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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나는 하느님입니다!’
이 고백은 더불어 ‘너 안에도 하느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도, 너 안에 계신 하느님도 쉽사리 망각하고 살아가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빚어 만드셨다,’는 데에서 뿌리가 있는 교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 창조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옛 생활과 새 생활’에 대한 말씀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첫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서 하느님을 등졌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쫒겨났어요.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원죄를 받아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자기중심적인 언행, 이기적인 태도, 나만 생각하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분명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빚으셨지만 욕망과 욕심으로 인해서 아담은 그 모습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아담, 두 번째 아담,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원죄의 늪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을 말하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이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이 삶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모습이 무엇일까?’
첫째,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원수를 ‘완소’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웬수’가 되는 남편이나 자식들만이 아니라
정말로 미운 원수를 ‘완전 소중한 존재’로 대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닐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둘째,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루카 6,37)
‘이 사람이 그래, 저 사람이 그래’하면서 뒷담화 하지 않고 죄를 묻지 않으며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내가 가진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으로 판단하고 욕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우리는 쉽게 판단과 단죄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판단하거나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하여라.”(루카 6,37)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며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봉헌합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할 때에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러 올 때 나와 원한을 품는 관계에 놓인 누군가가 있다면
그와 먼저 화해하고 오라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하느님의 습관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 가르침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 안에서 이것을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죠.
원수를 향한 심판과 단죄, 뒷담은 습관처럼 배어있습니다.
마음 한 켠에서는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선뜻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쉽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한다면, 용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우리 중에 누가 누군가로부터 원수가 되고 싶으며 심판과 단죄를 받고 싶겠습니까? 모두가 용서받고 사랑받고 싶어하죠.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듯이 우리도 그렇게 대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정리해보자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의 얼굴을 장착하라’고 권고하시는 듯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책감 지는 신앙생활을 하길 바라진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심판과 단죄없는 용서와 자비, 사랑을 체험하길 바라실 거에요.
우리가 자비의 얼굴을 되찾기 위해선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요청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궁극적 표지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철저한 사랑을 묵상하면서
우리 또한 자비와 사랑의 삶을 일상 안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그래서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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