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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제목 | 이름 | 조회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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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축복 속의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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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53 | |||
50세가 되면, 공자가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서 말한 ‘지천명’(知天命), 곧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사제품 25년이 넘으면 당연히 하느님의 영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이 50세를 넘기고, 서품 은경축을 지내도 당연히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지천명은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의 단계들을 잘 밟아간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경지이지요. 또한 하느님의 영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제와 교우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날은 하느님 백성의 전례 거행, 특히 성찬의 희생 제사와 성무일도로 성화된다”(「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3항)는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전례 거행에 온전하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한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집회를 해산해야 할 때가 옵니다. 미사의 마침 예식은 공지 사항, 인사, 강복, 파견, 퇴장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초세기 마침 예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교부도 자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영성체 후에 별도의 예식이 없거나, 있었다면 로마 관습에 따라 사제나 부제가 “가십시오. 파견입니다”(Ite missa est) 하고는 파견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사제의 강복은 늦게 도입됐습니다. 6~7세기 「로마 예식」 제1권에 의하면, 주교는 제대에서 내려와 개별적으로 강복을 청하는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이라고 했음을 전해줍니다. 10세기경 이 강복이 미사 끝부분에 들어왔지만 적어도 13세기까지는 주교에게만 맡겨져 있었습니다. 현재는 강복 양식이 ‘보통 강복’, ‘장엄 강복’, ‘백성을 위한 기도’ 등 세 가지가 있습니다. 현재의 파견문인 “가십시오. 파견입니다”(Ite missa est)는 「로마 예식」 제1권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강복 전에 행했습니다. 이것 외에도 “가도 좋습니다”, “평화 안에 나아갑시다”(밀라노 전례), “평화로이 가십시오”(동방의 안티오키아 전례; 마르 5,34; 루카 7,50 참조) 등이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Ite missa est”를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의역해 사용하며, 네 개 양식을 추가 삽입해 놓았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들은 잠시 성당에 남아 개별적으로 미사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고, 복음과 성체에 대한 감사 기도를 바치면 좋습니다.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도록 파견”(「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말합니다. 파견된 교우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하느님의 놀라우신 구원 업적에 대한 감사인 성찬례를 회상합니다. 이로써 미사의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양육된 하느님 백성은 이제 그분과 함께 사랑하러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Dilige et fac quod vis)라는 성 아우구스티노(353~430년)의 말씀은 ‘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파견된 하느님 백성이 미사를 통하여 신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지천명(知天命)이며, 또한 그분의 영을 따르는 삶이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그동안 ‘알기 쉬운 미사 전례’를 집필해 주신 윤종식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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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고난 이겨낸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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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1 | |||
좋은 일에는 방해되는 일이 많다는 '호사다마‘(好事多魔), 재앙이 바뀌어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긴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은 우리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사자성어(四子成語)이다.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자주 쓴다. 그 유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변방 노인의 말(馬)에서 나온 말이다. 전쟁이 자주 일어나던 중국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가 기르던 말 한 마리가 어느 날 도망가 버렸다. “말이 도망가서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라며 위로했다. 노인은 “이 일이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며 오히려 담담했다. 얼마 뒤 도망갔던 말이 많은 야생마들을 끌고 노인에게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놀라며 부러워했지만, 노인은 이 일이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며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다 다리를 크게 다쳐 절름발이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걱정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복이 될지 어찌 알겠냐며 대답했다. 그 후 전쟁이 일어나 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징집되었는데, 장애를 지닌 노인의 아들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 오히려 목숨을 지키게 되었다는 고사(古事)이다. 성경에서 이런 고사성어들이 잘 맞는 인물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라 생각한다. 그는 한마디로 드라마같은 우여곡절의 삶을 살았다. 야곱은 사랑했던 라헬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요셉을 드러내놓고 편애했다. 당연히 다른 아들들은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결과가 결국 요셉에게는 고통과 고난의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다른 형제들은 기회를 잡아 요셉을 이집트 땅에 노예로 팔았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오히려 좋게 작용하여 결국에는 이집트의 총리에 올랐다. 요셉의 형제들이 기근 때문에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왔다가 첩자로 몰려 문초를 당하는 자리에서 형제들은 요셉을 재회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형들이 고향으로 가서 베냐민을 데리고 왔을 때 요셉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서로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했다. 그의 인생역정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끝은 모두 좋았다. 요셉은 어떤 과정에서도 실망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요셉은 사람이 일을 아무리 잘 계획해도 이를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그의 삶에 펼쳐진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지탱해준 가장 큰 힘은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선조에게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이었다. 신앙인의 삶을 보면 우연이라 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삶을 계획하고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고난과 실패, 죄까지도 선용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는 분이시다. 우리도 요셉의 믿음을 배운다면, 매일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면 결국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요셉을 왜 구약성경에서 가장 착하고 훌륭한 믿음의 인물이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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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고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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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2 | |||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는 이유는 내가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 타인의 힘겨움 위로해주기만 해도 사람들이 찾아오고 외롭지 않게 돼
