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나눔게시판 > 궁금해요? (신앙생활)
| 번호 | 제목 | 이름 | 조회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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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장미주일에 대하여 | 김정태 | 297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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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주일에 대하여
사순 네 번째 주일과 대림 세 번째 주일을 ‘장미주일’ 또는 '환희' (Laotare)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는 3월31일은 장미주일입니다.
사순시기는 육체적 극기나 단식을 통한 생활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며,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장미주일은 이러한 대축제를 준비하기 위하여 고신 극기와 기도로 지쳐 있는 신자들에게 희망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 줌으로써 더 큰 기대와 위로를 주기 위하여 준비한 날입니다.
사제의 제의도 사순시기 동안 회개와 속죄를 상징하는 보라색(자색)이지만 이날은 기쁨을 나타내는 장미색으로 바뀌며, 이날의 본기도와 봉헌 기도도 부활의 기쁨을 미리 보여 줍니다.
사순절과 성탄절은 초대 교회로부터 영세 예비자 교리 교육에 중점을 둔 시기로서 일 년 가까이 준비해 온 예비자들 중에서 예수 부활 전야에 세례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선정하여 '선발된 자'로 등록을 하고, 교회는 집중 교육을 시키면서 사순 제4주간이 되면 복음서를 전달하는 예절을 거행합니다. 이때 예비자들은 부활 축제의 신비와 기쁨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장미꽃이 활짝 피었을 때보다 꽃봉오리가 맺혔을 때 더욱 예쁘듯이 예비자들의 마음은 교리와 성서 말씀과 체험을 통하여 부활의 은혜를 앞당겨 받는 셈입니다.
원래 장미 주일은 예비자 교리보다 옛 풍습과 더 관계가 깊습니다. 옛 로마 시대에 봄이 시작되면 겨울에 대한 봄의 승리 축제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10세기에는 새로 핀 꽃(장미?)을 꺾어들고 축제에 나오는 풍습으로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 11세기부터 교황청은 선물로 금색으로 도금된 장미 또는 메달을 만들어 관계 공무원들에게 선물하였고, 후에는 외국인 공로자들에게로 확대하여 수여하였습니다. 16세기에는 미사 때 사제들이 장미색 제의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 전통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장미주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다졌던 결심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는…'하고 굳게 다짐했던 것이 작심삼일로 그치지는 않았는지,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하려다가 제풀에 지치고 만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일에 쫓기고 삶에 쫓겨 별다른 생각 없이 사순시기를 흘려보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자금부터라도 마음을 추스리고 생각을 다잡아 남은 사순시기를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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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한국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순교 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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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흡 | 716 | |||
| 32 | 새가족 찾기 기도문 | 박윤흡 | 5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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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족 찾기 기도문>
모든 이들에게 지극한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저희 공동체는 선교의 열정으로 하느님께 새 가족을 찾아 봉헌 하고자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느님을 모르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에게 참된 진리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마음을 열어 주시어 하루 빨리 아버지의 품안으로 찾아오게 하소서. 또한 새 가족을 찾아 나서려는 우리 안에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어 저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살아 있는 말씀을 생동감 넘치게 전하는 선교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마침내 3,000년기를 맞은 교회가 아버지께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 모두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삶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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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모령성체와 공복재 / 첫영성체 / 노자성체 | 박윤흡 | 7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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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령성체/공복재 교회는 신자들에게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미사에 참여하고,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원칙적으로 부활 시기에 성체를 받아 모시라고 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합당히 받아 모시려면 은총의 상태에 있어야 하며, 죄 중에 있으면 물론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그 순간에 그분께 합당한 존경과 정성과 기쁨을 나타내고자 성체를 받아 모시기 1시간 전부터 물과 약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공복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노약자는 예외입니다.
