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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선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 선교에 대한 의식의 변화 촉구
2019-09-04 10:00:47
박윤흡 (missa00) 조회수 824

“선교에 대한 의식의 변화 촉구”

 

 

박윤흡 윤일요한 신부

 

 

“선교하지 않는 교회 쓸모없는 교회다.”(자끄 가이오 주교, France)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만민에게 Ad Gentes Divinitus,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2항, 516)

 

들어가는 말

 

  21세기에 접어들며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며 우리는 그 정보들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해간다. ‘이것이 나에게 필요한 정보일까?(인식적 차원에서 필요 유무를 식별) 저 사람은 나에게 왜 이럴까?(정보를 통한 판단) 저 제품은 내게 유용할까?(제품에 대한 인식을 통한 판단)’ 이처럼 우리는 일상 속 정보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은 결정 짓는다. ‘이건 별로 좋지 않으니 전하지 않아야겠다’라든지, ‘이것은 좋은 것이니 꼭 전해야 되겠다’라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정보를 접함은 정보와의 ‘만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A라는 사람과 만남을 갖듯이 A라는 정보와도 만남을 갖는 것이다. 사람이든 정보든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누군가가 ‘나’라는 인격과 만나고 나는 그에 대한 인식과 판단, 결정을 내린다. 여기에서 이 ‘만남’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나의 만남’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신앙생활에서 기초가 되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했다. 만약 나와 하느님과의 만남이 기쁘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느님은 정말 좋은 분이니 내가 꼭 전해야 되겠다!” 우리는 선교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인식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봉사도 짐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따금씩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한다.

 

‘성당은 강요하지 않아요!’

‘때가 되면 오세요!’

‘아직은 돈을 벌어야 하고, 아직은 공부를 해야 하고.. 하느님은 좀 나중에요.’

 

  하지만 이러한 인식들은 질료이기보다는 형상에 불과하다.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사제의 인사를 우리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교회의 본질은 바로 “복음화”(이 세상을 복음의 물감으로 물들이기)다. 진짜 문제는 바로 아래와 같은 질문들이다.

 

 

 

a. 나에게 하느님은 누구인가?

b. 나는 그분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c. 내가 만난 하느님을 나는 누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전해야 할까?

d. 나는 평소 신앙 진리의 핵심인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하여 과연 묵상하는가?

e.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는가?

 

  우리가 이 질문들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하고 묵상한다면 우리는 선교할 수 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신앙인, 그리스도의 사도로 거듭날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살펴볼 것이다. 선교에 대한 의식을 중심으로 참 전통과 거짓 전통의 오해를 풀고, 왜 선교를 해야 하는지, 선교를 목전에 둔 일반적인 두려움은 무엇인지, 선교의 대상은 누구인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선교에 대한 인식과 의식의 변화 촉구’를 희망한다.

 

 

본 론

 

  1. 전통에 대한 오해

 

  ‘천주교는 강요하지 않아요!’라는 말이 전통적 불문율처럼 우리들 사이에서 인식되고 있다. ‘그렇게 해왔으니까.’라는 일념 하나로 마치 그것이 진정한 전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 안에 뿌리박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 정신 안에서 ‘전통’의 본질적 개념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전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유보되어 있다. 그분이 추구했던 삶의 방향성과 마인드가 우리에게 참 전통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전통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있다. 우리는 전통을 잘못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2. 선교는 왜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파하도록 하느님께서 말씀의 문을 열어 주시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모든 사람에게 담대하게 끊임없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선포하고 또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파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여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만민에게Ad Gentes Divinitus,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13항, 535)

 

  ‘선교를 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아니, 의무라기보다는 은총이 적합한 표현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왜 선교를 하지 않는가?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긴다면 왜 이 좋은 것을 혼자만 독차지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정말 하느님을 좋은 분이라, 신앙생활을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가?’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 ‘맛집 탐방’이 유행하고 있다. 동네 음식점도 아니고 거리가 먼 곳도 거리낌없이 ‘맛집’이라고 하면 찾아간다. 이 성전이야말로 우리들의 영적인 맛집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양식을 맛있게 먹고 있다면 우리는 선교할 수 밖에 없다. “왜? 맛집이니까!”

 

 

3. 선교에 마주한 우리들의 두려움

 

  하지만 우리는 선교에 앞서 큰 두려움에 봉착하곤 한다. 가두선교 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성당에서 이렇게 선교를 하니까 신기하네요.’ ‘이런 건 교회에서만 하는 줄 알았는데..’ ‘성당에서 이런 걸 하니까 별로 보기가 좋지는 않아요.’