요즈음 고독사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고독사가 일본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텅 빈 방에서 혼자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 아무도 찾지 않았을까, 왜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일본과 한국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아무런 말도 안하다가 고독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경우 자격지심, 즉 내가 가진 것이 없다는 마음 때문에 고독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그런 마음을 가진 분들이 계실까봐 제가 사목하면서 본 사례 하나 알려드립니다. 달동네에서 본당 신부할 때 환자 방문을 하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신 자매님이셨는데, 방문하면 늘 환하게 웃으시는 자매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자매님이 선종하시고 장례미사를 하게 됐습니다. 미사를 하는 성당 안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들어차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마음이 ‘심쿵’해서 물었습니다. 자매님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셨는가 하고요. 그러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자매님이 상담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건강하실 적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을 오래하셨는데, 병석에 누우신 후에도 전화상담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그 자매님의 머리맡에 전화기가 있던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누운 상태에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보면서 ‘가진 것이 없어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길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오게끔 하는 것은 꼭 돈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힘겨움을 알아주고 들어주고 위로해주기만 해도 외로운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바람막이가 되어줍니다. 그리고 고독사는 돈이 없는 사람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부자 영감님이 있었습니다. 성격이 아주 독특해서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자신이 부자라고 유세를 떨다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는데 영안실에 아무도 찾아오질 않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는 것은 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외로운 분들은 지금이라도 털고 일어나 본인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외로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넘쳐서 죽을 것입니다.
교우분들, 눈을 감고 본인이 죽은 후 장례식에 몇 사람이 찾아올지 잠시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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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세의 기도 (탈출 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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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3 | |||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불안함을 느끼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탈출 32,1-6) 하느님은 이에 진노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10) 여기서 늘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과 완전히 다른, 화가 가득하고 복수하시려는 하느님 모습이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분을 참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화를 내십니다. 레위인들이 이 일로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3000명이나 죽였다는 이야기(32,25-29)는 우리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지 않고 우리 입맛에 따라 하느님 상을 조작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식구를 잃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모세의 중재 기도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가시도록 하느님을 여러 번 설득합니다.(32,11-14,31-34; 33,12-17; 34,8-9) 모세가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라고(32,33)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32,34)는 말로 분명히 거부하십니다. 다시 모세가 하느님을 달래기 시도합니다.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저에게 ‘이 백성을 데리고 올라가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누구를 보내실지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께서는 ‘나는 너를 이름까지도 잘 알뿐더러, 너는 내 눈에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당신 눈에 든다면, 저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알고, 더욱 당신 눈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 당신 백성이라는 것도 생각해 주십시오.”(33,12-13) 모세는 주님께 애교를 부립니다. 자신이 더욱 주님 눈에 들게 해 달라는 청은 모세가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려는 밑밥입니다. 그의 본래 관심사는 그가 말미에 살짝 언급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번에도 “내가 몸소 함께 가면서 너에게 안식을 베풀겠다”(33,14)고, 즉 모세만을 언급하십니다. 다급해진 모세가 자신의 의중을 단도직입으로 말합니다. “당신께서 몸소 함께 가시지 않으려거든, 저희도 이곳을 떠나 올라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제 저와 당신 백성이 당신 눈에 들었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33,15-16) 모세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늘 함께 이야기하지만 하느님은 계속 모세만을 언급하십니다.(33,17) 모세가 주님을 뵌 뒤(33,18-23) 재삼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34,8-9) 그제야 주님은 ‘너의 온 백성’, ‘너를 둘러싼 온 백성’, ‘너희’라는 말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고 모세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십니다.(34,10-28) 우리는 아픈 이들이나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모세는 입술과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기도합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34,8)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께 애원합니다.(32,11)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면서 타인을 단죄하는 모습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잘못까지 품어 안는 우리의 자세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실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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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약식 제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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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22 | |||
‘제의’와 다른 ‘예절 장백의’는 언제 입을까요?