첫영성체 '첫영성체'는 일반적으로 유아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이 처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어린이들은 첫영성체를 하기 전에 성체성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보통 초등학교 3-6학년 때 양심성찰과 고해성사, 성체성사 교리를 배운 다음 첫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노자 성체 죽음의 위험에 놓인 신자에게 마지막으로 모시게 해 주는 성체를 노자성체라고 합니다. 병자의 가족은 병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에 노자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노자성체의 경우에는 공복재를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노자 성체는 여러 번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천주교예비신자교리서(개정판), 2015, 149-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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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묵주기도(Rosario)는 무엇인가요? 누구에게 봉헌하는 기도인가요?" | 박윤흡 | 89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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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 기도(로사리오-Rosario)라고 하는 묵주의 어원은 '장미'(Rosa)라는 말에서 나왔으며, '장미 꽃다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성모 마리아께 기도(성모송)하면서 장미를 봉헌하는 관습이 있었고,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는 것을 장미꽃을 봉헌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결국 '묵주 기도'란 '장미 꽃다발 기도'를 뜻하며, 묵주 알 하나는 장미꽃 한 송이인 셈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공경의 예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10번의 성모송을 한 다발 장미(10송이)로 생각하면서 바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에서, 성령 강림과 성모 승천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스무 가지의 신비들 가운데 한 가지씩을 묵상하면서 한 다발의 장미(성모송 10번)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환희의 신비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수난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관련된 고통의 신비를, 수요일과 주일에는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승천과 관련된 영광의 신비를, 목요일에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관련된 빛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참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개정판-, 2015, 126-127
이렇게 성모님을 향한 공경과 사랑의 표현으로 봉헌하는 우리들의 정성담긴 묵주기도는 '성모님처럼 굳은 신앙을 가지고 겸손과 순명의 자세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신비를 묵상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묵주기도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께 우리들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죠.
하느님과 가까이 계셨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묵주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진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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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견진성사 종합교리용 텍스트(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신앙 생활의 핵심 중 발췌) [3] | 박윤흡 | 10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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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신앙 생활의 핵심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용기를 내십시오!”- (줄리아노 버지니 엮음, 김정훈 옮김, 바오로딸, 2015, 78-82)
견진성사 -예수님과 하나 된 이들-
“...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는 성체성사와 함께 하나의 구원 사건을 형성합니다. ‘입문성사’라고 불리는 이 세 가지 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새로운 피조물이자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 견진성사는 이탈리아어로 ‘크레시마Cresima’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도유’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견진성사에서 ‘성유’를 바르는 예식으로 성령의 힘을 받아, 유일하고 참된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합니다. ‘견진’이라는 말에서 이 성사가 세례의 은총을 더욱 확장시켜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견진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욱 단단하게 결합시켜주고 교회와 우리의 관계를 완전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의 특별한 힘을 받아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해줍니다. ... 다른 성사들과 마찬가지로 견진성사도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루어 주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아들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어 당신 아들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하느님은 우리의 삶을 이끌고 돌보아 주십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실존과 삶 전체를 관통합니다. ...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지혜, 통찰, 깨우침, 용기, 지식, 공경, 경외입니다. 이 모든 은혜는 견진성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 우리가 성령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기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의 삶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직접 생활하시면서 기도하고 용서하며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며 궁핍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과 친교를 나누며 평화의 씨를 뿌리십니다.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견진성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선물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언제나 기쁘게 신앙 여정을 걸을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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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왜 성지주일에 축성된 성지를 십자가 뒤에 꽂아 놓는가?" | 박윤흡 | 50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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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입니다. 지난 주님수난성지주일 때 축성받은 성지가지, 집 안에 모셔져 있는 십자가 뒤에 다 꽂으셨나요?^^;
이 글은 최윤환 암브로시오 몬시뇰님의 '하느님 백성의 축제'-전례 상식문제 풀이-를 참조하였습니다.
성지주일에 축성된 성지를 가지고 집으로 가면 십자고상 뒤에 꽂아 놓는 풍습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관습은 가톨릭 가정 안에서 시행되는 좋은 관습이며 장려되는 바입니다. 이렇게 십자고상 뒤에 꽂힌 성지가지는 오래 가면 말라 떨어지기도 하지만 다음 해 성지주일 전날까지 그대로 꽂혀 있습니다. '왜 성지가지를 꽂는가?' 축성된 성지가지는 하느님의 축복을 우리 위에 불러냅니다. 실제로 오지리와 남부 독일에서는 곡식창고의 짐승 우리에까지도 매달아 놓으며 들에 나가 밭의 네 모퉁이에도 꽂아놓는다고 합니다. 또 집안에 여러 공간과 더불어 특별히 '지성소'라고 할 수 있는 십자고상 뒤에 꽂아 놓는 이유가 바로 '하느님의 축복'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답변에 '반미신적인 행동 아닌가?'하고 묻는다면 난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성물을 축성하는 것도 반미신적인 행위인가? 라는 물음이 따라오죠. 이제 성지가지 축성 기도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나뭇가지에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가지가 옮겨지는 곳마다 주님의 강복과 은혜를 내리시고..."
