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신앙생활)

궁금해요? (신앙생활) 정하상 바오로 성인
2017-06-22 09: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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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丁夏祥) 바오로(1795~1839)에 대하여

동정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바오로, 본관 나주 당색은 남인 신유박해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기해박해 순교자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의 아들이다. 또한 순교자 정철상 가롤로 아우이자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의 오빠, 어려서부터 성가정의 신앙을 이어받아 누구보다 열심히 천주교를 실천하는데 노력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오랫동안 침체되어 온 교회를 재건하는 데 헌신하였다. 1816년부터 북경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고,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며 1833년 이래 여러 명의 성직자를 조선에 영입한 뒤 지도자요 복사로서 그들을 도와 활동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출생과 가문의 신앙]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의 분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본래 그의 부친 정약종은 경기도 광주 땅 마재에 있는 정씨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786년 무렵 중형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당시 그 형제들 중에서는 정약전만이 아니라 넷째인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였다. 또 정약종은 이 무렵 같은 남인인 이수정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정철상을 두었으나 얼마 뒤 부인과 사별하였고, 이후로는 홀아비의 정을 지키면서 살아가려 하였으나 가족들의 만류로 유조이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가 곧 정하상의 모친이다.

[성직자 영입 운동과 조선교구 설정] 정하상은 언제부터인가 마재를 떠나 교우들의 집으로 피해 다니면서 생활하였다. 집안에서의 박해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우들이 모두 가난하였으므로 그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하상이 처음 북경으로 떠난 것은 그의 나이 만21세 때인 1816년 겨울이었다. 당시 그가 북경 천주당을 찾았을 때 그곳에 있던 선교사들은 용감하고 젊은 조선의 밀사를 보고 다시 한 번 조선 교우들의 열성에 놀랐다. 당시 조선 안에서 정하상을 도와주던 신자들 중에는 동정 부부로 유명한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가 있었다. 그들은 정하상을 자신의 집에 거처하도록 하였고, 북경에 가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하였다. 1819년 이들이 순교하자 이경언 바오로, 현석문 가롤로 등이 그를 도왔다. 1824년, 나이 29세 때 정하상은 북경 왕래에 훌륭한 동행자를 만나게 되는데 역관 출신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였다. 이때 정하상은 유진길과 함께 북교 선교사들을 만나고 귀국한 뒤 교황에게 올리는 서한을 작성하였으니 이는 조선 교우들이 18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이다. 정하상과 유진길이 조선 교우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은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후,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로 선출된 직후인 1831년 9월 9일, 마침내 조선 포교지가 조선교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다.

[성직자 영입과 순교] 1834년 유진길과 조신철은 국경에서 유파치피코 신부를 맞이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으로 인도하였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20일 만주 땅 마가자에서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1836년 1월 12일 봉황성 책문에서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 이광렬 등을 만나 이튿날 밤 조선에 입국했다. 이에 앞서 정하상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서 받은 비용으로 서울 후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모친과 여동생을 비롯하여 남이관부부, 권진이와 다른 과부 신자들을 그곳에서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다. 정하상과 동료 밀사들은 1836년 12월 3일에 조선 신학생 최양업 토마스,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12월 28일에는 책문을 떠나 샤스탕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인도하였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를 모셔 와 후동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이후 정하상은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순방하거나 신자들을 돌보는 데 힘을 쏟았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정하상은 1839년 7월 11일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후동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세 명의 선교사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다음 날인 1839년 9얼 22일 유진길과 함께 의금부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만 44세였다.

[천주신앙과 상재상서]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다양한 육화론적 영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나눔과 청빈의 삶을 지향하였고 열심히 대재를 지키는 등 고신극기에도 힘썼다. 그의 신심은 애주애인의 신앙으로 승화되었으며, 평생 정결의 덕을 지키면서 살도록 이끌어 주었고,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뛰어드는 용덕을 지닐 수 있게 해 주었다. <상재상서>는 비록 3,644자로 이루어진 짧은 내용이지만 정하상이 지니고 있던 천주 신앙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이를 통해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확고하게 믿으면서 조선의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정하상의 천주 신앙과 육화론적 영성은 종말론적 영성인 순교의 용덕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성사 생활과 영신 구원 생활에 철저하였다. 그는 정결 순명 청빈을 바탕으로 복음 삼덕은 물로 신 망 애의 실천을 통한 완덕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내세 구원을 믿으며 순교를 지향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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