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를수록 강하게 튀어오르는 분노
억압된 감정들 쌓여 화산처럼 터져
평소 자기감정 표출 위한 노력해야
옛 어른들은 화난 사람들을 달래면서 “네가 참아라.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최근에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일명 분노조절장애자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심기를 건드렸다고 폭언을 하거나 폭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차 앞에 차가 끼어들었다고 분노하고 데이트 폭력을 일삼고 하는 등의 저급한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오래전 태국에서 태국인과 한국인이 탄 차가 접촉사고가 났는데 한국인이 폭언을 하자 갱단인 태국인이 총을 쏴서 한국인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참았으면 죽진 않았을 터인데 성질부리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참는 법을 배우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심약한 사람들의 경우 화를 참기만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화를 참거나 삭인다는 것은 심리적 방어기제인 억압을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 억압이란 방어기제는 부작용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분노는 감정이라는 에너지인데 이것을 누르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물위에 뜬공을 물속으로 눌러 놓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깊이 누를수록 강하게 튀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섭다고 합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기감정을 숨기고 억압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 한다는 것입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은 착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본인이 불편하기에 착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마음에 억압한 감정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감정들이 계속 눌린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이 되면 마치 화산처럼 터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한 사람들이 화가 나면 이성을 잃고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일본에서 중학생 아들이 자기 엄마를 토막살인 해서 일본 전역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평범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부모가 이혼하고 엄마가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엄마에게 오랫동안 정서적ㆍ언어적 폭력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어린 시절에는 참았지만 중학생이 되어 덩치가 커진 후 자기에게 잔소리하고 상처 주는 엄마를 칼로 찔러 죽인 후 토막을 내어 냉동실에 뒀다가 발각이 된 것입니다.
만약 아들이 평소에 나름대로 반항을 하면서 자기감정을 표출했다면 그런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평소에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의미하는 그리스어
각 수도회 고유 은사 칭할 때 사용
수도회 각자의 카리스마에 따라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와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
카리스마는 수도회가 성령께 받은 고유한 은사로, 어떤 수도회의 존재 목적, 사명, 영성, 정신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사진은 2014년 12월 1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거행된 봉헌생활의 해 대구관구 개막미사에 참례한 수도자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우리는 일상 속에서 ‘카리스마’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저 사람 참 카리스마가 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흔히 카리스마는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능력이나 자질을 일컫는 말로 쓰이곤 합니다. 그런데 수녀님, 혹은 수사님들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어쩐지 수녀님들, 수사님들과 ‘카리스마’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합니다.
실은 수도생활을 하는 모든 수녀님, 수사님들에게는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 ‘카리스마’는 우리가 평소에 ‘카리스마가 있다’라고 말하는 ‘카리스마’와 어원도 같습니다.
카리스마(Χάρισμα)는 그리스어로 ‘은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무상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견진성사 때, 또 성령 강림 대축일 때 말하는 ‘성령의 은사’가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19세기 철학자 막스 베버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카리스마’라고 부르면서 ‘카리스마’라는 말이 교회 밖에도 널리 알려졌는데요. 사실 이 의미는 ‘카리스마’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리고 카리스마는 조금 더 좁은 의미로 수도회가 성령께 받은 고유한 은사를 말할 때 사용합니다. 카리스마는 어떤 수도회의 존재 목적, 사명, 영성, 정신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수도회의 숫자만큼 다양한 카리스마가 있고, 수많은 수도회들이 각자 자기 수도회의 카리스마에 따라서 교회와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는 수도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동선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도회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 카리스마는 수도자만의 것은 아닙니다. 평신도들도 수도회의 은사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제3회에 가입해 활동하는 방법이 있고, 여러 가지 형태로 후원이나 협력을 통해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로 카리스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카리스마, 곧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분(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1코린 12,11 참조)
