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나눔게시판 > 궁금해요? (신앙생활)
| 번호 | 제목 | 이름 | 조회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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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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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계성당 | 146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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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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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전례력에 따르면 가,나,다,해로 구분되고 독서와 복음도 다른데 왜 그런가요? | 범계성당 | 15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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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 전체를 알려 주고자 성경 독서를 알맞게 배정하는데 주일과 축일에 성경의 주요 부분을 3년 주기로(가해, 나해, 다해), 평일에는 2년 주기(홀수해,짝수해)로 적절히 나누어 놓았습니다. 교회는 연중 시기의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거룩한 복음의 주요 부분을 3년 동안에 다 들을 수 있게 '가해'에는 마태오 복음서를,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서를, '다해'에는 루카 복음서를, 연중 2주일과 '나해'의 연중 제17주-21주일에는 요한 복음서를 읽도록 하였습니다.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시기의 주일에는 그 전례시기와 조화를 이루는 복음을 읽습니다.
주일 미사의 제1독서는 대부분 구약 성경을 읽고 부활 시기에는 사도행전을 봉독합니다. 제2독서는 그날 복음의 주제와 일치하는 성경 본문이 배정됨으로써 신자들이 복음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도록 배려하면서 신약이 구약의 완성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2독서는 신약 성경의 서간이나 요한 묵시록을 읽도록 하고 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1년 동안에 복음서를 순서대로 읽도록 하고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주요 부분을 2년 안에 다 읽을 수 있게 홀수해와 짝수해로 나누어 가급적 연속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 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사순, 대림, 성탄, 부활 시기의 독서는 전례 시기의 특성 때문에 해마다 반복해서 읽습니다. 「미사 독서 목록」(Ordo Lectionum Cum Missale ) 지침 참조)
말씀 전례는 성찬 전례와 함께 미사의 중심 부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풍부한 식탁을 마련하고자 성경의 보고를 널리 개방하고 회중들에게 성경의 주요 부분을 일정한 햇수 안에 낭독하도록 위와 같은 원칙을 정한 것입니다. (전례 헌장 51항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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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받으면봉사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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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계성당 | 8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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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봉사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비판적으로 질문받을 때도 있고, 질문을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과연 교회에서 봉사를 하려거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만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 존경하는 사부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그게 맞는 삶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도회에 들어온 것이 잘했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저와는 달리 부모님도 모셔야 하고, 결혼도 꿈꾸고 있는 청년이 있다면, 그가 꿈꾸는 교회 내의 봉사도 제 이상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런 봉사자들의 예는 우리 주변에 적잖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청년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가며 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자발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교회 쪽에서 요청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 그 친구가 교회를 위해 활동하게 된 배경입니다. 때때로 그 청년은 자신의 자동차까지 동원해 가며 짐을 나르기도 합니다. 준비물품에 이상이 생기면 자비를 들여 수리도 합니다. 행사를 위해 쓴 물건인데 실소유자는 그 청년 자신이고, 하나하나 유지보수를 위한 비용을 청하는 것이 미안해서 자비를 들였던 것입니다.
교회에 이런 봉사자는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매우 헌신적이고 이것 저것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해주는 사람이니 소중히 여길 보배가 맞습니다만.... 실제로 이런 사람이 느끼는 기분은 결과적으로 서글픔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교회를 위해 하는 일을 당연히 여기게 되고, 그러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그를 부려먹을 수 있는 대상으로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봉사를 하는 당사자도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마음 속엔 격려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만과 우울이 들어차기 시작합니다.
