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나눔게시판 > 복음의 기쁨
오늘 예수님과 율법학자들, 수석사제들, 원로들은 ‘권한 논쟁’을 벌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
‘권한’하니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재판 대목에서 빌라도가 묻는 장면이죠.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요한 19,10)
‘권한’이라는 것은 이만큼 엄청난 ‘자기 행사’를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그 논쟁을 펼치고 있는 것이에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들(율법학자, 수석사제, 원로들)의 속마음을 묵상합니다.
이미 그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어요.
그들은 젊은 나자렛 청년이 나타나 자신들의 권한에 월권행사를 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뗴거지로 몰려와 예수님께 따지듯 말하는 것이죠. ‘무슨 권한으로 그런 것이오?’
예수님과 그들의 마음엔 권한의 주체가 다른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물음 곧,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마르 11,30)
이 물음 앞에서 그들의 태도가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내심 충돌이 일어나고 있어요.
“‘하늘에서 왔다’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하고 말할 터이니, ‘사람에게서 왔다’할까?”(마르 11,31-32)
권한의 주체는 이제 드러납니다.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1,32-33)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과 그들의 주체가 다름이 나타나죠.
그들이 두려워했던 존재는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군중으로부터 마음을 잃을까봐 그것이 두려워 쭈뼛쭈뼛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가두려고 했었던 근본적인 원의 또한 바로 이 마음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한 주체는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당신의 삶을 수용하심으로써 오직 모든 것을 내어 맡기셨기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지요.
비단 이 이야기는 당시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나는 내 삶의 중심에 누구를 모시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과 나 자신인가?
‘예수님이라면...’ 이라는 이 방법론을 일상의 삶 안에서 체화해서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제2의 그리스도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요 사도로 부르심받은 그 삶에 응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댓글 3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