 사람의 몸은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몸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학은 지금도 몸에 대한 연구가 한창입니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 마음을 다 안다’고 호언하는 종교인들이 있는데, 다 사기꾼들입니다. 종교인들일수록 자신이 마음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무지로 인해 수많은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길고 긴 코로나로 지쳐가는 교우분들게 꼰대유머 하나 소개합니다.
“여보세요. 신부님이시지요?” “네.” “저 신부님 유튜브팬이에요~ 강의 넘 잘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뜻으로 작은 선물 하나 보낼게요~”
“아 그런걸 뭐….”
“(호호호) 근데 무료는 아니고요. 세일기간이라 반값만 받을게요! 아주 최고급 여성화장품이에요.”
“네? 저는 지금 와이프가 없는데요.”
“아 그러세요? 기러기 아빠이신가보다~”
“아 애도 없어요.”
“어머? 별거중이세요?”
“아뇨~ 결혼 안했어요.”
“어머! 독신이세요? 저도 혼자 사는데…”
“아 그게 아니고 신부들은 결혼하지 못해요.”
“어머! 제가 아는 신부님은 사모님 있던데요.”
“아 거긴 성공회일거예요. 그쪽에 연락해보세요~”
“어머 죄송해요.”
“생각 바뀌시면 전화주세요.”
난 착한신부라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전화해줄 거라고 했다. 유튜브 팬 하나 놓치기 싫어서……. 가끔 이런 전화가 와서 마음을 심란하게 하곤 합니다.
홍성남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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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 |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1) 마태오복음 첫 장에 왜 족보부터 나오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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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45 | |||
어두운 과거에 묻혀 살지, 딛고 일어설지 선택해야 족보는 과거를 드러내는 것 과거를 대하는 태도는 심리치료에서도 매우 중요 있는 그대로 인정·위로해야
복음서는 모든 성경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책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다보면 자꾸만 “왜?”라는 궁금증이 쏟아진다. 2023년 한 해 동안 홍성남(마태오) 신부는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연재, 복음서에 관한 신자들의 질문들을 영성심리의 관점에서 통쾌하게 풀어낸다.
마태 1,1~17(루카 3,23-38)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 중략 … 야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마태복음 첫 장에 왜 족보부터 나오는 것인가요? 족보 따지는 것은 케케묵은 일이 아닌가요?◀
A.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인들을 상대로 선교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유다식의 글을 올리신 것이지요. 이것은 유다인들의 인사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시골에 가면 수인사를 나눌 때 족보를 들먹입니다. ‘어떤 조상님이 어떤 벼슬을 했고 어떤 가문 출신이고’ 하면서 서로의 족보를 내보이는 인사를 합니다. 심지어 깡패들도 족보가 있고 개들도 족보가 있습니다. 왜 족보부터 들이미는 것일까요? 자신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게 하려는 일종의 방어책입니다. 상대방이 별 볼 일 없어 보이다가도 부모님이나 조상님 중에 한자리 하신 분이 계시다고 하면 “아, 그래” 하면서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에 족보는 나의 정신적 입지를 갖는데 아주 유용합니다. 족보는 심리적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족보가 나의 과거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숨기거나 바꾸려고 노력하곤 합니다. 족보를 뜯어고치거나 아예 새로 사는 허망한 짓을 하는 것은 과거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또한 심리치료에서는 자아의 건강상태를 알아보고자 할 때 그 사람이 자기의 과거를 얼마나 정직하게 대면하는 지로 가늠하기도 합니다. 상담가들은 상담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나면 첫 기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첫 기억이란 그 많은 기억 중에서 가장 또렷이 떠오르는 기억인데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기에 상담가들이 필수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가 엉망진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거가 지금 삶의 밑거름이 됐다고 긍정적 평가를 하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찢어지게 가난했음을, 학교도 제대로 다니니 못했음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지금의 성공이 그런 어려움을 극복한 결과였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에너지도 넘치고 리더십도 강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자기 과거를 수치스러워하고 숨기거나 미화하려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건강치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가 주는 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평생 짐을 지고 가듯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와 족보를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갖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가? 과거는 마음 안의 기억이고 상처 입은 아이와 같습니다. 자기 마음 안의 과거라는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위로를 해주면 보기 싫은 과거의 모습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를 높은 곳으로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산 정상에 오른 사람처럼 자신의 걸어온 길을 여유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은 한 번의 실수나 실패도 없이 살아왔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과거를 딛고 얼마만큼 일어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과거 속에 파묻혀서 사느냐 아니면 과거를 밑거름으로 성공한 삶을 사느냐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자신의 족보가 아무리 형편없을 지라도 자랑스럽게 여겨질 때까지 우리 인생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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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 |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삶의 무게에 허덕일 때 드리는 기도(민수 1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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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66 | |||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모세는 백성 및 자신을 시기하는 동기, 아론과 미르얌을 위해서(민수 11,2; 14,13-19; 21,7; 12,1-2.13) 주님께 탄원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민수21,7; 12,11-12)라고 모세에게 청합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멈추도록 중재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하지만 백성은 이미 이집트를 탈출하기도 전에(탈출 5,21), 탈출하면서(탈출 14,11-12), 또 탈출하자마자(탈출 15,24;16,2;17,3) 불평을 늘어놓았고,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뒤에도 백성의 불평은 그치지 않습니다.