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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독후감>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고.
2018-02-05 12:54:38
박윤흡 (missa00) 조회수 1209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산문집-

 

 

박윤흡 윤일요한

 

 

서 론

 

  이 글은 권정생 선생님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고 작성한 독후감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대화하며 맺은 결실의 열매를 개진적인 방식으로 밝혀내고자 한다.

 

  필자는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사상에 뿌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권정생의 삶과 사상을 우선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후, 앞서 살펴본 과정들을 배경으로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보고자 한다.

선생님의 주옥같은 말씀들을 경청하며 내 삶을 돌아보는 과정이므로,

권정생과 함께 걷는 대화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나아갈 삶의 방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권정생 선생님과의 만남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이는 전 단계에서 모색한 성찰적 차원을 넘어서는 능동적 방법 모색이다.

이 대목에서는,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을 염두에 둘 것이다.

 

 

권정생, 그는 누구인가?

 

  1937년 9월, 권정생은 일본 도쿄 혼마치의 헌옷장수집 뒷방에서 탄생했다.

그는 초가난적인 삶의 자리에서 외로움과 통고의 시간을 보냈다.

열아홉살 때, 결핵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이로써 잇따라 목숨을 잃어가는 친구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으며, 그 또한 죽음의 골짜기에 다다른 것이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순간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남은 반세기 삶을 병고와 동무하며

5평 남짓 흙집에서 쥐를 벗삼아 살았던 권정생.

오늘날 대중에게 많이 읽혀왔고, 꾸준히 읽히고 있는

‘강이지똥’과 ‘몽실언니’는 그가 살아온 삶의 애환에 대한 성찰이 여실히 배어있다.

 

  ‘비인간성’이 대두되던 시대적 사조에 따라,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 상실의 도마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권정생에게

‘인간’人間이란 주제는 그의 삶에서 가장 큰 화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녔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이기주의적 상대주의가 판을 치고,

본성에 따른 자기중심성은 오직 ‘나’에 몰두하여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왜곡된 인간상을 건설하였다.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의 의지적 노력이 초래한 결과이며,

인간은 인간에 의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현실이 바로 여기에서 목도(目睹)된다.

 

  권정생은 이러한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에게 인간은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돈과 명예, 권력의 노예가 되어 버린 오늘날 인간의 모습은 그의 가슴을 찢어내리는 아픔이었다.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의 부패와 착취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었으나,

현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녹색의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썩은 폐수와도 같은 흑색 언행이 세상을 뒤흔들고, 그의 영혼에 비수를 꽂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 소나무와 같았다. 왜 포기할 수 없었는가?

 

  역설적으로 권정생의 인간비판은 인간을 향한 숭고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혹자는 ‘한 줌 사랑이 없을 때 무관심이 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간 인간은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걸어가면서도 어느샌가 그 고통마저 무뎌진 것인데,

이로부터 탈선하여 정도(正道)를 제시하고

‘참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제시하려 했던 것이 권정생의 평생 과업이 아니었을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그렇듯이, 인간을 향한 권정생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해 본다.

 

  그만큼 권정생은 인간을 사랑했고, 인간을 위해 살았으며, ‘참 인간’으로 살았다.

그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닌 오직 “우리들의 하느님” 때문이었다.

그의 삶이 가톨릭 교리의 핵심인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말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각 위격을 지니고 계시면서 동시에 서로를 서로에게 내어주신다.

하느님 친히 사랑의 선물성을 당신 존재로 보여주시며

세 위격이신 하느님은 결코 갈라지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 계신다.

하느님은 이토록 서로에게 내어주는 자기비허적(Kenosis) 사랑의 모범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당신을 계시(啓示)하신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전능은 ‘사랑의 전능하심’으로 표현된다.

하느님은 ‘사랑이 존재 이유’라는 진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하느님은 ‘너’의 하느님도, ‘나’의 하느님도 아니다.

하느님이 ‘우리들의 하느님’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권정생은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했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닮아 있는 인간은 서로를 서로에게 내어주는 헌신적인 존재이며,

자기 존재가 사랑으로 났기 때문에 사랑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적 인간의 자발적 권위가 하느님을 부재시키고, 사랑을 소멸시킨 것이다!

