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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인간적인 겸손을 표현하는 듯 하면서, 무언가 ‘사람’이라는 존재성 담긴 이름의 중요성까지도 내포하는 듯이 느껴집니다.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인간의 존엄성’이 떠오릅니다. 수없이 되뇌어도 중요하게 다가오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존엄성.’
교회 내 수많은 문헌들은 사실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고,
그 시발점은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아담)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진리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극대화를 전존재로 표현하는 하느님의 방법론이 아니겠는가 묵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안식일 논쟁’을 보여줍니다. ‘안식일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한가?’ 묻습니다.
‘누가 더 우선순위에 있느냐’ 하는 물음이지요.
물론 ‘안식일의 정신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도 중요하겠습니다.
허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은 ‘누가 창조하였는가? 왜 창조하였는가?’라는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무얼 창조하였다면 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충실했던 이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수석사제와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하는 모든 일에 딴지를 걸었습니다.
우선순위에 그들은 율법 규정이, 예수님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충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안식일을 비롯한 모든 율법 규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근거로
오늘 복음에 ‘다윗과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함께 있는 이들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누가 창조하였는가? 왜 창조하였는가?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안식일을 만든 것은 결국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규정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주먹구구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옳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중요한 존재는 사람이었기에, 당신 자신이 스스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율법 규정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누군가는 ‘교회법’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헌데, 교회법전의 말미 1752항은 전합니다.
“... 영혼들의 구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항상 최상의 법이어야 한다.”
율법도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만을 숭배하던 이들에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답이 있어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사실 예수님은 근본적인 것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중요합니다.
‘안식일이 중요하냐, 사람이 중요하냐’도 아니고,
‘안식일의 정신이 무엇이냐’도 아니며, ‘누가, 왜 창조하였는가’도 아닙니다.
정녕 중요한 것은 그 정신 안에 ‘사랑이 있느냐’하는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시겠다.’고 표현하신 것은
사람을 향한 전적인 사랑 안에서 이루어내시겠다는 결단력있는 의지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어떤 결정을 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 안에 ‘사랑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는가?’ 언제나 자문을 던지며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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