  어쩌다 보니, 2,000년 역사를 가진 가톨릭교회가 500년 된 개신교회의 선교 방법론에 자신의 존재를 잠식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선교 방법론이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행동에 앞서 두려움과 마주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3.1. “익숙하지 않아요.” - 어색함

 

  우리는 선교에 익숙하지 않아 선교하기를 두려워한다. 허나 선교가 우리의 본질적 사명임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선교를 열망하면서 익숙해지려고 해야만 한다.

 

3.2.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아요.”

 

  10명에게 선교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통계적으로 비율은 3:4:3이다. 3명은 부정적이고 4명은 무관심, 3명은 호의적이다. 헌데 우리는 앞선 7명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선교는 부담을 주는 일’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에 당신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면서도 ‘따르는 자들’과 ‘따르지 않는 자들’을 구분하여 보셨다. 하느님의 깃발 아래 서는 사람들과 세상의 깃발 아래 서는 사람들이 둘로 나뉘어 분열될 수 없는 현실을 알고 계셨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의식해야 한다.

  예수님 또한 선교를 하며 부딪히는 현실적 어려움과 고뇌가 많았으리라.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당부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4. 선교의 대상은 누구인가?

 

  ‘선교의 주체는 누구이며, 누구를 목적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선교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렇기에 선교의 목적에는 순서가 있다. 우선 자기 선교가 이루어져야 하며 본당 내 이웃들에게 복음적인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나아가서 복음으로 점철된 우리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복음화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

 

내적 복음화 -> 외적 복음화

 

4.1. 자기 선교(내적 복음화)

 

  한국 가톨릭교회의 토착화(시대와 문화, 상황에 맞갖게 복음을 뿌리내리는 작업) 신학자 심상태 몬시뇰은 ‘선교’와 ‘복음화’를 말하며, ‘자기 복음화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우선적으로 내가 ‘복음화’되어야만 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성당에 나가자!’ ‘성당에 가볼래요?’ 했을 때, 우리는 질문을 받는다. ‘뭐가 좋아? 성당에 왜 다녀야 돼?’ 그런데 막상 그런 질문들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쉽사리 대답하기 어렵다. 그런 만남을 갖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허탈함을 느낀 적이 있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모든 선교에 앞서 ‘자기 선교’를 전제로 해야 하기에 몇 가지 선행되어야 할 질문들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세상적인 복음, 이를테면 돈, 명예, 소유 등을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큰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는가?’

 

4.2. 본당 공동체 내 이웃 선교(외적 복음화)

 

  자기 복음화를 이룬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본당 공동체’다. 자기 기량이 뛰어난 운동선수들이 “한마음 한 뜻”(사도 4,32)으로 모인 하나의 팀이 바로 우리 본당 공동체라는 의미다.

  어떤 공동체든지 하나의 정신과 목적을 가지고 모이게 마련이다. 우리는 신앙을 갖고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고백하며 ‘하느님을 중심에 둔’ 사람들이다. 우리 공동체의 모든 정신과 목적은 ‘하느님’께 유보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쉽게 이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타성에 젖거나 과거의 방식을 계속적으로 취하려고 하거나 ‘이 정도면 괜찮아.’라며 안일한 생각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냉담교우 한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경각심을 준다.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묶여서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아? 성당에 참된 신앙을 갖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난 성당에 안 나가. 그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져서 새로운 사람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거든.”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당부하시는 말씀은 좋은 묵상거리가 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해 나가십시오.”(필리 1,27) ‘내 안에, 우리 안에 진정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선교할 수 있겠는가?’

 

4.3. 본당 공동체 외 이웃 선교

 

  우리는 쉽게 본당 공동체 외 이웃 선교만을 ‘선교’라며 선교 개념에 대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자기 복음화(자기 선교)’와 ‘공동체 복음화’(공동체 내 선교)가 우선시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건물 밖 외부 선교가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열 두 사도 중 한 사람으로 불리움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최측근으로 부르신 이유는 결국 ‘복음을 전할 프로선수 양성’에 그 목적이 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해 앞서 논했기에 이 단락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화두로 던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전할 것인가?’ 이 ‘방법론’에 대한 고민은 우리 모두(전 신자)가 함께 숙고해야 할 문제다.

 

 

나가는 말

 

  ‘도대체 왜 선교를 해야 할까?’ 이 글은 선교의 방법론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에 대한 우리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쓰인 글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인식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은 아닌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선교합시다!’ 했을 때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는 건 왜일까? 이웃에게 선교를 하기 이전에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선교조차도, 우리 공동체의 복음화조차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하느님께 드릴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사랑 고백이며 신앙의 증거다. 나를 사랑해주고 또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우리는 주변 이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하지 않는가?

 

  과연 우리는 개신교회의 선교 방법론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우리 가톨릭교회만의 선교 방법론의 새로운 국면을 고민해보기라도 했을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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