성교회의 기도는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며 축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주간 문턱인 성지주일에 제구와 사제의 제의가 홍색(적색, 빨간색)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죠. 이 홍색은 승리의 색채로 승전의 축제를 올릴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합니다. 또 이 날에 우리가 받드는 성지가지, 곧 빨마나무 가지 역시 옛부터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치명자들의 손에는 승리의 빨마가지가 쥐어지고 그러한 상본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예컨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상본) 우리는 손에 빨마가지를 들고서 이 '성주간'에 죽음의 승리를 할 분을 경축하고 그분께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죽음에 처할 몸이지만 그 죽음을 쳐부술 왕이시며, 파괴될 성전이지만 새롭게 건설된 성도 예루살렘의 임금으서 오시는 분을 호산나의 환성으로 성지를 들어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구세주의 형상 뒤에 놓인 승리의 빨마가지가 얼마나 기묘하게 어울리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지가지는 승리의 증표요 따라서 십자가의 형상은 겉으론 죽음의 모상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통해 죽음을 쳐 이긴' 승리자의 모상이요, 생명의 묘상임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 작은 빨마가지는 마치 성 금요일에 암흑의 비극적 모상 위에 장중하고도 밝은 부활의 표제와도 같으며, 매년 거행되는 성지행렬은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 죽음과 암흑의 모상 위에 '저 골고타에서 죽으신 죽음의 승리자에게 찬미'의 희망찬 부활의 표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십자가 뒤에 꽂혀 있는 빨마가지는 자주 우리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며 '너희 그리스도교는 모든 방안에 죽음의 모상을 달아 놓도록 가르친다니 얼마나 애석하고도 슬픔을 자아내는 종교인가!?' 라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형상은 신앙인들에게 죽음의 모상이 아니라, 바로 생명과 구원의 모상이다!" 십자가와 빨마가지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한번은 죽어야만 하고 또 구원을 위한 끊임없는 죽음의 생활을 해야 함을 우리에게 권고하지만 동시에 죽음의 비극에 처해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는 부활의 희소식을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
한 마디로, 십자가와 성지가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신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요,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시는 주님의 선물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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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성호경, 왜 긋는가? 어떤 의미인가? | 박윤흡 | 826 | |||
| 26 | '상선벌악', 선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 박윤흡 | 24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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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7 나해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강론 발췌) 글이 길어 밑부분이 조금 짤리는 듯 합니다. 강론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한 교우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 우리 가톨릭 교회 4대 교리에는 ‘상선벌악’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향해 ‘자비’하심을 드러내시는 분이신데 왜 선한 사람만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상을 받지 않죠?’”
제게는 이 질문의 포인트가 다음의 물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 상선벌악의 원천은 어디인가?
2. 하느님의 자비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3. 상선벌악의 구체화된 모습이 십자가 대속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인가?
4. 고해성사로 용서를 받으면 죄 사함이 되는 것인가? (악의 속성으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인데, 고해성사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 신앙이 윤리, 도덕적 차원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1. 상선벌악의 원천은 어디인가? 상선벌악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비롯됩니다.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힘이 뛰어나신 분. 그러나 벌하지 않으신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나훔 1,3) 구약성경의 인물들과 예언자들에게 '정의로운 하느님상'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를 비롯한 수많은 병자들이 ‘병치레’한다는 그 자체로 ‘죄인’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2. ‘하느님 자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느님의 자비가 없이, ’정의로운 하느님‘만 현존하셨다는 것인가?’
결코 아니죠! 우리가 매일미사에 화답송으로 노래하는 시편, 하느님 찬미의 성가라고 불리는 시편은 ‘구약성경’에 속해있지만 ‘하느님 자비를 갈망하는 인간의 부르짖음’입니다. 분명한 것은 구약시대에 정의로운 하느님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상’도 있었다는 것이죠.