물론 우리 눈에 더 뛰어나 보이는 카리스마도 있고, 너무 흔해 보이는 카리스마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카리스마가 더 가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카리스마를 지녔는가’ 보다 ‘이 카리스마를 통해 사랑을 실천했는가’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축성생활을 전공한 성삼의 딸들 수도회 총봉사자 국춘심(방그라시아) 수녀님은 “모든 은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므로 어떤 카리스마가 우수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1코린 13,1-2 참조)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가 받은 가장 중요한 은사가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사·제대 입맞춤·십자성호 등으로
하느님의 현존 청하며 찬양하는 것
‘진심’이 담긴 태도와 자세가 중요
미사 거행을 위해 입당한 사제는 주님께 대한 공경과 사랑의 표시로 제대에 입을 맞춘다. 사진은 2014년 8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봉헌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심리학자 메라비언(Albet Mehrabian)은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 시각이 55%, 청각이 38%의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정작 전달하고 싶은 말의 내용은 고작 7%라고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각과 청각의 비언어적 표현을 읽어내는 시간은 0.1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입술을 통해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 자세와 태도 등으로 대부분이 이미 전달된다는 것이지요. 말보다는 동작과 자세와 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소통 방식은 이미 미사에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사 거행을 위해 입당한 사제는 제대 인사, 십자성호 그리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의 동작, 그분의 현존을 청하는 인사말을 통하여 미사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참된 희생 제사인 미사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잔치라는 사실을 교회 공동체는 영혼 가득한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입당 성가와 함께 복사들과 행렬을 지어 제단 앞에 온 사제는 참된 사제이며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에 인사를 한 후, 제단에 오르고 주님께 대한 공경과 사랑의 표시로 제대에 입을 맞춥니다. 이 관습은 4세기 말경에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아 도입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큰 절로 대신하지요.
입당 성가가 끝나면 사제와 교우들은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을 합니다. 십자성호는 14세기에 사제가 제대 앞 층계에서 복사들과 함께 바치는 이른바 층하경을 시작하는 기도로 미사에 도입되었습니다. 2세기경 교회 예식에 들어온 십자성호는 입교 예식에서 주례자가 예비신자의 이마에 작은 십자가를 표시해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현재와 같은 큰 십자성호는 5세기경에 나타났지만 널리 보급된 것은 13세기부터입니다.
현재의 미사 통상문에는 세 가지 인사 양식을 제시합니다. 첫째 양식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3장 13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사용한 인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둘째 양식은 사도 바오로가 편지 서두에 자주 사용한 전례적 인사에서 유래했지요.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로마 1,7; 1코린 1,3; 2코린 1,2; 갈라 1,3 등 참조) 셋째 양식인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는 신약과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인사이며(판관 6,12; 룻기 2,4이하; 1열왕 17,37; 루카 1,28; 2테살 3,16), 미사에 도입된 시기가 3세기 이전이라는 사실을 3세기에 기록된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 4장과 25장에서 밝혀줍니다.