신부님 여러 명이 함께 미사를 집전하시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럼 제대 가운데 계시는 주례 신부님과 함께 집전하시는 신부님들의 복장이 다를 때가 있다는 걸 알아채셨을 것 같습니다. 주례 신부님은 품이 큰 반원형의 옷을 입고 있는 반면, 다른 신부님들은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흰옷에 긴 띠를 목에 걸치고 계시기도 합니다. 일단 주례 신부님이 입으신 옷은 ‘제의’입니다. 그럼 다른 신부님들이 입고 계신 옷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신부님들의 이 옷을 두고 ‘약식 제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옷은 사실 ‘약식 제의’가 아니라 장백의에 영대를 걸친 것입니다. 장백의는 사제가 미사 때 갖춰야 할 육신과 영혼의 결백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이름 그대로 옷자락이 긴(長), 흰(白)색의 옷(衣)입니다. 그리고 장백의 위로 목에 걸쳐 두르는 폭이 넓고 긴 띠는 영대라고 부릅니다. 영대는 사제의 직책과 의무, 권한과 품위를 드러냅니다. 여러 전례 봉사를 하면서 신부님의 전례복을 유심히 보신 분들은 “어? 장백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제의 안에 입는 장백의는 더 얇고 목 부분의 모양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대만 걸쳐 입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백의를 일반 장백의와 구분해서 ‘예절 장백의’라고 부릅니다. 제의는 장백의와 영대 위에 걸쳐 입는 옷으로, 예수님의 멍에를 상징하는 전례복입니다. 무엇보다 “미사나 미사와 직접 연결된 다른 거룩한 예식 때 주례 사제가 입어야 할 고유한 옷”(「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37항)이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신부님들은 반드시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절 장백의는 어떤 경우에 입을까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는 “공동 집전자들 수는 많고 제의가 부족할 때와 같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주례자를 뺀 공동 집전자들은 장백의 위에 영대만 메고 제의는 입지 않아도 된다”(209항)고 설명돼 있습니다. 미사 중 우리에겐 신부님의 제의만 보이지만, 신부님은 제의 안에도 여러 옷을 입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장백의와 영대 외에도 악마와의 투쟁, 극기, 금욕생활을 의미하는 ‘띠’, 어깨에 걸치는 장방형의 아마포로 ‘구원의 투구’를 상징하는 ‘개두포’도 착용합니다. 이 5가지 전례복에는 각각 전례복의 의미를 담은 기도문이 있는데요. 신부님들은 미사 전 이 전례복들을 하나씩 입을 때마다 각각에 해당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미사 때마다 겹겹이 옷을 입고 제대에 오르십니다. 물론 이 모든 전례복은 신부님들의 평상복이라 할 수 있는 수단이나 클러지 셔츠 위에 입습니다. 신부님들이 항상 전례복을 갖춰 입는 것은 거룩한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겠지요. 날이 점점 더워져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성당을 찾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신부님만큼 옷을 여러 겹 껴입지는 않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옷차림을 단정히 한다면 더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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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미사 전례] 주님과의 일치인 영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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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03 | |||
많은 사제의 모델이신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는 크리스마스카드에 ‘밥이 됩시다’, ‘제가 밥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는 문구를 즐겨 쓰셨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영혼과 육신이 허기진 이들을 위해 ‘밥’이 될 만큼 자기 자신을 내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바람이 담겨 있지요. 어찌 보면 ‘밥’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얕잡아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이기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앞서는 사회에서, ‘밥이 됩시다’라는 말은 자신이 구원하려는 사람들 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닮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영성체는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먹으라는 간절한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과 일치하는 행위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한 적절한 준비로 신자들은 “교회가 정한 공복재(영성체 전 한 시간)를 지켜야 합니다. 