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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 3,11)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 3,14)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 3,18-20)
읽기만 해도 저절로 묵상거리가 되는 오늘의 독서 말씀입니다.
우리가 ‘처음 들었다'(1요 3,11 참조) 하는 것은
이미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랑’을 염두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어제 강론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원으로부터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태초부터 점찍어 놓으셨어요.
우리는 그때부터 ‘사랑을 받아왔고, 사랑에 대하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창조된 우리는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고, 사랑을 잊는다면 우리는 이미 생명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지니고 있는 모든 존재는 ‘사랑’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이젠 말로만 사랑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를 통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요한1서는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렇게 ‘사랑’을 알려주신 예수님께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 1,49)
질문이 생깁니다.
‘왜, 어떻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고백에 앞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 1,48)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타나엘을 사랑하기 위한 준비를 해오신 것이고
어쩌면 그전부터 나타나엘을 사랑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영원으로부터, 태초부터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어제 제가 인용했던 ‘예수와 제자’의 책에서는 ‘안드레아’가 이 체험을 하게 되죠.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직접 귀로 들을 순 없어도 우리의 믿음과 사랑 안에서 우린 그분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었어!’ 라는 하느님의 고백은
미사 전례 안에서, 공동체 생활 안에서, 심지어 들숨과 날숨 안에서 느껴지는 사랑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승님,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저의 임금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