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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우리는 사순 제4주일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다가가고 있는 이 시점에,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라며 선포하는
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뇌리에 울립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화해하라’며 절절한 부탁의 당부를 하시는 듯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몇 가지 포인트에 머물렀습니다.
첫째,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루카 15,11) - 하느님의 사랑
오늘 수원교구 주보 ‘복음 단상’에 최규화 신부님께서도 이 부분에서 머무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아들이 둘 있었다.’고 표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합니다. ‘둘’은 누구일까요?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곧 ‘두 아들’이란 표현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루카 15,12) - 하느님의 자비
아버지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이에게만 당신의 것을 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요구하지 않았지만 이미 당신의 사랑과 자비로 두 아들에게 당신의 것을 내어줍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 살아갑니다.
헌데,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제 뜻에 따라서 마구 탕진하기도 하죠.
반면, 때로는 큰 아들처럼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당연하고 가까워서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취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갔다.”(루카 15,20) - 우리의 의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이며, 신부님들께서 서품성구로 많이 정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갔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를 향하는 아들의 모습은 솔직한 성찰, 통회와 회개를 위하여
고해소로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기까지’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요?
‘내가 가도 될까? 나를 용서해 주실까? 나를 받아주실까? 쫓겨나면 어떻게 하지?’ 등의
두려움을 담은 질문들을 수도없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 묵상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나는 과연 하느님께 돌아서려는, 회개하려는 간절함이 있는가?’ 자문해야겠지요.
넷째,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기다림
아버지는 방탕하게 살며, 사랑을 잊고서 제 멋대로 행동했던 아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매일같이 오매불망 기다리며 아들을 바라는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발이 피투성이가 되는지도 모르는 채 아들을 향해 뛰어가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복음에 보면 어느 곳에서도 아들에게 성을 내거나 아들을 단죄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런 분이십니다.
조건없이 우리를 기다리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이끄심과 우리의 의지가 만날 때 비로소 새로운 창조, 새로운 파스카 사건이 일어납니다.
두 존재의 만남이 없다면, 하느님의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순 제4주일을 맞아 회개하는 마음으로 고해소에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고해소로 부르십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영혼을 정화하고 부활의 기쁨을 온 존재로 느낄 수 있는 우리 범계성당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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