결국 고결한 일을 하는 머슴이나 몸종으로 봉사자가 스스로를 인식할 상황까지 된다면 그런 봉사는 말이 봉사지 봉사라 할 수 없습니다. 수덕한다는 수도자들도 지지나 격려가 실려 있지 않는 낱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면 기운 빠지는데, 선의를 가지고 교회에 봉사하고자 나온 친구를 머슴 부리듯 한다는 것은 매우 무례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젠가부터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는 능력을 잃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의 힘이 강해서 교회에서 댓가없이 봉사를 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먹고 자는 문제만큼은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현실은 그러하지 아니합니다. 그렇게 교회에 투신하고 싶은 사람은 그냥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아마도 이들이라면 먹을 것이 떨어진다 해도 하느님께 향한 자기 봉헌과 세상에 대한 헌신 그 자체로 기뻐할지 모르겠기에 그렇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만이면 됩니다. 독자분들께는 매우 이상적으로 들린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선택한 수도자가 아닌, 봉사를 어느 순간부터 ‘강요당해야’하는 신앙인들, 특히 교회 내에서도 “열정 페이”를 요구받는 청년들에게는 그런 봉사는 가뜩이나 각박하게 흘러가는 사회 분위기 내에서 마음에 짐을 지도록 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아득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들에게 봉사를 청하는 데 있어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전국적으로 배움터(Learning Center)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의 친구, 존 수사님이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들려준 봉사자의 기준이란 것이 떠오릅니다. 그는 봉사자들에게 수당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봉사자가 배움터에 와서 봉사하는 시간을 정해진 시간 이상으로 늘이지 않습니다. 각 봉사자는 일주일에 두 시간 십오 분(여기서 십오분은 쉬는 동안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넘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를 합니다. 그 봉사자가 유능하다고 해서 더 시간을 쓰도록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 수사님이 어떤 봉사자에게 두 시간 십오분을 넘어 도움을 요청해야 할 일이 벌어진다면 수사님은 그에게 시급을 줄 것입니다. 즉, 봉사자는 자신이 생계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심하게 침범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봉사자를 대하는 중요한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을 도와주는 봉사자들에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되물어 봐야겠습니다. 그들이 저와 함께 일을 하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다면, 그들을 아예 우리 사무실에 고용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자금을 모아야겠습니다. 그럴 수 없는 지금은, 일주일에 일정 시간, 한달에 일정 시간, 그렇게 정해진 시간을 넘지 않도록 일을 잘 나눠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그들의 선의와 믿음에 고맙다고 진심어린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봉사자들은 자신의 시간을 나누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다양한 사람을 겪으면서 자신도 배우고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그런 행복이 있기에 지혜롭고 너그러운 이들은 봉사하고자 합니다. 이미 하느님을 닮아 있는 이들입니다. 이냐시오가 기대했던 하느님의 사랑이 그들이 바라는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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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미사주 | 범계성당 | 7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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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전례 중에 신부님께서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을 보셨을텐데요,
자료 : 평화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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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왜 삼종기도는 서서 바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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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계성당 | 13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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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 성모신심을 가진 열심한 단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직, 수도 성소자도 적잖이 배출되었습니다. 가정을 이뤄 살아가는 친구들 중에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정을 이뤄 살면서 성당 공동체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친구들 중 저와 친했던 한 명이 아주 사소한 질문을 해 왔습니다.
"삼종기도(Angelus)는 왜 서서 하는 거야?"
우리는 보통 당연히 서서 한다고 여길 만한 것인데, 막상 질문 앞에 서니 그 기도를 꼭 서서 해야 하는가? 하는 반문이 생기더군요. 일상에 습관적으로 젖은 태도에 대해 종종 어떤 질문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도록 해 주곤 합니다.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타성에 젖어 있는 것들에 대해 태도를 올바르게 가지도록 이끌어 주는 유용한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삼종기도는 당연히 서서 한다고 생각하였던 까닭은 흔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아침미사에 가면 삼종기도가 보통 미사 직전에 바쳐지는 까닭에 신자들은 당연히 서 있습니다. 점심에 하는 삼종기도도 길을 지나가다가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잠시 가던 길 멈춰 서서 바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명동성 당 앞을 지나가다 보면 정오에 경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저녁에 바칠 때도 아침미사와 동일한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져 보면 그 기도롤 꼭 서서 바치라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앉아서 바칠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답변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속풀이의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거의 자동적으로 프랑스의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의 '만종'이라는 그림을 떠 올렸습니다. 그 그림의 원제는 안젤루스, 그러니까 '삼종기도'입니다. 그림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석양을 배경으로 경건히 '서서' 기도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 삼종기도는 밀레의 그림처럼 서서 하는 것이 전통이라 서서 바치는 것이야'라는 제 생각을 공동체의 선배 신부님께 이야기했더 니, 장난기 많은 이 분은 "그건 밭에 앉는 것이 불편해서 그랬던 거야"라고 응대하시더군요. 오! 나름 설득력 있게 들렸습니다.