이러한 사제의 인사에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Et cum spiritu tuo)라고 답하지요. 2017년 이전의 미사 통상문에서는 ‘영’(spiritus)이 없는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전통과 교부들에 의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영’이 사제 개인의 ‘영혼’이 아니라 서품식 때 받은 성령과 그 성령께서 주시는 직무 수행의 은사를 가리키는 것임을 확인하고 교황청에서 ‘영’을 꼭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습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성호를 긋고 사제와 인사를 나누면서, 습관적인 태도가 아닌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예레 32,41), 곧 ‘진심’이 담긴 태도와 자세, 그리고 목소리는 미사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이끌어줍니다.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불편해 하는 감정이 분노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화를 내면 손가락질을 당하고 본인도 깊은 자괴감에 빠집니다. 분노가 영성생활의 적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인지 가톨릭교회의 성인화를 보면 대부분 아주 온유한 얼굴만을 그린 것을 알 수 있고 심지어 주님조차 착한 어린 양이나 저항하지 않는 온유한 분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실제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성 신학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생활을 마치 분노를 없애기 위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도 오랫동안 지속돼 왔습니다. 그런 바람에 고해소에서 화를 냈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줄줄이 생기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분노란 무엇인가? 심리적 배설물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습니다. 그리고 먹고 나면 당연히 배설물이 생깁니다. 이처럼 분노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결과물이란 것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늘 마음에 맞는 사람만 만난다면이야 별일 없겠습니다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만나기 싫은 사람도 억지로 만나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다 포용하고 이해하며 산다면 좋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뿐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분노라는 파도에 휘둘림당하며 삽니다. 따라서 분노를 억지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에 역행하려는 시도입니다. 억압을 할 경우, 우리말로 삭힐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 후유증이 작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종교에서는 분노를 없애라고 하지 않고 직시하라고 합니다. 또 분노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보라고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잘 삐지는 나, 분노가 일어나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자신을 보면서 겸손함을 배우라고 합니다. 더불어 분노가 사람 마음 안을 정화시키는 기능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태풍이 바다 속을 물갈이 하듯이 분노가 사람 마음 안의 온갖 허상과 허세들을 물갈이 한다는 것입니다. “난 분노가 하나도 없어요~” 하는 분들은 성인이 아니라 정신적 문제가 있거나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성격장애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일·축일 ‘가·나·다’해 3년 주기
연중 평일 ‘짝수·홀수’해 2년 주기
다른 평일엔 매년 같은 독서 배정
‘주제의 조화’ ‘준연속 독서’가 원칙
「미사 전례 독서와 묵상」 총 다섯 권. 미사 독서는 ‘주제의 조화’와 ‘준연속 독서’라는 두 가지 기준에 따라 신·구약 성경의 중요한 부분들을 배정한다.주교회의 미디어부 제공
‘어? 어제 읽었던 부분 다음 내용이네?’
며칠간 연달아 미사에 참례해 보셨다면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독서가 매일 이렇게 이어진다면 매일 미사를 드리면 성경을 거의 다 읽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더 예리한 관찰력이 있으신 분이라면 「매일미사」나 교회 달력이 가·나·다해로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텐데요. 그럼 3년 동안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 성경 대부분을 읽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미사 독서 목록 지침」을 살펴봤습니다. 1969년 발행된 이 지침은 전례, 특별히 미사를 거행할 때 성경이 어떻게 선포돼야 하고 언제 성경의 어느 부분을 봉독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사 독서를 배정하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주제의 조화’와 ‘준연속 독서’입니다. 주제의 조화란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이 특별히 복음과 어울리도록 독서를 배정하는 방식입니다. 준연속 독서는 완전히 연이어 읽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경의 순서에 따라 독서를 읽는 것을 말합니다. 주로 대림·사순·부활 시기 같은 전례 시기는 ‘주제의 조화’가, 특별한 주제에 집중하지 않는 연중 시기에는 ‘준연속 독서’가 강조됩니다. 우리가 ‘독서가 이어진다’고 느낀 것은 바로 미사 독서 배정에 ‘준연속 독서’가 반영됐기 때문입니다.
지침에 따르면 주일·축일의 경우는 가·나·다해, 3년을 주기로 미사 독서가 배정됩니다. 평일은 해마다 같은 독서를 봉독합니다. 다만 34주간 이어지는 연중 시기의 평일 제1독서는 짝수·홀수해 2년 주기로 반복됩니다.
이렇게 각각 3년과 2년 주기로 반복되는 미사 독서 배정을 보니, 일단 신약은 거의 대부분을 읽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음은 물론이고 서간과 묵시록도 주일 제2독서와 평일 제1독서 중에 대부분 봉독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경우는 ‘대부분’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구약의 방대한 양을 독서에 다 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를테면 구약을 준연속으로 읽는 연중 시기 평일 독서목록을 보면 42장에 달하는 욥기는 1년 중 1주간 동안만 배정됐습니다. 이 목록에는 일부 짧은 예언서들이나 너무 긴 부분을 읽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성경들도 빠졌습니다. 목록에서 빠진 성경들은 다른 전례시기나 주일에 일부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대부분의 내용은 봉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례 중 구약을 다 읽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시지 않아도 괜찮겠습니다. 미사 독서에는 성경의 중요한 부분은 모두 담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대림 시기 등에는 주일과 평일 독서가 겹치기도 하는데, 중요한 부분이기에 중복되더라도 빼놓지 않고 읽기도 합니다. 특히 지침은 “주일 미사에 참례하면 구약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거의 모두 들을 수 있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3년 동안 매일 미사를 드리면 성경의 ‘대부분’까진 아니더라도 중요한 부분은 다 읽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함께 모인 이들의 일치 굳게 하고