배금주의拜金主義, 황금을 숭배하고, 황금을 가진 자신을 숭배하며,

황금이 없는 이웃을 멸시하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하느님은 부재할 수 밖에 없다.

하느님 당신 스스로 인간으로부터 떠나신 것이 아니라,

눈이 먼 인간이 하느님을 자신의 내면과 삶의 자리에서 없애버린 것이다.

그래도 불완전한 한계적 존재로 지어진 인간은

자신의 처지가 급박해 졌을 때 하느님을 부르짖는데

그렇게 하느님은 결국 자기 삶의 안위와 만족을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

하느님을 자신의 필요충분에 따른 연장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권정생 선생님과 만남의 순간에 이뤄진 ‘나 자신’의 성찰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사상은, ‘인간중심적’이다.

이 인간중심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막대한 펠라기우스적 차원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중심이다.

하느님을 닮아있기에 하느님처럼 살아가는 인간상을 선생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삶과 사상은

한 마디로 ‘하느님과 인간의 유기적 상관성’을 온전히 드러낸 것이라 필자는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러한 권정생 선생님의 통찰이 나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게 했는가? 내게 무엇을 던지는가?

 

  학부 4학년 시절, 한 동기가 신학교를 떠났다.

그 이유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 중 한 명이었기에

그 친구의 떠남은 내게 아쉬움과 아픔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내게 남겨준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향한 다음의 물음이다. ‘나는 과연 믿음이 있는가?’

 

  이 물음은 자연스레 내가 지향하는 사제직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왜 신부가 되려고 하는가?’

신부로 살아가는 것이 세속적인 부담과 가난없이 살아가는 것이기에,

신부가 되려고 한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나를 지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신학생’이라는 타이틀이 내가 ‘하느님 때문에’ 사제직으로 나아가려 한다며 거짓을 말하도록 이끌었고,

지극히 의식적인 면이 이런 나를 숨기도록 했던 것이다.

‘하느님 때문에 사제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신부가 되려고 했다’는 자기 반성적 고백을 외칠 수밖에 없다. ‘나’를 잃어버린 ‘신학생’만 내세우던 나였다.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자기중심적 모습이 내안에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에 대한 고민이 내 삶의 화두로 자리 잡았었다.

이러한 고민의 연속선상은 학부, 석사 논문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학부 시절엔 ‘직무사제직에 대한 고찰-토마스 머튼의 자아 이해를 중심으로-’을 썼으며,

석사 때는 '토마스 머튼의 신앙 이해 연구'를 썼다.

현대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도움을 통해 나의 문제와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할 수 있었다.

인간중심적(Prometheus)인 세계관이 잠재된 나의 둔탁한 내면과 마주하며,

고통과 번민 속에서 보내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머튼 또한 하느님과 인간의 절대적 상관성을 설파하기에

이번 기회에 접하게 된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사상이 내게는 더욱 마음 깊이 와 닿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형상으로 살지 못하고 거짓자아를 마치 나의 참된 모습이라 주장하며

겉치레에 집착해 온 지난날의 나의 모습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교리로 배워온 ‘하느님의 모상’이 삶과 괴리된 채 탁상공론으로 치부된다면,

나의 자유의지로 참 인간으로 살아가라 창조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내가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통념이 진리인 양 목에 힘주는 이리떼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권정생 선생님과의 대화를 갈무리하며 ‘나 자신’이 나아갈 삶의 방향성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이는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며 이 분은 바로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완전한 사랑이다.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부활하셨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자기비허적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사상은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만물을 모두 벗삼아 함께 지낼 수 있었고,

사랑이 아닌 것을 비판할 수 있었으며,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사랑의 구체적 속성은 분리가 아닌 ‘통합’이요, 개인이 아닌 ‘연대’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면, 인간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였고,

인간과 인간은 서로가 하나였으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은 모두가 하나였다.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이미 하나였다는 그 원초적 진리다.