또한 몸가짐(행동, 복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님이 되시는 그 순간에 걸맞은 존경과 정중함과 기쁨을 나타내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7항) 영성체 예식은 사제의 영성체, 교우들의 영성체, 영성체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후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초세기에는 미사에 참례한 교우들은 특별한 장애가 없으면 모두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셨습니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아니즘 이단에 맞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성체 성혈도 지존하신 하느님의 몸과 피임을 강조하다 보니 교우들은 강한 경외심으로 차츰 영성체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성체 신심 행위인 성체조배와 성시간 등이 영성체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세 중엽에 마음과 정신으로 영성체를 해도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과 거의 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영적인 영성체인 ‘신령성체’도 생겼습니다. 이러한 영성체 기피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에서는 모든 신자에게 최소한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는 고해성사를 하고 영성체를 하도록 의무 규정으로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현재의 「로마미사경본 총지침」에서는 “사제와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바로 그 미사에서 축성된 성체로 주님의 몸을 모시고, 미리 허용된 경우에는, 성작에서 성혈을 모시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이러한 표지들을 통하여, 영성체가 현재 거행되는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85항)라며, 희생 제사에 대한 온전한 참여인 교우들의 영성체를 권장합니다. 교회는 “성체와 성혈 양형으로 할 때에 표지로서 더 충만한 형태를 지닌다”(「로마미사경본 총지침」 281항)라고 하며 양형 영성체를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한 가지 형상만의 영성체로도 그리스도를 참된 성사로 온전하게 모두 다 모시는 것이므로, 그 효과와 관련하여 오직 한 가지 형상만 모시는 이들도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로마미사경본 총지침」 282항)임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는 이제 우리가 함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순간 우리를 하나의 백성, 한 몸으로 결합하고, 당신을 닮아 먹히기 위해 쪼개진 빵이 되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들 각자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 쪼개진 빵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사랑의 성사」 88항)라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말씀은 영성체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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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화투와 심리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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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83 | |||
우울감과 불안감 해소에 좋은 화투 놀이 통해서만 단련되는 ‘감정 근육’ 마음의 힘 생겨 심리적 안정 이끌어
화투치는 사람들이 가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킵니다. 판돈이 큰 도박판을 벌이다가 경찰에 걸린 사람들로 인해 화투가 망국병인 양 하는 말들이 오고 갑니다. 물론 도박 중독일 정도로 매일 치고 판돈이 크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담자들을 상담하면서 놀이치료가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화투가 심리적 해소와 회복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저로서는 ‘화투긍정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제 개인적인 경험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재개발 현장에서 사목을 할 때 심리적인 압박감과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주 신자들과 화투를 치며 제 마음의 불안감과 우울감을 씻으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협상 과정이 수월치 않고 험악하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심리적 후유증이 심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면 신자들을 모아 화투를 치고 웃으면서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곤 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았다면 아마도 큰 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화투가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함께하는 놀이라서 그렇습니다.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이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이야말로 치료제 중 가장 좋은 치료제인 것입니다. 