전례 시기·축제 신비로 마음 이끌어
성가 대신 입당송 바치는 것도 가능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124위 시복식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해 추기경·주교단이 입당하고 있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입당’하면 아무래도 행렬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저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입당 행렬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 미사에서의 교황님과 추기경단의 행렬입니다. 당시 저는 전례 실무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미사 시작 10분 전에 미사를 시작하라는 교황청에서 파견된 전례 담당자의 사인을 보았습니다. 시계를 가리키며 ‘아직 행렬 출발 시간이 안 되었다’고 하니, ‘교황님이 준비되었으니 바로 시작하라’는 답변이 왔지요. 그래서 정한 시간보다 일찍 시복식 미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2시간 전에 모두 들어와서 준비하고 있는 신자들을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교황님의 사목적 배려가 느껴지는 입당 행렬이었지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입당 성가나 입당 행렬을 포함한 시작 예식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집에서 주일 모임(사도 2,46 참조)을 해야 했으며, 잦은 박해로 인하여 몰래 모여서 성찬례를 거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3세기의 문헌인 유스티누스의 「호교론」(제1권 67장 3절)과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22장 8절)에 따르면 미사는 집전자의 인사와 독서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313)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자유가 주어지고, 황제의 배려로 대성당을 짓게 되면서 서서히 박해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격식을 차린 예식을 장엄하게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로 거행되던 시작 예식을 정비하고 고정시킨 것은 16세기의 트리엔트공의회 직후 비오 5세 교황이 반포한 「로마 미사 경본」(1570)부터였습니다. 이 「로마 미사 경본」은 오직 사제에 대해서만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전례 개혁이 반영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로마 미사 경본」(1970)에서 입당에 대한 첫 마디가 “교우들이 모인 다음 사제가 부제와 봉사자들과 함께 들어올 때 입당 노래를 시작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7항)로 교회가 교우들의 모임을 우선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입당 성가는 언제 도입되었을까요? 「주교 실록」(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입당송은 첼레스티노 1세 교황(423-432)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더욱 분명한 증거는 5세기 이래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정기적으로 일곱 교회를 돌면서 ‘순회미사’를 거행할 때, 라테라노 대성당 옆에 있는 교황궁에서부터 행렬하며 부른 속죄대송과 ‘기리에’ 호칭기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렬을 하면서 성가를 부르는 것이 점차 정착되고, 주교와 사제의 집전 미사에도 적용되어 결국 모든 미사의 기본 절차가 되었습니다.
입당 성가는 본래 입당 행렬에 맞추어 시작하고 마치는 것이지만, 요즈음처럼 입당 행렬의 시간이 짧은 경우에는 “함께 모인 이들의 일치를 굳게 하며, 전례 시기와 축제의 신비로 그들의 마음을 이끌고, 그들을 사제와 봉사자들의 행렬에 참여시키는 목적”(「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7항)을 고려하여 입당 성가를 2절까지 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입당 성가를 부르지 않으면 입당송을 해설자의 인도로 신자들이 함께 하거나 사제가 직접 낭송합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8항 참조) 입당 행렬에 동반하는 입당 성가 또는 입당송은 미사에 참석한 모든 이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행렬에 동참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싫은데도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
자기감정 억눌러 분노 근육 퇴화
혼자서 ‘아니오’ 말하는 훈련 해야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고, 분노도 유용한 면이 있습니다. 분노는 자기보호 기능을 갖습니다.
시골 동네에 똥개 한 마리가 있습니다. 동네 아이들의 분풀이 대상입니다. 엄마에게 야단맞은 놈들이 길을 가다가 똥개들을 보면 발로 찹니다. 아무 이유 없이 말입니다. 그렇게 매일 얻어맞던 똥개 한 마리가 결심을 합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놈 발목을 대차게 물고 죽어야지!’
어느 날 아침 자기를 건드리는 동네 개구쟁이 발목을 힘차게 뭅니다. 아이는 울며불며 동네방네 소문을 냅니다. “그 똥개 건드리지 마세요! 성질 사나워요!” 그러면서 그 후로 건드리는 놈이 아무도 없답니다.