그 모습은 신약(Anno Domine)에 와서 구체화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사랑하셨다!’ 그 결과가 바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강생수속’ 혹은 ‘육화’Incarnatio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는 신앙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요. 잘 생각해 보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육을 취하시어 나약한 인간이 되셨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하느님의 자비성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했던 병자들을 수없이 고쳐주십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들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더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4,24)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
이 밖에도 수많은 사랑의 기적치유가 일어나지만..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벳자타 못 가..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르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 5,2-7)
38년 동안 이 사람은 주변사람들의 무시와 멸시에 압박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본인에게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희망을 발견했고 더 이상 과거의 심판에 메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바로 그 믿음과 용기가 이 사람을 낫게 합니다. 그 용기의 원천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3. 상선벌악의 구체화된 모습이 십자가 대속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인가?
‘상선벌악의 구체화’라고 한다면, ‘선한 사람은 상을 받아 천국에 가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 지옥에 간다’는 것이죠. ‘아니,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완전한 선’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언행에 신뢰를 두고 따라간다는 것이죠. 이처럼 그리스도 신앙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선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세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스스로 고해성사를 갈망하고 지난 날의 반성과 회개를 할까요? 우리는 모두 천국에 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 24장에 나오는 좌도와 우도의 이야기를 참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내세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현세에 살면서도 악을 저지른 사람은 왠지 모를 두려움에 빠져있죠. 언젠가 다가올 벌에 대한 두려움, 드러나지 않을 벌일지 몰라도 분명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게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양심’을 장착해 놓으셨어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하는 것은 우리가 악을 선택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유와 해방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선과 악의 기로에서 악을 선택할 때 부자유와 더불어 구속이 우리 영혼을 지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 모든 것을 부수기 위해서였어요.
상선벌악은 하인리히 덴칭거(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범-2,000년 공의회 역사의 총망라)에도 나오는 것처럼, ‘윤리적 규범’과 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건 또한 윤리적 인간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법, 자연법에 따른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윤리규범을 올바로 지켜 살아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4. 고해성사로 용서를 받으면 죄 사함이 되는 것인가? (악의 속성으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인데, 고해성사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 신앙이 윤리, 도덕적 차원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사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동시에 ‘악의 속성’을 입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선하신 하느님’을 묵상하고 갈망하며 일상에서 마주하는 선악의 기로에서 선을 택할 때 ‘하느님화’(Deificatio)된다고 표현하지요.
신앙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는 용서받지만, 그 죄는 인간의 영육에 그대로 남아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해소 밖을 나가서 내가 성찰하고 고백한 내용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제는 새로운 사람으로 나를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 죄가 내 영육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몸이 기억한다’라는 표현처럼 말이죠.
교회법은 사회법과 손을 맞잡고 나아갑니다. 인류 공동체는 사회 구성원이며, 그들이 머물고 사는 곳이 또한 교회이기 때문에 사회법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 신앙은 사색과 묵상 등의 키워드를 필요로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이죠. 삶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어요. 아무리 교리지식과 신앙내용을 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면, 이미 그런 나는 내 안에서 스스로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그분이 누구신지’ 묻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그 완성의 종점은 ‘사랑’입니다. 평생을 들어도 어려운 그 사랑, 여기에 빠지면 정말 어쩔 줄 모르겠는 그 사랑,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그 사랑,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나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철저히 이타적인 태도로 드러낸 그 사랑...
교회가 상선벌악을 4대 교리로 둔 것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더 나아가 ‘선하신 하느님의 깃발 아래 서서 신화로 나아가라’는 부르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은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자비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몰라요. '죄 많은 나에게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Tv에 나오는 저 추악한 사람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실까? 내 주변에 있는 나를 못되게 구는 저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실까?'
우리들이 하느님 자비에 대한 묵상과 이해없이 던지는 의구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나약함이 숨겨져 있어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요한 3,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 사람'과 '나', '이 사람'의 죄몫의 경중이 있을지라도..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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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가톨릭 교회 칠성사에 대하여 - '고해성사'를 중심으로 | 박윤흡 | 20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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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 칠성사에 대하여 -‘고해성사’를 중심으로-
박윤흡 윤일요한
1. 성사란 무엇인가?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보이는 지표로 드러내주는 표지’입니다.
2. 성사의 종류
가톨릭 교회는 성사를 총 7개로 규정합니다. 세례, 견진, 성체, 고해, 성품, 혼인, 병자성사입니다. 이 7개의 성사를 통해 하느님은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당신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 또한 요한 세례자를 통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온전히 하느님의 아들로 공생활을 살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내 삶에 하느님을 중심으로 두는 삶이 바로 세례성사를 통해 거듭난 신앙인의 삶입니다.
