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신앙생활)

궁금해요? (신앙생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본당주보성인)
2017-06-22 09:49:15
범계성당 조회수 463

김대건(金大建) 신부(1821~1846)에 대하여

최초의 한국인 신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再福), 보명은 지식(芝植), 관명은 대건(大建), 본관은 김해

 

[김대건 신부 연표]

1821. 8. 21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남

1836. 4

경기도 용인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

1836. 7.11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서 합류

1836. 12. 3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로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1837. 6 7

중국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수학

1838. 11. 27

동료 신학생 최방제 열병으로 사망

1843. 4.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 계속함

1845. 8. 17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

1845. 8. 24

상해에서 30리 되는 황당 성당에서 첫 미사

1845. 8. 31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상해 출발

1845. 9. 28

제주도 표착, 10월 12일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1846. 4. 13

은이 공소에서 미사 후 서울로 출발

1846. 5.14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마포출발

1846. 6. 5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탁송, 6월 1일 순위도 등산진으로 귀환 6월 5일 거기서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압송

1846. 6. 22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된 후 46차례에 걸쳐 문초

1846. 9. 15

반역죄로 사형 선고 받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857. 9. 23

가경자로 선포됨

1949. 11. 15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 로마 교황청에서 7월 5일 김대건 신부 축일 정함

1984. 5. 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됨

[김대건 신부의 가문]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에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 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그의 아버지 제준은 1836년 초,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영세를 받았으며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사상] 하느님을 ‘임자’라고 표현하였다. 인류를 대가족으로 표현하였듯이 하느님을 대가족의 가장인 임자로 여겼다. 그는 가정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지상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였다. 아버지는 자녀의 소유주이고 생사여탈권을 가진 임자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존경과 위엄의 대상일 뿐 마니라 복종과 사랑의 대상이었고, 사람으로서 이러한 임자를 잊고 몰라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 하였다.

김대건의 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박해 시대 신자들의 영성과 동일하였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유교적인 효의 개념에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이 혼합되었다.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창조주, 상선벌악을 결정하는 심판관, 모든 권위의 절대자, 온갖 환난에서 보호해 주고 힘을 주는 분, 은총으로 섭리하는 분이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하느님의 자녀 된 증거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간곡히 유언하였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천당과 지옥, 그리고 사후 심판이었다. 이 세상은 인간이 항구히 거처할 곳이 아니고 사람은 잠깐 땅 위를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현세를 나그네의 여인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영복을 누릴 천당이고, 현세는 천당을 준비하는 곳이지만 현세의 선행에 따라 사후 천당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생전의 선행에 따라 사후 천당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생전의 선행은 사후의 노자라고 말했다. 현세와 내세, 천당과 지옥은 긴장과 대립의 관계였다. 김대건은 현세를 천국을 얻기 위한 영혼의 전투장, 사형 집행장을 영혼이 대적해야 할 최후의 전장으로 보았다. 그래서 천국을 얻으려면 마음을 허실하게 먹지 말고 주야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혼의 삼구(세속, 육신, 마귀)와 투쟁하여 박해를 극복하라고 하였다. 그는 박해를 영혼의 위기로 보았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서 신자들을 전투장의 군사로 표현하였다. 그는 신자 공동체를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무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있는 전투적 공동체 즉 신전지교회로 파악하였다. 김대건은 한국 천주교회 설립 후 한국 교회의 희원을 이룬 첫 한국인 사제였다.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당시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 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 조류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선각자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사람답게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했고, 하느님과 교회, 교회의 장상들과 동료들, 그리고 신자들을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였다. 그는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다가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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