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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제목 | 이름 | 조회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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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병인박해(丙寅迫害)(한국천주교 4대박해) | 범계성당 | 6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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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丙寅迫害) 병인박해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이다. 1866년(고종3년 병인년)초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 이어진다. 〔원인과 발달〕벽이단(闢異端)의 전통과 척사의식, 천주교 교리와 유교 사회의 윤리와의 갈등, 천주교 신자들의 대외의식과 이에 대한 위정자들의 반응 등 [박해의 전개과정〕 박해 초기의 양상 : 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다리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조정으로부터 소식이 없자 다시 지방 순회에 나섰다. 이 때 베르뇌 주교는 서울 인근 교우촌을 둘러보고 상경하였는데 1866년 2월 23일 포졸들이 몰려와 베르뇌 주교, 홍봉주, 이선이를 체포하였다. 2월 25일에는 브르트니에르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이 잇달아 체포되었다. 의금부에서는 여러 차례 신문과 형벌이 계속되었다. 그런 다음 판결이 내려져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등 4명은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 하였고 남종삼과 홍봉주는 같은 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충청도에서는 거더리의 손 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이어서 위앵신부, 오매트르신부, 황석두, 제천의 장주기 등 5명이 체포되어 보령이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양요와 박해의 확대 : 1866년 4월과 8월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을 시도하려다 좌절되었고, 6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스호가 평안도 해안에 접근한 적이 있었다. 9월 2일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소각되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병인 척사 윤음>을 반포하였다. 병인양요가 프랑스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덕산 사건의 발생 : 이런 상황에서 1868년 5월 충청도 덕산에서 굴총 사건 일명 ‘남연군 묘 도굴 사건’ 또는 ‘오패르트 도굴 사건’ 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다신 한번 박해가 확대되었다. 대원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자들은 역률을 적요하여 처단하였고, 배교한 경우에도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어 서울의 포도청과 각 도의 감영에 신자들을 수색‧체포하도록 영이 내려졌다. 굴총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goal 일대, 서울의 포도청과 절두산, 경기도의 수원, 남한산성, 죽산, 남양, 충청도의 공주, 홍주, 충주, 청주, 전라도의 전주, 나주, 여산, 경상도의 대구, 울산, 진주, 황해도의 해주, 황주, 함경도의 영흥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신미양요와 박해의 종식 : 무진년의 박해는 1869년에 이어 1870년 말까지 계속되다가 잠잠해지게 되었으나, 1871년 미국 함대가 내침하는 ‘신미양요’로 인해 다시 재개되었다. 이로 인해 1871년과 1872년 사이에 52명의 신자가 다시 포도청에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이 지방에서는 신자들이 체포되지 않았으며, 조야의 상소에 따라 1873년 12월 24일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났고 오랫동안 계속된 병인박해는 끝을 맺었다. 〔시복시성과 박해의 의미〕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는 1895년 시복 수속 담당자 르 장드르 신부로 하여금 그 동안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치명일기>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 책에는 모두 877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29명만이 1차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어 1899~1900년에 교구 재판이 개정되어 증거가 불충분한 이성욱, 이성천, 송성보를 제외한 26명을 대상으로 1921~1926년 교황청 수속이 시작되었다. 26위 순교자 중에서 1964년 푸르티에 신부, 1967년 프티니콜라 신부가 제외되고 베르뇌주교, 다블뤼주교,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위앵, 오매트르 신부, 남종삼, 전장운, 최형, 정의배, 우세영, 황석두, 손자선, 정문호 조화서, 손선지, 이명서, 한원서, 정원지, 조윤호, 이윤일 등 24위가 시복 대상자로 확정되었다. 〔병인박해의 의미〕 교회 내적으로 볼 때 : 우선 병인박해는 최대의 박해로 유례없이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최후의 박해였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병인박해 후 철종 연간에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내면서 교우촌을 재건하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통해 교세 확대에 노력을 하였으나 성직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박해는 다시한번 천주교 신앙을 다른 지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각처에 새로운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참고 : 한국 가톨릭 대사전 5권 3417~342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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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병오박해(한국천주교 4대박해) | 범계성당 | 206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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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박해(丙午迫害) 병오박해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되어 9월 20일에 종결되었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되었다. [발단과 전개과정〕 1839년 기해박해가 끝난 이후 1840년대 중반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해 척사윤음이 박해의 법적 근거가 되었으므로 언제 어디서든 다시 박해가 일어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한 ‧ 중의 국경 감시가 엄해졌고 외국 선교사들은 육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가 없게 되었다. 1845년 김대건 신부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때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해로는 매우 위험했으므로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봄이 되자 김대건 신부에게 장차 중국에 있는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입국할 수 있는 해로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마포 ‧ 연평도 ‧ 백령도를 항해 하면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자신이 그린 해로도를 중국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 임성룡,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6월 20일에는 이곳에서 네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임치백, 김중수 등이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포도청에서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으며, 현석문 ‧ 남경문 ‧ 한이형 ‧ 김임이 ‧ 이간난 ‧ 우술임 ‧ 정철염 등도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의 문초에서 중국의 광동 출신 우대건이라고 하다가 여섯 번째 문초에서야 비로소 용인 태생 김대건으로 신학 공부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였음을 실토하였다. 