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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한 여정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희망한다. 죽음이 삶의 종지부가 아닌, 새로운 삶 곧 부활로 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통해 부활을 희망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 복음에는 ‘야이로의 딸’이 등장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애처롭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
모든 방도를 다 써봤지만 되지 않는 그 상황 속에서 아비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바로 이 상황 속에서 ‘비보’가 찾아옵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마르 5,35)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에 굴하지 않으시고 마치 약속하시는 듯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믿기만 하라니 무슨 말인가? 믿으면 다 살려낼 수 있다는 말인가?’
복음 사가는 이렇게 전하죠.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마르 5,40)
그런 비웃음을 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온 정성을 담아서.. 죽은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십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마르 5,42)
문득..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태 22,32; 마르 12,27; 루카 20,38)
장례미사의 감사송에는 이런 기도문이 등장합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한 마디로,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멸하지 아니하는.. 영원히 사는 것.
오늘 1독서 지혜서의 말씀은 이 ‘불멸’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 1,13; 2,23)
말씀인 즉, 하느님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 또한 불멸의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불멸이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입니다.
이제 우리의 몫에 대한 물음이 수면위로 떠오릅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 신앙의 핵심임을 알았고,
예수님을 통해 육신의 부활을 꿈꾸는데 그것이 과연 나와 무슨 상관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무엇인가?’
2독서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한 단어로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균형”(2코린 8,13).
‘삶과 죽음의 균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9절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는 이 선포는
예수님 친히 삶과 죽음의 균형을 몸소 보여주셨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부유함, 삶에 대한 가난함.
바로 이 절충과 균형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영원한 삶,
곧 부활로 나아갈 수 있었던 핵심임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한 여정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희망한다. 죽음이 삶의 종지부가 아닌, 새로운 삶 곧 부활로 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통해 부활을 희망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불멸에 대한 희망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염원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청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주간 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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