 

  짧지만 오랜 시간 달려온 선생님과의 대화를 갈무리하며,

나는 어제 어떤 방향성으로 삶을 모색해 나가야 하는가?

 

  항주삼덕(嚮主三德)적 사랑을 살아야 한다.

신덕과 망덕 그리고 애덕. 우선, 만물을 창조하시고

친히 그 자리에 기거하시며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서의 사랑이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쉼 없이 희망할 수 있다.

하느님을 갈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희망 속에 살아가는 것이며,

그 희망으로부터 구원이 이루어(로마 8,24참조)진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실천적 애덕의 사랑으로 나아간다.

나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예레 31,3참조)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사랑을 모르는 인간은 사랑을 알게 되고 또 그 사랑으로부터 희망할 수 있으며,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적 애덕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 향주삼덕적 사랑은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 이웃 중심의 삶에서 출발하고 완성된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된 삶이다. 어떻게 하느님께 의탁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신앙인이 되자!’ 이는 내 존재의 본질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느꼈던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매순간 하느님을 의식하는 존재로의 변모다.

긍정적 체험을 통해서도, 부정적 체험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내 삶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일상의 모든 순간들, 사소하게 치부될 그 순간들까지도

내 기억과 의지, 이성과 감성을 통해 끊임없이 사랑으로 날 당신께 초대하시는 하느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

매일 주님의 말씀을 의식하며 하느님의 현존에 머무르고,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도구로 겸손되이 살아가는 것.

예수님의 삶이 온전히 아버지께 의탁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닮는 것이요, 그 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곧 ‘관상contemplatio적 삶’이며, 하느님의 은총아래 ‘참 인간’으로 거듭나는 정도(正道)다.

내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음은 오직 태초에 날 인간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께만 모든 것이 유보되어 있다.

‘우리들의 하느님’께 말이다!

그렇다면, 보다 더 구체적으로 필자가 지향하는 직무 사제직의 방향성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가시적 표지다.

따라서 직무 사제직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종속된다(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이와 같다).

예수님의 삶은 소박했지만 동시에 웅장했다.

당신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어 겸손되이 사셨기에 소박했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실현했기 때문에 웅장했다.

예수님의 삶의 핵심은 오직 사랑의 전능이신 하느님께 종속된 사랑의 실현이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신 그 이유는 바로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기 위한 자기비허적 사랑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사제는 바로 이런 존재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다.

그래서 사제직이 봉사직이고 서비스업이다.

직무 사제직을 지향하는 나. 하느님은 보잘 것 없고 미천한 죄인인 나를 뽑으셨다.

내가 하느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그 사랑으로 나를 뽑으셨다.

하느님은 그저 내가 사랑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신다.

오직 그것 하나 뿐이다.

내 삶을 이끌어주시고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당신 존재를 바쳐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난 응답만 할 뿐이고,

응답할 수 밖에 없다.

 

 

결 론

 

  권정생 선생님과의 만남은 결국 신앙에서 시작해서 신앙으로 마쳤다.

왜냐하면, 선생님도, 나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쉼 없이 하느님을 갈망해왔고

또 지금 이 순간도 그렇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침묵중에 내 삶에 현존하신다.

내가 홀로 있을 때에도, 내가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 어느 때일지라도 내가 고독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 그 때,

아니, 나의 의식적 차원이 눈 감겨버릴지라도 하느님은 끊임없이 나와의 만남을 바라신다.

 

  인간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웃과도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진정 인간다운 삶은 오직 하느님께 의탁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이미 주어진 사랑에 감사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共生)을 추구하는 데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선생님의 삶이 마치 예수님의 삶을 많이 닮아있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삶의 터전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 신학서적이며, 동시에 영성서적이다.

선생님께서 고민과 번민 속에서 투쟁하시고 살아내셨던 ‘참 인간다운 삶’은

내가 평생을 걸고 따르려는 예수님의 삶이다.

따라서 참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는 세상 한 복판에 공명(共鳴)이 될 것이다.

 

 

“주님, 저는 제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존재를 제게 내어주신 그 사랑에

저를 오롯이 봉헌하는 것이 당신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Thomas Me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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