(민수 11,1-6.10) 급기야 백성들의 성화에 탈진한 모세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수 11,11-15) 지칠 대로 지친 모세는 왜곡과 과장을 섞어 말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느님의 눈에 들었음에도(탈출 33,12-13) 자신이 그분의 ‘눈 밖에 났다’(11,11)고 하고, 하느님이 자신에게 백성을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품에 안고 가라’신다고(11,12) 넋두리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기까지(11,21-22)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곧바로 해결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일단 하느님은 이스라엘 원로 72명에게 영을 내리시어 모세의 짐을 나눠서 지게 하시고(11,16-17.24-30) 고기를 내려 주십니다.(11,18-20.31-33) 적게 거둔 사람이 열 호메르(대략 2000~3000리터)의 메추라기 고기를 모았을 정도로 하느님은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십니다. 백성은 하느님을 무시하면서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민수 11,4-6.10) 민수기 11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음식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자유를 누릴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삶을 택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벌하시는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 상에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람이 하느님 없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소진한 삶, 번아웃 증후군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그러한 상황에서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이 효용이 있음을, 아니 꼭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하느님께 넋두리하면 당장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거운 짐과 걱정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은 나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는 이를 보내 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무거운 짐을 덜어 주시는 분입니다. 화가 치밀고 미움이 끓어오를 때 우리는 그에 걸려 넘어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가져가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비록 그것이 내 눈에 가려져 있더라도 내가 갈 길을 알고 계시고,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욕심과 불평이 아니라 생명, 건강, 소중한 사람들과 같이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선물이 우리 마음을 채울 때 우리는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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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십자가 위 ‘INRI’의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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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468 | |||
“‘인리’가 뭐예요?” 알파벳을 읽게 된 무렵, 부모님께 드린 질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 느닷없이 ‘인리’가 뭐냐고 물으면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리’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은 바로 십자가 위에 적힌 문구, ‘INRI’를 보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INRI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온 약자이기 때문에 보통은 ‘인리’라고 읽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얼 의미할까요?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의 죄명입니다. 이 문구에 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요한복음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을 십자가 위에 달게 했는데 히브리어·라틴어·그리스어로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하고 저자가 말했다’라고 고쳐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빌라도가 “한 번 썼으면 그만”이라면서 이 죄명을 그대로 붙였다고 합니다.(요한 19,19~22 참조) 마르코복음서는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마르 15,26)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마태 27,37), 루카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고 죄명이 쓰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예수님의 죄명이 ‘임금’이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수석 사제들이 항의한 것처럼, 사형집행자 입장에서는 ‘임금’이라는 죄명은 ‘자칭 임금’이라는 의미로 적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임금’이라는 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요 임금이며 사제가 되고 하느님 자녀들 곧 새롭고 보편적인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13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는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왕직에 참여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이 왕직에 참여하는 방법이 나오는데요.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786항) 십자가에 적힌 문구를 바라볼 때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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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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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53 | |||
