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 20180311 나해 사순 제4주일
2018-03-10 09:58:38
박윤흡 조회수 1237

  강론을 준비하면서 구글링(Google)을 했습니다. 

‘생명’을 검색했는데 ‘구리뱀’이미지가 나왔어요.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국제 환경 경영 네트워크(INEM)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이 협회의 목적을 찾아봤는데 총 3가지가 나왔습니다.

 

1. ‘환경, 특히 물, 토양 및 공기의 보호 뿐 아니라 동식물의 생태적 피해로부터 보호’

2. ‘인간 건강의 보호’

3. ‘과학 및 환경 보호 분야 연구’

 

한 마디로, 이 협회는 ‘구리뱀’을 상징 이미지로 내걸고 ‘생명’과 ‘인류 보호’라는 대업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그래서 그 장면을 찾아 봤어요. 민수기 21장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5-9)

 

 

 

  모세가 들어올린 뱀은, ‘생명이 샘솟는 우물’이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죄악과 죽음의 그늘로 빠져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결단이었어요.

하느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런데 하느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셨어요.

 

  오늘 복음 말씀은 하느님께서 악으로 빠져드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면서

직접 이 세상에 침투하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대론 안되겠다! 내가 가야겠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이제는 표징과 상징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 그 분이 몸소 우리와 같은 이 육신을 취하셔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신비인가요?

그런데 왜 오셨을까요?

 

 

  언젠가 제가 이 세상에는 ‘두 개의 깃발’이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선한 영의 깃발’과 ‘악한 영의 깃발’.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자꾸만 이 악한 영의 깃발을 선택하는 거에요!

구리뱀 사건에서 본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것이죠.

 

  1독서 역대기 하권도 이렇게 전합니다.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고,

주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서 성별하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를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2역대 36,14.16)

 

  그런데 이 이야기는 비단 구약의 신화처럼 오랜 시간 전의 이야기라고만 할 순 없습니다. 

뉴스 기사나 세상의 이슈들을 보면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들이 다수를 이룹니다.

어떻게든 비방하고 손가락질하고 깎아 내리고..

온통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은 ‘죽음의 문화’를 홍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정말이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 땅에 살아야 되나? 여기.. 희망이 없어 보이는데..?’

 

  묵상 중에 사도 바오로의 구구절절한 고백이 떠오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닐까.

서로 반목하고 냉담하고 시기 질투하며

하느님을 등지고 배려없이 이기심만 쫓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세상에

‘희망’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겠는가.

2독서의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 2,4-5)

 

  ‘생명과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

 

  그렇다면, 단지 ‘희망하는 정도로 그쳐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움직이는 하느님의 교회인데 나의 정체성을 뭘까?’ 질문하게 됩닌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우리의 몫에 대한 이야기겠지요.

 

  2독서에 사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

 

  문득, 강론의 서두에 언급했던 ‘구리뱀’이미지를 내건 ‘국제 환경 경영 네트워크’가 떠오릅니다. 생명, 보호, 사랑, 희망...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작품’인 내가 이 세상을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스케치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색칠해나가는 작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일상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 연습을 묵상하는 사순 제4주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으로 오늘 강론을 갈무리하고자 합니다.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이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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