사람의 병은 혼자 있을 때 생깁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가볼 사람도 없을 때 고독한 상황 속에서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무리지어 다니던 존재들인지라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병이 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고독병을 치료하려면 무리 안에서 함께 노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인데, 화투는 간단한 도구와 작은 공간에서 긴 시간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좋은 놀이입니다. 또한 화투는 마음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흔히 신앙인들은 마음의 평화가 가장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리적 건강은 평안함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힘입니다. 마음의 힘은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커집니다. 사람의 마음은 몸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근육으로 형성돼 있습니다. 즉 몸의 근육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모든 감정들이 단련이 돼야 마음의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의 근육은 피트니스 센터를 가거나 혹은 집안에서 아령을 들면 되는데, ‘감정 근육’은 놀이를 통해서만 단련이 됩니다. 게임을 하면서 이기고 지는 기쁨뿐만 아니라 허탈감, 쓰라림 같은 감정도 맛봐야 마음 근육이 튼실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자분들에게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췌장암에 걸리지 않으시려면 고스톱을 쳐서 ‘쓰리 고에 피박’을 쓰시라고 합니다. 돈을 잃었을 때 배가 아프고 괴로운 것은 췌장이 자극을 받아서 운동한 결과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잘 노는 사람들은 건강합니다. 로뎀이란 의사는 하루에 다섯 번 박장대소를 하면 만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 놀이치료만큼 웃고 즐길 수 있는 것은 또 없습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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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기도 이야기] 노래하며 춤추며 온 백성이 함께 바치는 기도(탈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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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00 | |||
“나의 힘, 나의 노래이신 주님!” 가수 고(故) 김광석씨는 ‘나의 노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겨운 리듬과 희망찬 가사를 담고 있는 이 노래에서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는 후렴이 반복되는데, 이는 가수가 가지고 있는 삶의 정수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을 나오면 울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빠져나오면서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자유를 얻은 백성은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첫 노래이자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바빌론의 패망에(묵시 18장 참조) 대한 하늘에 있는 무리의 환호와(묵시 19장 참조) 같이, 이 노래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 앞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백성은 주님과 그분의 종인 모세를 마음으로 믿는(탈출 14,31 참조) 데에 그치지 않고 마음과 입을 열어 찬양 노래를 부릅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성경 번역은 ‘굳셈’)이신 야(훼)!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2절; 이사 12,2: 시편 118,14 참조)는 대목이 노래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힘과 노래라는 조합은 주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분의 멋짐을 드러냅니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 사건을 전하는 기도문의 수준 높은 시상이 ‘노래’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전쟁의 용사’와 ‘오른손’ 및 그분께 맞서는 이들은 거센 물속에 가라앉은 납덩이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표현이 그분의 탁월한 ‘힘’을 보여줍니다. 주님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줄임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그분을 얼마나 친밀히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가 당신과 같겠습니까?”(탈출 11절)는 노래의 중심이자 그 전환점입니다. 이 질문에서 어떤 신들과도 비길 수 없는 주님의 탁월함이, 또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의 뛰어남이 드러납니다. 그분에 맞설 이나 비길 이는 아무도 없고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의 노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찬양하고 12~18절은 미래를 지향합니다. 지금까지 선사된 것이 감사의 이유이지만 또한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 이미 찬양에 포함됩니다.
