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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토록 많이도 들어왔던 이야기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저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래서 성경을 펼쳐 보았습니다. ‘자 이제 때가 왔다!’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죠. 성경은 발씻김 예식을 앞두고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그리고 발을 씻으십니다.
이후,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려고 그 집을 떠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에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 말씀이 있은 후에 당신 자신을 위해서, 제자들을 위해서,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잡하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예수님은 간절하게 부르짖으시죠.
‘저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이 사람들에게, 또 저 자신이 이 사람들에게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사랑’은 무엇일까?
분명 무언가 예수님만이 갖고 계셨던 사랑에 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신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어서 저는 책 한 권을 펴보았습니다.
‘예수철학’(피터 크리프트 지음, 류의근 옮김, 서광사, 2010)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의 ‘사랑의 형이상학’이란 챕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소유해야 하는 유일한 자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 그리스도가 사랑뿐 아니라 사랑의 형이상학, 다시 말해서 사랑이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사실,
사랑이 절대 최종적으로 결국은 ‘사랑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계시함으로써
형이상학에 혁명을 가져왔다.”(예수철학, p.35,37)
이해가 안되어서 10번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신 이 말씀을 조금 변형시켜서
“내가 너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를 (위해) 존재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하셔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비단 제자들에게만 그럴까요?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도 그렇게 계신다는 거에요.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닮기 위해서 우리 또한 내 이웃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나와 함께 누군가가 있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줍니까?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고 우리 또한 그런 사랑을 살아가라고 부르시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또 말씀하시죠.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세웠다.”(요한 15,16)
주님께서는요, 우리가.. 당신을 닮은 사랑의 도구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묵상해 봅니다.
그 자리에 존재함으로써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겸손과 사랑의 은총을 청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가 그분을 찾을 땐 이미 그분께서 우리 곁에 계셔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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