제 나름대로 그렇게 답을 구해 보고는 사전을 참고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평상시의 "삼종기도는 꿇어서 바치는데 주일에는 기쁨을 표시하는 뜻에서 일어서서 바친다". 그리고 "부활 삼종기도는 또한 기쁨을 표 현한다는 의미에서 항상 일어서서 바친다"(가톨릭대사전 참조)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삼종기도는 두 가지가 있지요. 부활시기가 아닌 평상시에 바치는 삼종기도와 부활시기에 바치는 부활 삼종기도 말입니다. 그 두 가지 삼종기도를 바치는 자세는 이렇게 따져 보니, '앉고 서는' 자세의 구분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서고'의 구분과 관련이 있었네 요. 삼종기도를 주일에만 서서 바치는 이유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부활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 곧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시기의 삼종기도는 항상 부활의 기쁨을 표현하기에 늘 서서 바친다는 것이 일관성 있는 설명이 되겠습니다. 아무튼, 어느날 새벽미사에 갔던 제 친구는 앉아서 삼종기도를 바쳤다고 하는데, 이 자세는 꿇지도 서지도 않은 제3의 자세였던 것입니 다.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정이 있다면 누워서 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히려 삼종기도를 하루 동안, 아침 정오 저녁 정해진 때에 바치냐 아니냐가 더 따져 봐야 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자투리 시간이라 할 짧은 시간을 활용해서 바칠 수 있는 이런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 도록 해 줍니다. 우리의 일상을 경건하게 이끌어 주는 전통있는 신심행위를 좀 더 소중하게 여기고 실천함으로써 좋은 습관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 요?
박종인 신부(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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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성체와 묘령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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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계성당 | 18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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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신자가 영성체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성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니고 성체를 모시고자 원한다면 성체성사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를 신령성체(神領聖體)라고 부른다.
반대로 신자가 영성체를 해서는 안 될 경우임에도 성체를 영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모령성체(冒領聖體)라고 한다.
사제가 없어 미사를 거행하지 못하고 단지 말씀 전례만 거행할 경우, 병고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 대죄 중에 있으면서 고해성사를 받지 못해 영성체를 할 수 없는 경우, 혼인 조당으로 지속적으로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 신자일 경우에 신령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미사 중에 성체가 모자라 영성체를 못 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신령성체를 하는 것입니다.
신령성체는 성체 신심의 또 다른 표현으로, 성체를 모시지 않고 마음으로 성체를 모셔도 같은 효과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영성체를 하지 못한다고 미사 참여마저 하지 않는 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성체를 하지 못하더라도 미사에 참여하고 신령성체를 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모령성체는 은총의 지위에 있지 않은 신자가 스스로 중죄 중에 있음을 의식하면서 영성체를 하는 경우입니다.
모령성체는 성체에 대한 불공경의 태도이며, 중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지위에 있지 않은 신자는 영성체 전에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고 교회와 화해해야 합니다.
- 평화신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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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성체를 못 모시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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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계성당 | 16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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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본당의 한 청년이 성체를 영하는 것에 매우 조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즉, 자주 자신이 성체를 영하기에 합당한가 자문하는데 그때마다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미사에 나와서도 영성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단 그 청년만 아니라 신자분들 중에는 이처럼 자신의 자격을 엄하게 설정하여, 주님 모시기를 매우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는 이들이 더 계실 겁니다.