이와 같이 기도 안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들어섭니다. “땅이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16절)는 민수기 16장의 반역을 암시하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필리스티아, 에돔, 모압, 가난안 민족들을 거쳐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당신께서 살려고 만드신 곳’(17절)은 후에 솔로몬이 세우게 될 성전을 가리킵니다.(1열왕 8,49; 2역대6,39) “주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신다.”(18절)는 마지막 구절은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언제나 도와주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노래 전체는 점차 확장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남성)이 “나는 노래하리라”(1절)로 시작하지만 미리얌과 여자들은 “너희는 노래하여라”(20절)라는 추임새를 넣고 남성과 여성이 마주하여 웅장한 이중의 합창을 하는 듯합니다. 게다가 여자들은 손북을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동반합니다.(판관 11,6-8; 1사무 18,6-8; 예레 31,4 참조) 합창단과 관현악단과 무용단이 모두 함께 신나는 음악을 엮듯이 찬양의 기도는 모든 이들을 포괄합니다. 누구보다 위대하신 하느님은 시간을 넘어 변함없이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십니다. 나의 노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로 찬양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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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의 수호성인이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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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213 | |||
[특집] 가톨릭교회의 다양한 수호성인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함께 찾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직장에서 프로젝트가 잘 안 풀려서 도움을 청하고 싶었던 적은? 이럴 땐 수호성인에게 기도해 보자. 교회는 각 직업, 지역, 분야 등에 수호성인을 두고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전구하도록 하고 있다. 교회에는 어떤 수호성인이 있고 그 유래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수호성인들과 그 유래 분실물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이다. 안토니오 성인이 분실물의 수호성인이 된 이유는 이렇다. 누군가 성인의 책을 훔쳐 갔는데, 성인이 책이 되돌아오길 기도하자 책을 찾았다는 일화 때문이다. 시험을 앞둔 사람들은 어느 성인에게 의탁하면 좋을까?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은 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공부에 재능이 없어 신학교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신학교 입학시험 문제로 유일하게 아는 내용이 나왔고, 무사히 통과해 사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은 수험생들의 수호성인이 됐다.
텔레비전에도 수호성인이 있다. 바로 성 클라라이다. 클라라 성인은 1958년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됐는데, 성인이 매우 아파 미사 참례를 하러 가지 못했을 때 벽에 비친 환시를 보고 미사를 봉헌했다는 이유에서다. 일에 종사하며 곤란함을 겪을 땐 각 직업의 수호성인을 찾아보는 것을 어떨까? 집배원은 하느님의 메시지의 전달자인 천사 성 가브리엘, 외과 의사는 의사였던 성 다미아노, 은행가는 돈을 다루는 세리였던 성 마태오 사도, 장의사는 예수님의 시신을 새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의 성 요셉, 광고업은 뛰어난 설교가였던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수호성인이다. 사진가들의 수호성인은 성 베로니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가는 길에 베로니카 성인은 수건을 들고 서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수건으로 땀과 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았다. 이 베로니카의 수건에 예수님의 초상이 남아있었기에 베로니카 성인이 사진가들의 수호성인이 됐다. 이외에도 잘 알려진 수호성인으로는 질병 치유의 루르드 성모 마리아, 생태계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자동차 운전자를 위한 성 크리스토포로가 있다. 루르드 성모는 프랑스 루르드의 한 동굴에서 성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발현해 치유의 샘물을 알려줬다. 이 치유의 샘물로 많은 환자들의 병이 치유됐기 때문에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는 환자들의 수호성인이 됐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2월 11일이 ‘세계 병자의 날’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성 크리스토포로는 아기 예수님을 업고 강을 무사히 건넜다고 해서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이 됐으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자연에서 형제애를 느끼고 동물에게까지 설교했다는 등의 이유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생태계 수호성인이 됐다. 교회는 9월 1일부터 성인의 축일인 10월 4일까지 창조 시기를 지낸다.