중고등부 시절 소풍과 단체 영화관람은 가장 신나는 시간이었다. 당시 대작들로 꼽히는 유명한 작품들을 단체 영화관람으로 많이 보았다. 여학교에서 같은 시간에 관람 계획이 잡히면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온 학교가 술렁거리기도 했다. 찰턴 헤스턴이 모세로 출연한 영화 ‘십계’도 보았지만, 사실 그때는 성경의 배경을 잘 모르니 어떤 영화였는지 이해가 쉽지 않았다. 다만 흰 수염이 긴 모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기둥 사이로 탈출하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지도자가 되어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모세는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민족의 구원자로 추앙받는 위대한 인물이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탈출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역사 한가운데 있는 모세를 묵상하면서 이스라엘의 백성을 처음으로 세계사에서 탄생시킨 장본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탈출기 전반을 읽어보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의 일가는 평화롭게 생활했지만, 시간이 흘러 요셉을 모르는 새 파라오가 등장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우선 이집트로 내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가 시간이 흐르면서 늘어나자 파라오는 위협을 느꼈다. 이스라엘인을 박해하고 남자아이들마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모세의 어머니는 아들을 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고 마침 강가에 나온 파라오 딸의 눈에 띄어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인데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모세는 약 35년간 이집트 궁정에서 왕손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이집트 자체를 뒤덮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최악의 상태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태어났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세는 자신이 이집트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모세는 파라오 람세스의 신임을 쌓고 지냈다. 어느 날 동족인 노예들을 박해하는 이집트 경비병과 시비가 붙어 그를 죽였다. 졸지에 모세는 광야로 피신해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역사를 뒤바꾸는 엄청난 사건의 시작이었다. 광야에서의 인생 여정은 모세가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특급 수업 과정이 되었다. 광야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히브리 백성들을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도록 계시를 내린다. 모세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펄쩍 뛰며 거절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라며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땅 탈출이라는 ‘임파서블’한 명령을 내렸다. 모세는 진정으로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느님은 인간의 결점까지도 이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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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자학성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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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50 | |||
자신이 지은 죄만 바라보는 신앙 하느님과 건강하지 않은 관계 형성 생명이신 자비로운 분임을 믿어야
고해소에 대해 ‘고해소는 재판소, 고해신부는 재판장, 보속은 형량, 고백하는 신자는 죄수’라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신앙을 ‘자학성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은 매주 고해성사를 보시거나 간혹 심한 분들은 거의 매일 고해소를 찾아오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고해신부가 준 보속의 양이 적다고 다른 신부에게 가서 다시 고해성사를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 죄를 몇 번씩이나 지었는지도 고백해서 고해신부를 질리게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지은 죄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이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쉼터이심을 믿는 것인데 죄를 따지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기도는’ 많이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닌, 벌을 받지 않기 위한,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기도의 본래 성격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분들은 하느님을 마치 잔혹한 계부로 만드는 재주가 뛰어납니다. 어떤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갑작스레 비가 와서 옷을 버렸습니다. 비가 오는데도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하며 놀이터에서 비를 쫄딱 맞고 있다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모두 그 아버지를 욕할 것입니다. 자학성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늘 좌불안석으로 삽니다. 하느님 눈치를 보는 것을 신앙처럼 여기면서 늘 통회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삽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의 그런 삶이 하느님을 욕보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모릅니다. 건강한 신앙이란 ‘하느님은 아버지, 사제들은 치유자, 고해소는 병원, 신자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자 찾아온 사람들’이라는 관계가 형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만약 내가 하는 기도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눈치보고 불안해하는 그런 것이라면 나의 신앙생활이 건강한지 여부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오래전 명동성당에서 판공성사를 주는데 신자들이 많이 오셔서 거의 3시간을 고해소에서 나오질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서 ‘어? 다 끝났나?’하고 문을 열고 나오니 웬걸 긴 줄이 아직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고해소로 들어가서 고해소 벽 작은 틈으로 누가 없나 들여다보는데 ‘헉!’ 저쪽에서 누군가가 같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신자분이세요?”라고 물어봤더니 “아닌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다시 “누구신가요?”하고 물어봤더니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하세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고 묻자 “밖에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어서 뭐 선물이라도 주는 줄 알고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헐! 판공성사 때면 이런 분들이 가끔씩 찾아옵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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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기도 이야기] 아이를 낳지 못해 서러움을 당하다가 아이를 얻은 한나의 기도 (1사무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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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59 | |||