상담소를 찾아오는 분들 중 상당수가 신경증 환자들입니다. 싫은데도 싫다고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 갖고 싶은 게 있어도 갖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탓부터 하는 사람들, 누가 무리한 청을 해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성인군자같이 보이는 이런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억누르고 사느라 그 속이 말이 아닐 정도로 엉망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화를 낼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사용하질 않아서 ‘분노 근육’이 퇴화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의 힘이 약해서 쉽사리 무너지고 힘들어합니다.
이런 분들은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가? 화를 내는 훈련, “아니오”라고 말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매일 훈련을 하면 조금씩 마음에 힘이 생기고 거절하는 힘과 부당한 것에 항의하는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삶이 시작되는 느낌이 생깁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본당에서 했더니 항의 문자가 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자들을 망가뜨리지 말라고요. 그런 문자를 보낸 분들은 대개 문제가 생기면 남의 탓을 먼저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종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는 작업에 제동을 걸고 항의를 합니다. 심지어 복음을 들이대면서!
주님은 사람들을 자유인으로 살게 해 주려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살면서 자신이 주님의 뜻대로 사는 양 합니다. 신경증 질환에 시달리는 분들은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시고 자기감정, 특히 분노감정 훈련에 집중하셔서 자기 삶의 권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가톨릭신자는 가톨릭 성직자에게서만 적법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기에, 성공회와 정교회에서 성체를 모실 수는 없다. 사진은 대한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내부.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공회와 정교회는 우리 미사처럼, 예배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는 성체성사를 집전합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성공회나 정교회에서도 성체를 모실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성공회 같은 경우에는 어쩐지 성체를 모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배도 미사와 비슷하고 제병도 가톨릭교회처럼 누룩 없는 면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볼 때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 빵의 온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온 실체가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한다”(트리엔트공의회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고 가르칩니다.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 성공회는 성사적 임재(臨在)를 말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바뀐다고 보지는 않지만,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정교회의 경우 가톨릭교회처럼 실체변화를 믿지만, 가톨릭교회와 달리 누룩이 들어간 빵을 성체로 축성합니다. 예수님이 성찬례를 제정한 것이 파스카 축제일에 일어났는지 아닌지에 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것을 기념하는 날로, 유다인들은 이날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체성사를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어,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가 미래 영광의 보증을 받는 파스카 잔치”(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 47항)라고 강조합니다. 이집트 탈출 때 어린 양을 바쳤듯이,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친 예수님을 기억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질문의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가톨릭신자는 성공회와 정교회에서 성체를 모실 수 없습니다. 가톨릭신자들은 가톨릭 성직자에게서만 적법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교회법 제844조 1항) 다만 성공회와 정교회 신자들과 함께 성체성사를 기억하고 빵을 나누는 일은 가능해 보입니다.
대한성공회의 여러 성당들은 가톨릭신자가 성공회 예배에 참례한 경우 성공회의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곤 합니다. 대한성공회 교무원 총무국장 나성권(시몬) 신부님은 “공식적인 입장으로 성사 교류는 되지 않지만, 대한성공회는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라면 성공회에서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전했습니다.
성체를 실제 예수님의 몸으로 믿는 정교회의 경우 예배 중 정교회 신자가 아닌 이는 빵을 나누지는 못합니다. 다만 예배가 끝난 후 성직자가 ‘안디도로’라는 축복 받은 빵을 나눠준다고 하네요. 안디도로는 성체는 아니지만, 축복된 빵으로 경건하게 여깁니다.
한국정교회 박인곤(요한) 사제님은 “안디도로는 성체성혈이라는 큰 선물을 받지 못하는 분들에게 선물 대신 주는 축복된 빵”이라면서 “누구나 안디도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감정… 감정은 마음 근육
몸처럼 마음 근육도 골고루 써야
성인들은 분노를 열정으로 승화
종교인들 중에서 종종 마음 안의 분노를 없애라고 하면서 자기는 마치 분노가 없는 양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종교 사기꾼’들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자부하는 분이 계시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거나 성격장애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몇 해 전 상담하러 오신 자매님 한 분이 조심스레 “제가 우리 영감을 보고 욕을 했는데 죄가 되나요?”라고 물으시더군요. 사연인 즉 영감님이 자린고비라서 자매님에게는 오로지 생활비만 주신답니다.