수호성인의 의미와 선포 수호성인에 대한 관습은 다음 두 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는 사도신경의 모든 성인의 통공(1고린10,16: 2고린 13,13)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의 구성원들은 각자가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1고린 1,9: 12,8. 13)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다. 성당에 수호성인(주보성인)을 세우는 관습은 순교자의 묘지 위에 성당을 건립하고 그 순교자를 수호성인을 모시는 일이 많았던 사실에서 비롯한다. 순교자의 묘지 위에 성당을 짓고 그 순교자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일이 많았던 3세기까지는 순교자만이 수호성인이 됐지만,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에는 순교자 외의 성인 및 신비도 성당의 수호성인이 됐다. 성인들이 특정 직업이나 장소, 단체 등의 수호성인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 있었던 사건이나 특성 때문이다. 수호성인이 국제적 성격을 띠면 교황청에서 이를 인준한다. 한 예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자의 교서를 통해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는데, 교황은 자의 교서에서 “몇몇 국가와 정부의 수만, 많은 정치 인사들, 일부 주교회의와 주교들이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도록 요청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성 토마스 모어와 같이 특출한 인물을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사회의 선익에 이바지하리라고 확신한다”면서 성인을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수호성인 후보는 누구? 산업이 발전하며 이전에 없던 직업과 분야가 생겨나고 새로운 성인이 탄생하는 등 계속되는 변화 속에 여러 성인이 현재도 다양한 수호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전 교황청 시성부 장관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스 추기경은 201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4년 세계 청년 대회를 시작하는 등 교황 재임 27년간 청년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또 성인의 시성 절차가 진행되던 2006년에는 이탈리아 연극배우들이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원한다고도 밝혔다. 성인이 한때 아마추어 연극 배우였고 연극을 위한 시와 드라마를 다작으로 쓴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첫 MZ 세대 성인이 되는 ‘신의 인플루언서’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는 인터넷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그가 전 세계의 성체 기적 사례를 정리한 웹사이트를 만드는 등 컴퓨터 영재로 통했던 게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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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상식 팩트체크] 성체는 탄수화물일까, 단백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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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영루카 | 114 | |||
8세기 경부터 기적 여러차례 일어나 1970년에는 과학적인 조사도 진행 보이지 않아도 성체성사 기적 동일
우리는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이라고 응답하며 성체를 모십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가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바로 예수님의 살이라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듭니다. 빵이라면 탄수화물일 것이고, 살이라면 단백질일 것인데, 그렇다면 성체는 탄수화물일까요. 단백질일까요? 물론 이 궁금증을 해결하겠다고 예수님의 몸을 실험대에 올리는 불경한 일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도 궁금하니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려 합니다. 교회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바치신 것이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교회에서는 항상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서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 빵의 온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온 실체가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한다”고 가르칩니다.(트리엔트공의회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제4장) 그러니까 빵이 축성을 통해 성체가 되는 순간 그 실체가 더 이상 빵, 그러니까 탄수화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면 아무리 맛봐도 밀떡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비단 우리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가 봅니다. 어떤 신부님도 미사를 집전하던 중 ‘예수님이 진짜로 성체성사 안에 계실까’하고 의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바로 8세기경 이탈리아 란치아노성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의심을 하던 그 신부님이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끝낸 그 순간, 성체가 살로 변하고 성혈이 피로 변한 기적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교회는 1000년이 넘는 시간 성체와 성혈을 소중하게 보관해 오다 1970년 과학적인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사결과 성체는 인간의 ‘심장 근육 조직’이었고, 성혈은 인간의 피였으며 혈액형은 AB형이었다고 합니다. 살과 피의 혈액형은 동일했고, 피 안에는 정상적인 피와 같은 비율의 단백질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성체와 성혈이 살과 피의 형상으로 변한 기적은 란치아노의 기적 이후로도 여러 차례 나타났습니다. 가깝게는 1996년 8월 아르헨티나 성모마리아성당과 2008년 폴란드 성안토니오성당에서도 성체 성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들에서도 각각 과학적인 조사가 이뤄졌는데, 1970년 란치아노의 기적을 조사한 결과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체가 이렇게 기적이 일어날 때만 예수님의 살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 혹은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관찰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모든 성체성사에서 같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런 성체 성혈의 신비에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엎드려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찬미가’ 중) 성체가 단백질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요한 20, 29)하지 않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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