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 20181007 나해 연중 제27주일(페미니즘?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동등하게 사랑하셨습니다.)
2018-10-06 02:47:10
박윤흡 조회수 1040

  요즘 사회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합니다.

페미니즘은 라틴어로 ‘여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femina에서 파생된 언어로,

‘여성의 인권 향상과 가부장적제도와 같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를 타파하자!’는 것이 기본 골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사회의 통합적 구성을 위해 긍정적인 운동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왜 뜬금없이 ‘페미니즘’ 얘기를 하는가 하면,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이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Q1. “사람(adam)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2-23)

‘왜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에서 나오는 존재로 성경은 묘사할까?’

 

  Q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물었다.”(마르 10,2)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왔다는 얘기인가? 아내는 남편을 버릴 수 없는가? 이 또한 불평등 아닌가?’

 

  이 두 물음을 봤을 때 가톨릭교회 또한 여성인권 향상과 남성중심사상 반대를 부르짖는 페미니즘에게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문자적으로 또 편협하게 성경을 이해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강론의 요지를 두 가지 주제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창세기Genesis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셨음을 선포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전해줍니다.

이 두 가지 요지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삶으로 초점을 맞추도록 인도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방식을 알려주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여성의 존엄’을 펴보았습니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의 ‘첫 복음’의 말씀들은 우리를 복음서의 내용으로 인도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예고된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선교 안에서 실재가 된다.

그분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실재가 여성들의 존엄과 소명을 위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본다.

이 의미는 여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태도 전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분의 태도는 지극히 단순하고, 이 때문에 당시의 관념으로 보아서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맑고 깊은 태도였다.

... 예수님께서는 ...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분명하게 밝혀 주셨다.

그분은 인간의 내면, 곧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시는’(요한 2,25)분이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과 닮은꼴로 창조된 남녀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한 증인이셨다.

... 처음부터 창조의 실재를 구성하는 이 ‘정신’(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의 원칙은

이제 여성들을 거슬러 성을 차별하는 전통에 반대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확인된다.

이 전통 안에서는 남성이 지배적이다.

... 이 ‘정신’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상기되고 천명된다.

그것은 복음과 구원의 ‘정신’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여성의 존엄, 12항)

 

  실제로 신약성경에 보면, 수많은 여성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요한 4,7-27),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루카 13,11),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마르 1,30), 하혈하던 여인(마르 5,25-34), ’야이로의 딸‘(마르 5,41),

’나인의 과부‘(루카 7,13), ’헌금을 한 가난한 과부‘(루카 21,1-4),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8,3-11) 등 수없이 많이 등장하죠.

 

  “예수님의 이 모든 가르침과 행동 안에서 우리는 당시에 만연되어 있던 여성들에 대한 차별을 조금도 엿볼 수 없다.

반대로 그분의 말씀과 활동은 언제나 여자들에게 합당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여성의 존엄, 13항)

 

  예수님의 마인드와 행동양식은 남자와 여자를 불평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여성들과도 거리낌없이 어울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남자와 여자를 불평등한 존재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성경을 통합적으로 본다는 것은, 성경 안에 담긴 ‘진리’를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파악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올바른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온전히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봤을 때, 가톨릭교회는 결코 가부장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되려,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여성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거룩한 것으로 보고 또 보존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여성이 남성을 위한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역설합니다.

 

  오늘 강론의 두 가지 요지를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하느님께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따라서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흐름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맞지 않은 것이죠.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모두에게 한결같이 대하는 예수님의 정신임을 기억하며

우리 또한 일상의 삶 안에서

그분의 정신을 닮아 살아갈 수 있는 겸손과 은총을 청하는 거룩한 한 주간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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