자신이 성체를 영하기에 잘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묻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신을 단죄하는 면이 강하다면 하느님도 당황해 하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제정하여 물려주신 데에는 적극적으로 당신을 취하라는 초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까지 말씀하셨다는 것을 상기해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단죄가 너무 과하여 지속해서 성체를 영하지 않도록 제한을 한다면, 어쩌면 그런 태도 자체가 하느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성체를 영하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는 이 거룩한 순간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둘러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사에 앞서 조금 일찍 와서 성체 앞에 머물러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찰을 통해 살펴봤을 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품상의 결점(결점처럼 보이는 것)은 개인이 조금씩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지 성체를 모시지도 못하게 만드는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반면에 이웃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줬음에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은 채 영성체를 하는 것은 모령성체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모령성체, 그리고 성체를 영하는 바람직한 태도"도 함께 읽어 보세요).
따라서, 성찰을 통해 둘러봤을 때 자신이 중한 죄 중에 머물어 있지 않는 이상 주님께서 차려 주신 상을 사양하는 일을 피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게다가,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따르면, "성체는 일상생활에서 약해져 가는 사랑을 북돋아" 주며, "이처럼 생기를 되찾은 사랑은 소죄를 없애 준다"고까지 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94항 참조). 쉽게 말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우리가 저지르는 소소한 잘못을 극복하도록 도와 준다고 하겠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도록 활력을 주는 것이 바로 성체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올라오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 감정들은 정리하여 고해성사를 통해 해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한 감정이 장애물이 되어 성체까지 영하지 못하도록 이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한 개인을 멀어지게 하는 유혹에 걸려 넘어져 있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들 온전하겠습니까?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 '완성된 인간'의 모범이신 그리스도와 나날이 닮아가고 결국 그분과 완전히 일치하고자 성체를 모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부족함은 내가 겸손한 사람임을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해서 하느님의 초대에도 응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더는 겸손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성체를 영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성체성사의 본질을 살리는 일입니다. 성체성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하게 만들어 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랑의 실천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97항 참조).
박종인 신부(요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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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 범계성당 | 77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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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崔良業) 신부(1821~1861)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 세례명은 토마스, 본관은 경주, 아명은 정구,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
[최양업 신부 연표]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사상] 최양업 신부의 어린 시절에 영향을 준 사람들은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였고, 다음으로 학생 시절에는 스승들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는 베르뇌 주교가 설명한 것처럼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훌륭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르뇌 주교는 언제나 ‘최양업 신부와 같은 한국인 성직자 10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보곤 하였다. 최 신부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정신과 신심의 바탕에는 자비로운 하느님과 수난 받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리고 선교 활동을 위한 여정 속에서 언제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희망을 두고, 자비로우시며 전능하시고 지선하신 하느님의 뜻이 자신과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들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다. 그가 말하는 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은 자신들의 안위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었으며, 그는 끊임없이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최양업 신부는 겸손과 순종, 인내의 덕행은 물론 예수 성심 신심, 마리아 신심, 성인 신심도 지니게 된다. 그는 성심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자주 고백하면서 예수 성심의 온유하고 겸손된 마음을 따라 겸손한 마음을 드러내곤 하였다. 선교 활동 중에는 스승 신부들에게 묵주나 성인들의 성패와 상본들을 청하여 신자들에게 널리 보급하고, 마리아 신심과 성인 신심을 장려하고 가르치는데 힘썼다. 최양업 신부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굳은 신심과 덕행은 박해받는 조선 교회의 상황 아래서 그에게 강한 순교 영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비록 혈세의 영광을 얻은 순교자는 아니지만, 박해 와중에 있던 한국 천주교회의 방인 성직자로서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고 생활한 ‘백색(白色)의 순교자였다. 