견진성사는 쉽게 말해 세례성사의 심화입니다.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다시금 하느님의 자녀됨을 삶 안에서 구현할 가능성의 사명을 부여받는 것이 바로 이 견진성사입니다. 견진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는 성숙된 신앙인으로 태어납니다.
성체성사는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축성함을 기념하는 성사인데, 초월적이시며 절대적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최후의 만찬 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이자 기억의 성사입니다. 성체와 성혈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단순히 ‘나 자신’이 그분의 사랑을 기억함을 넘어서 그분께서 나를 기억하고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의 성사입니다. 궁극적으로. 성체성사는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루도록 해주어, 옛 자아(거짓 자아, 피상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하는 성사입니다.
고해성사는 ‘화해와 용서’의 성사입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끊임없이 죄를 짓고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소외됨’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상처투성이 되어 있죠. 그런 상처투성인 나를 치유해주는 성사가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느냐구요? 죄를 짓고 토라지고 미워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이미 나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용기의 성사이며,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에 나 자신을 다시 의탁하는 화해의 성사입니다.
성품성사는 2,000년 전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제2의 그리스도, Alter Christus)을 살고자 하는 사제 지망생들에게 주어지는 성사입니다. 자신의 삶을 내어 놓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에 의탁하며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성사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거듭나는 다시 태어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인성사는 ‘일치’, ‘정결’의 성사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둘의 결합을 통해 인류로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신약성경의 도입부, 예수님의 탄생 사화를 보면 마리아와 요셉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신의와 의탁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혼인성사는 일치와 정결의 성사입니다. 혼인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축복하시고 가정을 꾸리는 신랑과 신부를 당신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 일치시키십니다. 궁극적으로, 혼인의 목적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에 동참하는 창조의 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희망의 성사입니다. 어느 인간도 죽음 앞에선 두렵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것들을 밝혀내고 있지만 죽음의 영역 앞에서는 겸손하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이미 죽음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영역임을 드러내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믿음 안에서 죽음까지도 희망으로 승화시킵니다. 바로 이 죽음을 초월한 희망을 선취시켜주는 성사가 병자성사입니다.
지금까지 가톨릭교회의 7성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성사는 앞서 보았듯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주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남’이라는 주제인데요, 성사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혼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 성과주의 등의 가치관은 태초에 인간성을 상실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현실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많이 버는 것, 좋은 가방, 명품 등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과연 내 행복의 절대적 지표가 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들은 소모품이고 한철장사와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말이죠.. 더 나아가서 만약에 좋은 가방, 시계를 샀다고 합시다. 그걸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없어지고 말 물질 등에 맡기고 살다보니 더 이상 의탁할 곳이 없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우리는 불안을 통해 성장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를 돌아봅시다. 때때로 거짓말을 하거나 돈을 쓸쩍 빼는 등 쉽게 말해 윤리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내 마음이 편했을까요? 나의 만족은 나의 만족으로 인해 피해 받을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거나 위협이 되겠죠. 우리는 이미 내재적으로 그런 마음을 품고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이미 태초부터 윤리적인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가봅시다. 우리 삶을 혼돈케하는 오늘날의 가치관의 궁극점에는 바로 이것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자기중심주의’죠.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원인이자 문제인 것입니다. 내 중심에 따라 살아갈 때 분열과 소외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과 분열, 소외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함께 붙어 다니는 단짝입니다.
성사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은 바로 이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다시 태어남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삶을 통해 분열(하느님-나, 인간-인간, 세상-나)을 극복하여 일치로 나아갈 수 있으며, 소외(고립)로부터 탈피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사는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이며, 단순히 중요성을 넘어서 내 삶을 온전히 변화시켜주는 완전한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표지입니다.
3. 고해성사의 이해
이제 ‘고해성사’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고해, 견진, 성체) 중 하나입니다. 이 입문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습니다.
왜 고해성사를 해야하나요?
고해성사는 정말 나를 용서해주는 효력이 있는 것인가요?
이밖에도 수많은 물음이 우리 마음속에서 차오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해성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3.1. 죄와 원죄
‘죄’란 ‘하느님과 멀어짐’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와를 지으셨는데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끄러움도 없이 천진하고 순결했던 그들이지만 ‘호기심’으로 발동한 인간적 탐욕은 자기중심성으로 변모되어 결국 하느님의 사랑에 흠집을 낸 것이죠. 그 원죄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온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원죄 교리입니다.
