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 20190428 다해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교황 프란치스코 - 자비의 상습범이 되길 바라시는 저의 주님 저의하느님!)
2019-04-27 15:24:05
박윤흡 조회수 976

발췌, 오늘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다, 가톨릭 출판사, 225-230

저자: 프란치스코 교황 / 엮은이: 진슬기 신부

 

‘자비의 상습범’이 되길 바라시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4월 8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미사 강론

 

  토마스 사도는 주님의 상처를 보고는 이렇게 외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여기에서 토마스 사도가 반복하는 저 형용사구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저의’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소유격 형용사죠.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이 저의 소유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전능하신 분을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죠? 사실 ‘저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자비를 찬송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분은 친히 우리의 소유가 되기를 원하셨으니까요.

  하여 우리에 대한 사랑의 역사 안에서 우리는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니, 당신은 단순한 하느님만이 아니라 ‘저의’ 하느님이시며, ‘저의’ 생명이십니다. 당신 안에서 저는 제가 찾으려 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발견합니다. 제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만큼이나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에 결코 노여워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확신을 바라고, 자비는 신뢰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십계명의 들머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참조) 그리고 또 반복하시죠.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참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당신을 질투하는 애인으로 ‘너의’ 하느님이라고 드러내시는 것 말입니다. 그리하여 토마스 사도는 울컥해진 마음에 이런 대답이 솟구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상처를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오늘, 우리는 자비가 그분 특성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분 심장 그 자체와 같음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에 우리는 토마스 사도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망설이고 확신 없는 다른 제자들처럼 살면 안 되죠. 주님과 사랑에 빠진 이들이 됩시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빠진다’는 말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랑을 어떻게 맛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손을 대어 예수님 자비를 느낄 수 있을까요?

  이에 복음은 부활 당일 저녁에 있었던 일을 강조하며 전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하시자마자 그 무엇보다 먼저 죄의 용서를 위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바로 용서받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용서받도록 자신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용서받도록 행동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저곳을 통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용서받도록 자신을 내놓고 있나요?”

 

 

  물론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하러 간다는 게 쉽지만은 않아서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또한 복음의 제자들과 같은 유혹을 받습니다. 바로 문을 모두 잠가 놓는 거죠.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저렇게 하였습니다. 한데 우리도 자신을 열고 죄를 말하는 것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죠. 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저 닫힌 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이해하는 은총을 주시길 빕니다. 이것이 바로 만남의 첫 단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때 감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이란 우리가 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이란 악을 이기기 위해 주님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영혼으로부터 받는 비밀스러운 초대이니까요. 우리가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에 겁먹지 마십시오! 우리는 부끄러움을 거쳐 용서받음으로 넘어가야 하니까요. 그러므로 부끄러움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세요!

 

  물론,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음에도 내 안에서 변화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언제나 같은 죄를 짓는다.” 우리는 낙담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충고하십니다. “너는 나의 자비가 너의 비천함보다 더 크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너는 다시 죄 짓는 상습범이 되고 싶다는 말이냐? 차라리 자비를 구하는 상습범이 되어라. 그러면 우리는 누가 가장 나은 사람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용서의 성사(고해성사) 이후에 모든 것이 처음과 달라지지 않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용서받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워지고 용기를 얻으니까요. 그때마다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보다 사랑받고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느끼고 다시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처음보다 더 많은 비애와 후회를 느끼게 되죠. 그리고 이것은 차츰차츰 우리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활력이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용서에 대한 용서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용서에 대하여 관대하게 받아들일 때 힘이난다는 의미) 삶이란 그렇게 나아가니까요. 부끄러움 안에서 부끄러워하고, 용서에 대해 용서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모든 것이 꽉 막혀 있는 듯이 보일 때,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은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와 당신을 분리하시지 않습니다. 설령 우리가 그분을 저 멀리 떼어 놓더라도 말입니다. 하여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비록 들리지는 않더라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했던 그 죄들이 그분과의 만남의 장소가 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그곳으로 상처받은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의 상처들을 만나러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비참한 상처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상처와 비슷하게 만들어 주시죠.

  죄의 고백과 용서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분은 자비하시기에 우리의 비참함에 대해 놀라운 일을 벌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토마스 사도와 같이 우리 모두 ‘우리의’ 하느님을 알아보는 은총을 청합시다. 그분의 용서 안에서 우리의 기쁨을 발견하고, 그분의 자비 안에서 우리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top 뒤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