사무엘은 반복적으로 이민족의 괴롭힘을 당하던 판관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민족을 인도한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으로서(1,2.5-8) 아들을 주십사 애절히 기원하고(1,10-13), 어렵게 얻은 사무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한나는 자기 민족 역사의 전환기 중심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한나는 아이를 못 낳는 데다가 남편의 다른 부인이 그를 괴롭히고 화를 몹시 돋우었기에(1,5-6)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합니다. 먼저는 남편 앞에서 울고(1,7) 이제는 주님 앞에서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1,15) “주님의 면전에서 네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아라”(애가 2,19)는 말씀처럼 기도는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쓰라린 마음과 무거운 마음과, 괴롭고 분함을 그대로 털어놓습니다. 한나가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동안 사제 엘리가 그의 입을 지켜보면서 한나를 술에 취한 여자로 오해했다는(1,12-13) 사실은 당시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소리를 내어 기도했음을 추측게 합니다. 한나는 마음속으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침묵 속의 기도도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한나에게서 두 가지 자세가 눈에 띕니다. 첫째는 하느님 선물을 자신이 독차지하지 않고 아낌없이 다시 내놓겠다는 봉헌의 자세이고 둘째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자신을 꾸짖는 사제 엘리 앞에서 자신을 ‘당신 여종’으로 여기는 겸손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로 한나에게서 이미 변화가 감지됩니다. 울기만 하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한나는 기도 후에 음식을 들며 얼굴색이 밝아집니다. 또 기도의 구체적인 결과를 얻기도 전에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남편과 함께 주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후에 아이를 바치면서도 다시 두 사람은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이 사실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이는 현실의 어려움에 휩쓸리지 않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을 바친 한나는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이루시는 일의 근본적인 모습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1사무 2,1-10 참조) 한나는 넘치는 기쁨에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누구도 주님과 같지 않습니다”(2,2)는 고백은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은 없다”(탈출 9,14)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인간의 교만함과 거만함에 대한 경고입니다.(2,3) 뒤집어짐을 표현하는 열네 개의 반대말(2,4-7)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과 더불어 어떠한 인간적인 대단함도 그분 앞에서는 보잘것없으며 그것에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힘 있는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하느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역사를 이끄십니다. 이민족의 억압을 받던 이스라엘이 다윗 왕을 통해 ‘평온’(2사무 7,1)을 얻고, 엘리의 사제 가문이 몰락(1사무 2-4)한 뒤 사무엘의 등장하고, 사울이 선택되었지만 몰락하며(1사무 9-31), 한나가 사무엘을 바친 뒤 다섯 자녀를 더 얻었다는(1사무 2,19-21) 사실은 뒤집어짐을 노래하는 한나의 기도가 힘없는 이들의 하릴없는 독백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의 참된 고백임을 입증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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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전례에 쓸 수 있는 악기는 오르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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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6 | |||
오르간, 교회 전례에서 특별한 위상…방침에 따라 현악기·관악기도 사용 악기는 하느님 찬미 노래 도울 뿐…하느님 찬미 노랫소리가 더 중요
성당하면 떠오르는 악기가 있습니다. 전례를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오르간입니다. 큰 규모의 성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성당에는 오르간이 설치돼 있습니다. 교회는 오르간 축복 예식도 따로 거행하는데요. 오르간 축복 예식은 「축복 예식」 중에서도 ‘전례와 신심을 위한 성당 기물 축복 예식’ 항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례대나 감실, 성당문, 성화상, 십자가의 길 등 성당 안에서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들을 축복하는 예식서들을 모은 곳에 오르간 축복 예식서도 있는 것이죠. 교회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전례 거행에 가장 어울리는 악기는 오르간”이라면서 오르간을 “적당한 자리에 놓아 성가대와 교우들이 노래할 때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악기만 연주하는 경우에는 모든 이가 잘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명시할 정도로 오르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393항, 313항 참조) 이처럼 교회 안에서 오르간의 위상은 특별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라틴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은 전통적인 악기로서 크게 존중돼야 한다”면서 “그 음향은 교회 의전에 놀라운 광채를 더하고, 마음을 하느님께 드높이 힘차게 들어 올릴 수 있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전례헌장」 120항 참조) 이처럼 교회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오르간이지만, 사실 교회가 처음부터 전례에 오르간을 사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전례에 악기를 도입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오르간 역시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9세기 무렵부터 하나, 둘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교회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이 설치된 곳은 독일의 아헨주교좌성당(812년)이라고 하는데요. 이후로도 오르간은 여러 성당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교회 전례를 위한 중요한 악기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전례 중 악기 사용은 오르간만 가능한 것일까요? 오르간 말고 다른 악기들도 전례 중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르간과 달리 다른 악기들은 일종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전례헌장은 오르간 외의 다른 악기들은 지역 교회의 판단과 동의에 따라 거룩한 용도에 적합하고 성당의 품위에 맞으며 신자들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전례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한국 교구들도 오르간 외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를 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구들에서는 전례 중 관악기와 현악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악기는 특별한 경우에 신중하게 검토해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오르간이지만, 그렇다고 전례 음악에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전례 시기 중 대림 시기에는 오르간과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절제하고, 사순 시기에는 노래 반주에만 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주에만 쓸 수 있다는 것은 악기만으로 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례 음악에서 오르간 소리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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