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 20181227 다해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 축일(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2018-12-27 18:39:58
박윤흡 조회수 730

  오늘 교회는 요한 사도를 기억합니다.

요한은 12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갈릴래아의 어부였으며 대 야고보와 함께 제베대오의 아들이었습니다.

사실 매일미사 책에 나온 ‘오늘의 묵상’에 요한 사도가 누구인지 잘 나와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꼭 참조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은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3-8)

 

  복음은 두 사람이 함께 나란히 달린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합니다.

요한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주님께서 사랑받는 제자’로 복음에 잘 표현되어 있어요.

요한은 너무나 사랑했던 스승님을 만나기 위해서 발에 피가 나도록 뛰어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열망이 담겨져 있는 것이죠.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먼저 도착했지만 베드로보다 앞서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어주십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고 살아갈 때에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톨릭교회는 가르칩니다.

베드로는 이런 교회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저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분명 주님을 사랑했지만, 베드로에게 그 자리를 내어줍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의 가르침과 식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요한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사랑하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지도 않았을뿐더러 2,0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속되어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선, 교회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영성서적과 교회의 문헌,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교황님의 문헌들을 꼭 읽으셔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만의 방식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해야 그 관계가 오래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 또한 나만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과 교회의 방식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우리는 하느님 다음으로 이 가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삶으로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며,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범계성당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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