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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 성 테르툴리아누스
오늘 교회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억합니다.
특별히 저는 오늘 저의 주보이신 ‘성 이윤일 요한’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윤일 요한은 충청도 홍주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부터 2대째 신앙을 받아들인 모태신앙이셨어요.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성인은 문경새재 부근 여우목에 살았고 나이가 45세였다고 합니다.
큰 키에 긴 수염은 위엄있는 어른의 모습을 풍겼고 공소 회장직을 성실히 수행하셨으며
신심이 깊고 솔직담백한 매력 때문에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성인이셨죠.
1866년 11월 18일, 문경 관아에서 여우목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가 들어갔습니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성인은 태연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하는 포졸들의 물음에
‘바로 나요.’하며 성인은 점잖은 대답을 하십니다.
그렇게 문경으로 끌려 갔다가 상주로 압송됩니다.
추운 겨울에 돼지우리만도 못한 구덩이에서 석달을 지내셨는데 불평하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으며 함께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상주 목사는 대원군의 윤허와 함께 군중에게 교훈이 될 수 있도록 천주학쟁이들을 말살하라는 특명을 받고
성인을 대구로 압송합니다. 성인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쁨에 찬 나머지 자녀들에게 이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1867년 1월 21일, 이윤일 요한 성인은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먹고 대구 관덕정으로 끌려 나갑니다.
목에는 무거운 칼이 두 개나 채워졌고 발에는 차꼬를 끼워 찬 상태였습니다.
집행관이 나와서 선고문을 낭독하는 순간, 주머니에 있던 돈주머니를 꺼내 희광이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하늘나라로 가네.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 주게나.”
성인은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꿇어 앉아 희광이의 칼에 참수형을 받고 하늘나라로 오르셨습니다.
현재 대구대교구는 성 이윤일 요한을 교구의 제2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으며,
매년 1월 21일에 관덕정 성지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원교구 전 본당에서는 미사 전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제일 앞 페이지를 보시면 교구장 주교님께서 시복시성 추진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계시는데
마지막 문단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억의 지킴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그래서 저는 교황님의 방한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펴보았습니다. "‘기억의 지킴이’라는 표현이 무엇인가?"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연설 중 - ‘기억의 지킴이’>
기억 1. 평신도의 자발적인 신앙 수용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03위 성인을 시성하셨습니다.
더불어 이번에 이루어질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들의 시복은 순교자들이 뿌린 씨앗으로
이 땅에서 은총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후손이고, 그리스도 신앙을 영웅적으로 증언한 그 증거의 상속자들입니다.
... 그들은 평신도였고, 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 시작되었다는 것은 뜻이 깊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아름다움과 진실성이 있어서, 복음과 복음의 요구,
곧 회개, 내적 쇄신, 사랑의 삶에 대한 요구가 이벽과 첫 세대의 양반 원로들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메시지에, 그 순수함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기억 2. 순교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 나 자신을 통해 재현되어야 할 사건
“...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고이 간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이란, 성장시켜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1코린 3,6 참조) 깨닫고,
동시에 성장은 과거처럼 현재에도 고난을 이겨 내며 끊임없이 일하는 그러한 노고의 열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순교자들과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억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성화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과거만 바라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길을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진전을 가로막거나 실제로 멈추게 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교황님께서는 방한하시어,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위상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정리해보자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입니다.
반세기가 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하느님 백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가톨릭 교회는
성직자와 수도자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더불어 오늘날 우리는 평신도 희년을 보내고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평신도로부터 시작한 전 세계 유일한 교회임을 기억할 때,
한국 교회의 본질을 찾으라는 것은 평신도의 신앙 고취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 ‘애덕의 중요성’입니다. 애덕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애덕 그 자체죠.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질 때에 당신을 따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애덕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평신도 소명과 애덕에 대한 중요성을 우리가 인지하는 것입니다.
‘아! 200년 전에 순교자가 있었지!’ ,‘한국에 103위 순교 성인이 있대!’, ‘124위 복자가 있대!’라는 외침은
이제 우리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을 증거하는 순교자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유혹입니다.
어쩌면 유혹처럼 다가오지도 않는 것은 이미 세속화의 도정 위에 우리가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 테르툴리아누스의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순교성인복자께 우리들을 위한 전구를 청하고
우리 또한 그분들의 삶을 닮아 살 수 있는 겸손된 마음을 청하는 오늘 거룩한 대축일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의 124위 순교 복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