그러나 교회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권면하는데 힘썼고, 선주 임성룡의 부친 임치백에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주었다. 〔순교와 시성〕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이끄는 클레오파트르호, 빅토리외즈호 ,사빈느호 등 군함 세 척이 충청도의 외연도에 나타나 편지 하나를 조선 정부에 전하도록 하였다. 세실 함장은 기해박해 때 조선에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해 항의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충청 감사의 장계로 곧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김대건 신부도 옥중에서 판관으로부터 이 사실은 전해 듣게 되었다. 세실의 조선 원정이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판결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한강변의 노들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만 25세였다. 그로부터 3일 뒤인 9월 19일 현석문이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같은 날 장사로 순교하였다. 병오 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겪어 온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자마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일시 활동을 중단하고 안전한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을 색출해 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1801년이나 1839년의 박해 때처럼 새로운 척사령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 순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이들의 순교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었고, 1846년 11월 3일자의 서한 즉 <병오일기>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이 자료는 그곳에서 다시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최양업 부제가 번역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함께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었으며, 이후의 시복 절차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9명의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1925년 7월 5일 기해박해 순교자 70명과 함께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 : 한국 가톨릭 대사전 5권 3412~3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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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신유박해(한국천주교 4대박해) | 범계성당 | 5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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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신유사옥) (한국천주교 4대박해) 신유박해 : 1801년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 천주교 4대 박해 가운데 하나로, 1801년 1월 10일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에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배경〕조상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無父無君의 종교로 인식,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성리학에 입각한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위협, 정치 세력들 간의 대립과 갈등, 정조가 승하하자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내세워 채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남인이 주도권 장악,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 김씨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이들을 앞세워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 시파와 노론 시파를 제거하고 세도 정권의 발판을 구축하고자 함 〔전개과정〕1800년 6월 28일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 정책을 폈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해짐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게 된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 신자들과 남인 시파를 일망타진하려고 함 서울에서의 박해 : 1800년 12월 17일 중인 최필공(토마스)이 체포되고 19일에는 최필제(베드로)가 1801년 1월 9일 최창현(요한)이 체포됨 대왕대비 김씨는 1월 10일 공식 박해령을 내림 이런 상황에서 명도회 회장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 궤짝 사건이 1월 19일 발생, 2월 9일에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을 국문하기 시작, 11일에는 권철신(암브로시오)과 정약종을, 14일에는 정약전을, 16일에는 이기양을 의금부에 가둠 이들 가운데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이승훈 등 5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장기현과 신지도로 유배당함 경기도 충청도에서의 박해 : 내포지방의 사도였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2월5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사형선고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 당함, 2월 26일 경기도 포천지방의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아들 홍인(레오)과 정약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1801년 3월 13일 여주 성문 밖에서 원경도(요한), 임희영, 최창주(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정종호 등 5명이 처형 4월 2일 정철상(가롤로), 최필제, 정인혁, 윤운혜, 정복혜, 이규합 등 6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박해 확산 : 3월 12일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박해는 더욱 가열, 4월 19일 주문모 신부는 군문 효수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 주문모 신부를 궁 안으로 피신시킨 송마리아와 신마리아가 3월 17일 사사, 5월 22일 주문모 신부를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과 궁녀 강경복, 문영인,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김연이 현신애 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전라도에서의 박해 : 전주에서는 3월부터 박해 시작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박해 초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은 9월 11일 사형선고 받고 처형당함 〔백서사건〕황사영이 충청도 베론으로 피신하여 김귀동의 집에 은거한 뒤 그곳에서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등을 통해 수집한 박해 과정을 기록하면서 교회의 재건 방안을 구상함. 황사영은 8월 26일 황심을 만나자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여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고 함. 이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는데 11월 5일 황사영, 옥천희, 한계흠이 처형당하게 되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됨.