구전된 문장 하나가 떠오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왜 죄는 미워하는데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죄’가 그 사람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가능성은 있지만, 죄가 그 사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겠지요.
3.2. 성찰의 중요성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성찰할까요? 죄를 짓게 하는 원천, 7죄종을 주제로 성찰합니다. 7죄종은 아래와 같습니다.
교만(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김), 인색(하는 짓이 소심하고 지나치게 탐하여 인색함), 음욕(성욕의 노예가 됨), 분노(이성을 잃을 정도로 몹시 화를 냄), 탐욕(음식을 지나치게 먹고 마심), 질투(사람을 시기함), 나태(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함)
이상 7가지를 중심으로 성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7가지를 통해 인간-하느님의 관계성이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3.3. 고해성사에 임하는 자세(참회자의 행위)
“죄인은 회개하기 위하여 기꺼이 다음과 같은 참회의 행위가 필요하다. 마음에는 통회가, 입에는 고백이, 행위에는 온전한 겸손과 유효한 보속이 있어야 한다.”
고해성사를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통회’입니다. 통회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성찰’에 요구됩니다. 성찰에는 두 가지 종류, 양심성찰과 의식성찰이 있습니다. 양심성찰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 곧 일상적 삶 안에서 하느님과 멀어지게끔 한 나의 이기적 욕망’을 되짚어 보는 것이고, 의식성찰은 ‘나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하느님은 어떻게 사랑으로 다가오셨는가?’를 되짚어 보는 것입니다. 양심성찰과 의식성찰이 함께 이루어질 때 통회는 자신의 완전성을 더합니다.
둘째, ‘죄의 고백’입니다. 어느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악습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이걸 말했을 때 저 사람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한 사조가 우리 삶에 만연합니다. 하지만 고해성사에는 죄를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제에게 하는 고백은 고해성사의 핵심 부분”입니다.
셋째, ‘보속’입니다. 죄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약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관계까지도 해칩니다. 용서는 죄를 없애 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 주지는 못합니다.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인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죄를 갚기 위해 무언가를 더 해야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여야 하는 것이죠. 이 갚음이 바로 ‘보속’입니다.
3.4.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관계
‘자비’의 메시지는 교회의 사명이자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강생)의 신비는 자기를 비우신 완전한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사명은 마땅히 자비의 표지가 되며, 동시에 모든 성사는 자비의 성사가 됩니다.
특별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고유성 안에서 자비성이 더욱 드러납니다. ‘회개’는 ‘마음이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다시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린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은 회개를 요청하는데 여기에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의 연관성이 숨어 있습니다. 미사는 ‘참회 예절’과 ‘사죄를 청하는 기도’(자비송)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미사는 성찬전례로 접어든 후 성체성사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맑고 건강해야 하겠지요. 그렇기에 고해성사는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오늘날 신앙형태는 고해성사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에 대해서 어느 거리낌도 없고, 고해를 하면서도 형식적인 죄목만 고백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만 이는 인간적 나약함과 두려움, 불안함에 기인합니다. ‘저 신부님이 내 죄를 알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성체성사를 재현하고 고해성사를 집전합니다.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성체성사는 정말이지 하느님이 나를 위해 빵과 포도주 안에 계신다는 것, 고해성사는 진정으로 날 위한 하느님 자비의 성사라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한 마디로, 이 믿음은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그밖에 다른 성사들과 나의 일상적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4. 고해성사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 - 사랑
고해성사의 중심은 ‘죄’가 아닙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복된 죄’라고 말하였습니다.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내려 받을 수 있는 전제로서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죄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날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기비움적 사랑입니다.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대죄-소죄, 영벌-잠벌
교회에서는 ‘죄’를 ‘대죄’와 ‘소죄’로 구분합니다. 대죄는 우리에게서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박탈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게 하는데, 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것을 죄의 ‘영벌’이라고 합니다. 한편 모든 죄는(소죄까지도)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을 초래하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나 죽은 뒤에 연옥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정화를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정화로 이른바 죄의 ‘잠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렬한 사랑에서 나오는 회개는 죄인을 온전한 정화에 이르게 하여 아무런 벌도 남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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