자매님이 미국에 사는 딸이 보고 싶다고 해도 ‘돈 없다고 딱 잘라 버리는 돈 많은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꿈에서 딸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데 새벽 약수터에 나가는 남편이 “나 지금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서 꿈이 깼는데 너무나 화가 치밀어서 문짝에다 대고 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보속을 달라고 하시기에 하루에 한 번은 꼭 문짝에 대고 욕을 하시라고 했습니다.
분노란 무엇인가? 감정입니다. 감정이란 마음의 근육이라고 합니다. 몸이 근육으로 돼 있듯이 마음도 근육으로 돼 있는데 이 마음의 근육인 심근을 감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몸의 근육을 골고루 운동시키듯이 마음의 근육도 골고루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오래전 교리공부를 하신 분들은 분노를 죄악시해서 아예 참거나 삭히거나 해서 신경증을 유발하고 심지어 정신적인 문제에 봉착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일부 열성 신자들이 분노는 내 안에 분노마귀가 들어온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신자분들이 심리적으로 강박불안에 시달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성인들은 아무런 분노 없이 사셨다고 강변하셔서 신자들에게 신앙적 열등감을 심어 주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잠재우기 위해서 데레사 성녀의 이야기를 해 드릴까 합니다.
데레사 성녀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스페인 순례를 가서 그분의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초상화였습니다. 아주 매섭고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분의 일대기는 더 놀라웠습니다. 신자들과 마차를 타고 가다가 마차가 옆으로 넘어졌다고 합니다. 겨우 기어 나온 신자들이 하늘을 향해 성호를 긋고 감사기도를 하는데 데레사 성녀가 나오더니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하느님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항의를 하시더랍니다.
수도자가 마음이 약하면 수도생활을 못한다고 하며 당신의 분노 감정을 수도원 개혁에 쏟으셨던 데레사 수녀님. 분노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을 가진 분들이 귀감으로 삼을 분입니다.
가톨릭과 성공회 주교들이 1월 26일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을 순례하고 있다. 이는 ‘일치와 선교를 위한 국제 성공회-가톨릭 협의회’가 후원하는 로마와 캔터베리 순례의 마지막 여정이다. 사진=OSV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를 이단이나 우상 숭배로 몰아대는 개신교 신자가 적지 않습니다. 이는 잘못된 교육과 상호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개신교 신자와의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천주교를 비난하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개신교 신자가 속한 교단이 천주교를 비난한다면 그것이 교리 문제인지 천주교 신자들의 삶에 대한 비판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가 왜 그렇게 비난하게 되었는지 들어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만일 교리에 대한 문제라면 상대 개신교 신자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교리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개신교 신자의 질문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설픈 설명으로 오히려 오해만 부추길 수 있기에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필요하다면 교리에 대한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얻어 전해 줄 수 있고, 최근에는 인터넷과 유튜브 등에 참고가 될 만한 좋은 글과 영상들이 많으므로 이를 찾아 전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에 대하여 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주제는 천주교의 성모님 공경에 대한 문제입니다. 천주교가 성모님을 믿으며, 여러 성상 앞에 절을 하는 행위를 우상 숭배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화하는 상대방이 천주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설명을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상 숭배와 성상 공경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27항 참조) 그러나 논쟁을 위한 대화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집요할 정도로 교리 논쟁을 하는 개신교 신자를 만나면 교리 논쟁보다는 서로의 신앙 체험을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서로 처음 신앙을 가지게 된 동기나 교회 생활에서의 특별한 은총 체험이나 신앙 간증 등을 나누는 것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공감을 이루는 좋은 영적 교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가진 개신교 신자를 만나는 경우, 그 오해가 교회의 구성원에 대한 비난이라면 지혜롭게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야기한 ‘죄인이나 의인’이라는 용어를 활용하여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부족한 인격적 결함을 서로 보충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상기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비난의 대상이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누군가의 인간적인 약점을 비난한다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참된 일치는 서로의 차이를 약점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함께 공감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으로 간직해 온 신앙의 유산을 함께 찾고, 기회가 될 때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한다면 우리는 일치의 여정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