십자가의 생명력을 굳게 믿었던 최 신부는 순교한 동포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자신도 여기에 참여하여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교회관] ‘그리스도의 양 우리’로 표현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으로, ‘일치’안에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주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거룩한 신전을 치르는 교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순교 신심은 이 영신의 전쟁터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천주가사 안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교회의 양들은 주 하느님의 자비와 전능 안에서 일치하여 마지막 전쟁터를 향해 나가는 용사로 이해되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영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선교 영성이다. 그는 일찍부터 선교에 대하 열망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으며, 중국에 머물러야만 하였을 때는 귀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한없이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귀국한 뒤에는 선교에 대한 열망을 교우촌 순방으로 표출하기 시작하여 귀국하자마자 1850년 1월부터 9월까지 거의 5천리를 걸어다니면서 교우촌을 순방할 정도였다.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메스트르 신부도 이런한 최양업 신부의 선교 열정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신부는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은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나 성 베르나르도의 선교열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한계와 부족함을 고백하곤 하였다. 그는 한국의 바오로 사도와 같았으니, 꾸준한 열성과 거룩한 땀을 바탕으로 복음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치다가 결국 과로로 선종한 이 땅의 사제였다. 최양업 신부는 억압당하는 민초들을 신앙으로 구제해야 한다는 위민 사상도 지니고 있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억압받는 하층민과 신자들의 비참한 생활이었다. 민초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고 믿은 선각자였다. 이를 위해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선교 열정을 보여준 의인이요, 땀의 순교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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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정하상 바오로 성인 | 범계성당 | 6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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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丁夏祥) 바오로(1795~1839)에 대하여 동정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바오로, 본관 나주 당색은 남인 신유박해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기해박해 순교자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의 아들이다. 또한 순교자 정철상 가롤로 아우이자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의 오빠, 어려서부터 성가정의 신앙을 이어받아 누구보다 열심히 천주교를 실천하는데 노력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오랫동안 침체되어 온 교회를 재건하는 데 헌신하였다. 1816년부터 북경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고,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며 1833년 이래 여러 명의 성직자를 조선에 영입한 뒤 지도자요 복사로서 그들을 도와 활동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출생과 가문의 신앙]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의 분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본래 그의 부친 정약종은 경기도 광주 땅 마재에 있는 정씨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786년 무렵 중형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당시 그 형제들 중에서는 정약전만이 아니라 넷째인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였다. 또 정약종은 이 무렵 같은 남인인 이수정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정철상을 두었으나 얼마 뒤 부인과 사별하였고, 이후로는 홀아비의 정을 지키면서 살아가려 하였으나 가족들의 만류로 유조이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가 곧 정하상의 모친이다. [성직자 영입 운동과 조선교구 설정] 정하상은 언제부터인가 마재를 떠나 교우들의 집으로 피해 다니면서 생활하였다. 집안에서의 박해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우들이 모두 가난하였으므로 그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하상이 처음 북경으로 떠난 것은 그의 나이 만21세 때인 1816년 겨울이었다. 당시 그가 북경 천주당을 찾았을 때 그곳에 있던 선교사들은 용감하고 젊은 조선의 밀사를 보고 다시 한 번 조선 교우들의 열성에 놀랐다. 당시 조선 안에서 정하상을 도와주던 신자들 중에는 동정 부부로 유명한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가 있었다. 그들은 정하상을 자신의 집에 거처하도록 하였고, 북경에 가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하였다. 1819년 이들이 순교하자 이경언 바오로, 현석문 가롤로 등이 그를 도왔다. 1824년, 나이 29세 때 정하상은 북경 왕래에 훌륭한 동행자를 만나게 되는데 역관 출신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였다. 이때 정하상은 유진길과 함께 북교 선교사들을 만나고 귀국한 뒤 교황에게 올리는 서한을 작성하였으니 이는 조선 교우들이 18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이다. 정하상과 유진길이 조선 교우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은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후,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로 선출된 직후인 1831년 9월 9일, 마침내 조선 포교지가 조선교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다. [성직자 영입과 순교] 1834년 유진길과 조신철은 국경에서 유파치피코 신부를 맞이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으로 인도하였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20일 만주 땅 마가자에서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1836년 1월 12일 봉황성 책문에서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 이광렬 등을 만나 이튿날 밤 조선에 입국했다. 