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단락되자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를 박해한 일을 종묘에 고유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 즉 척사윤음을 12월 22일에 반포함 황사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을 합하여 300여명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함 〔의미와 영향〕 첫째 : 조선 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교회를 거의 폐허화시켰고, 어렵게 영입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35년간 목자 없는 교회가 됨 둘째 : 신유박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이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됨,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등의 산간 지방으로 숨어 계속 복음을 전하였고 죽음을 앞둔 신자들의 용기와 귀양 간 이들의 인내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조선의 구석진 시골까지 천주 신앙이 빠르게 전파됨 셋째 : 신유박해를 거치면서 천주교가 민중 신앙으로의 자리를 굳히게 됨, 양반 신자들 대부분이 순교 또는 배교하고 귀양 감에 따라 스스로 양반 지위를 포기한 민중적 양반이나 중인 이하의 신분층이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됨 넷째 : 황사영 백서 내용이 드러나면서 천주교는 無父無君의 패륜적인 종교라는 인식에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인식을 더하게 되어 발달된 서양 과학 기술까지도 배척하게 됨 이 때문에 조선의 과학 기술은 낙후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됨 다섯째 :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 김씨를 비롯한 벽파는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채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남인 공서파를 이용하여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 시파와 노론 시파를 제거하고 세도 정권의 발판을 구축하게 됨<참고 : 한국 가톨릭 대사전 8권 5447~545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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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기해박해(한국천주교 4대박해) | 범계성당 | 1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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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己亥迫害) (한국천주교 4대 박해) 기해박해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의 하나 1839년(기해년, 현종 5) 3월에서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참수된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명인데 그중 70명이 훗날 성인품에 올랐다. 〔원인〕시(時) ‧ 벽(僻)의 정치적 갈등,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배경〕순조 재위 초기에 정사를 마음대로 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천주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노론 벽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1802년 안동 김씨로 시파에 속해 있던 김조순의 딸이 순조 비가 되면서 정권이 바뀌어 이후 36년간은 안동김씨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천주교에 호의적이던 김유근이 1836년 무렵 중풍에 걸려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정권은 우의정 이지연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풍양조씨와 손을 잡고 천주교 박해를 계획하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고자 하였다. [초기상황]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6년부터 시작되었다. 조정에서 공식적인 체포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의 포졸들에 의해 서울 일부 지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1837년 1월16일 권득인 베드로, 3월21일 김성우 안토니오, 4월7일 남명혁 다미아노,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허계임 막달레나 등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지연은 1839년 4월 18일 천주교 박해를 허가해 주도록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아뢰었고 대왕대비전에서 이를 재가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박해의 확대] 박해는 5월말부터 일단 누그러져 약 1개월 동안 평온을 되찾았다. 그 동안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신부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세도가 조만영을 위시한 풍양 조씨에게 넘어 가게 되었고, 7월 5일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배교자 김순성이 밀고로 현석문 가롤로,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조신철 가롤로,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었다. 이어 수리산 교우촌에 살던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 이 에메렌시아등이 체포되었다. 박해가 확대되자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자수를 권유하였다. 당시의 교세가 ‘신자수 1만명, 영세자 1,200명, 견진자 2,500명 고해자 4,500명, 영성체자 4,000명 혼배자 150명, 종부성사 60명, 예비신자 600명’이라고 기록되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압송되어 오자 9월 21일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다. [박해의 종식] 서울과 지방에서 수많은 신자가 죽임을 당하자 조정에서는 11월 23일 척사윤음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가 사학임을 다시한번 민중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대대적인 박해를 끝내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검교제학 조인영이 지어올린 ‘기해 척사윤음’이다. 당시 조정에서 이를 반포한 이유는 여론이 학살을 중지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신유박해 때와 마찬가지로 이미 대부분의 주동자들이 체포 되어 처형되었으므로 더 이상 박해를 끌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후 새로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기존에 체포된 신자들로 인해 순교자는 끊이지 않고 태어났다. 1840년 1월 31일(음 12월 27일)과 2월 1일, 당고개에서 10명이 참수형을 받았다. 처형지가 서소문에서 당고개로 바뀐 것은 설날 대목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정에서 요청한 때문이었다.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권진이 아가다, 이경이 아가다. 손소벽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 이성례 마리아, 홍영주 바오로, 최영이 바르바라. 회장 이문우 요한 등이 순교하였다. [박해의 의미와 시성]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수는 적었으나, 그 대상 지역은 더 넓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박해 이전에 신자들이 이미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경상도 등지에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 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사나 장사 병사한 신자수가 60여명이라고 전한다. 더욱이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와 지도자들을 잃음으로써 일시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 공동체는 이전보다 더 가난한 서민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국경 감시를 강화했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거나 신자임을 감추고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결과 신자들이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되었고 신앙 내용은 더 복음적이고 교리 실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그 후 1857년부터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 중에서 79명을 선택하여 시복운동을 전개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가경자로 선포하는 한편 시복에 필요한 사항을 심의하기 시작하였다.<참조, 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2권 1135~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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