이에 앞서 정하상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서 받은 비용으로 서울 후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모친과 여동생을 비롯하여 남이관부부, 권진이와 다른 과부 신자들을 그곳에서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다. 정하상과 동료 밀사들은 1836년 12월 3일에 조선 신학생 최양업 토마스,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12월 28일에는 책문을 떠나 샤스탕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인도하였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를 모셔 와 후동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이후 정하상은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순방하거나 신자들을 돌보는 데 힘을 쏟았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정하상은 1839년 7월 11일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후동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세 명의 선교사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다음 날인 1839년 9얼 22일 유진길과 함께 의금부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만 44세였다. [천주신앙과 상재상서]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다양한 육화론적 영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나눔과 청빈의 삶을 지향하였고 열심히 대재를 지키는 등 고신극기에도 힘썼다. 그의 신심은 애주애인의 신앙으로 승화되었으며, 평생 정결의 덕을 지키면서 살도록 이끌어 주었고,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뛰어드는 용덕을 지닐 수 있게 해 주었다. <상재상서>는 비록 3,644자로 이루어진 짧은 내용이지만 정하상이 지니고 있던 천주 신앙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이를 통해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확고하게 믿으면서 조선의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정하상의 천주 신앙과 육화론적 영성은 종말론적 영성인 순교의 용덕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성사 생활과 영신 구원 생활에 철저하였다. 그는 정결 순명 청빈을 바탕으로 복음 삼덕은 물로 신 망 애의 실천을 통한 완덕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내세 구원을 믿으며 순교를 지향해 나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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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본당주보성인) | 범계성당 | 5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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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金大建) 신부(1821~1846)에 대하여 최초의 한국인 신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再福), 보명은 지식(芝植), 관명은 대건(大建), 본관은 김해
[김대건 신부 연표]
[김대건 신부의 가문]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에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 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그의 아버지 제준은 1836년 초,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영세를 받았으며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사상] 하느님을 ‘임자’라고 표현하였다. 인류를 대가족으로 표현하였듯이 하느님을 대가족의 가장인 임자로 여겼다. 그는 가정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지상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였다. 아버지는 자녀의 소유주이고 생사여탈권을 가진 임자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존경과 위엄의 대상일 뿐 마니라 복종과 사랑의 대상이었고, 사람으로서 이러한 임자를 잊고 몰라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 하였다. 김대건의 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박해 시대 신자들의 영성과 동일하였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유교적인 효의 개념에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이 혼합되었다.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창조주, 상선벌악을 결정하는 심판관, 모든 권위의 절대자, 온갖 환난에서 보호해 주고 힘을 주는 분, 은총으로 섭리하는 분이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하느님의 자녀 된 증거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간곡히 유언하였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천당과 지옥, 그리고 사후 심판이었다. 이 세상은 인간이 항구히 거처할 곳이 아니고 사람은 잠깐 땅 위를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현세를 나그네의 여인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영복을 누릴 천당이고, 현세는 천당을 준비하는 곳이지만 현세의 선행에 따라 사후 천당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생전의 선행에 따라 사후 천당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생전의 선행은 사후의 노자라고 말했다. 현세와 내세, 천당과 지옥은 긴장과 대립의 관계였다. 김대건은 현세를 천국을 얻기 위한 영혼의 전투장, 사형 집행장을 영혼이 대적해야 할 최후의 전장으로 보았다. 그래서 천국을 얻으려면 마음을 허실하게 먹지 말고 주야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혼의 삼구(세속, 육신, 마귀)와 투쟁하여 박해를 극복하라고 하였다. 그는 박해를 영혼의 위기로 보았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서 신자들을 전투장의 군사로 표현하였다. 그는 신자 공동체를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무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있는 전투적 공동체 즉 신전지교회로 파악하였다. 김대건은 한국 천주교회 설립 후 한국 교회의 희원을 이룬 첫 한국인 사제였다.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당시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 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 조류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선각자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사람답게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했고, 하느님과 교회, 교회의 장상들과 동료들, 그리고 신자들을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였다. 그는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다가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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