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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예수님의 단순하고 참된 언어" - civilta catholica(교황청 잡지) - 디에고 파레스 신부(예수회)
2018-02-15 10:46:00
박윤흡 (missa00) 조회수 1275

예수님의 단순하고 참된 언어
기만적 담화를 식별하기 위한 도움

 

IL LINGUAGGIO VERITIERO
E SEMPLICE DI GESÙ
Aiuti per discernere i discorsi ingannevoli*

디에고 파레스 신부(예수회)**
이창욱 펠릭스(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원 성서학 석사) 옮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쉬운 표현을 사용하셨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생활의 예화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흔쾌히 경청했고 그들의 마음 안에 파고들었던 그분의 메시지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메시지는 당대의 율법학자들이 사용했던 이해하기 복잡한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말은 잘 이해되지 않았고 매우 엄격해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운 말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복잡한 신학이 아니었습니다.”1) 지난여름 주일 삼종기도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예수님의 언어에 관한 성찰을 시작으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단순한 언어는 마음에 바로 와 닿지만, 이와 반대로 엄격한 신학의 복잡한 언어는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교종은 말했다.

  두 가지 언어에 관한 식별의 기준은 명확하다. 예수님의 사랑에 바로 다가서게 만드는 언어는 ‘선한 영’에서 비롯되고, 예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언어는 ‘악한 영’에서 나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좋은 밀 씨앗이 아니라 해로운 가라지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직접 건드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일부 미디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때때로 교회와 교종을 공격하는 글들을 읽게 된다. 이런 글들은 교회와 교종을 모두 공격하는 것이다. 어떤 이가 교회를 공격하면서 교종을 방어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의 가르침을 옹호하기 위해 교종을 비방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복잡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권력을 얻기 위한 음모, 고위성직자들 사이의 독설, 교황청 내부의 알력, 물의를 일으키는 사목적 또는 정치적 실수, 가톨릭 교리에 대한 위협 등과 같은 제목들은 아주 분명하고 직접적인 표현들이다. 그러나 가라지가 처음에는 좋은 밀과 비슷한 것처럼, 비록 그들의 표현이 비슷할 수는 있지만, 이런 유치한 어투는 선한 영에서 비롯된 단순한 언어가 아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한눈에 이런 것을 분별한다. 가라지가 있다면, 그것은 원수가 그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마태 13,28 참조) 그러나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같이 뽑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추수 때가 오기 전에 가라지를 모두 뽑아버리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너무 많이 자란 풀들이 좋은 밀을 숨 막히게 할 때는, 밀에 필요한 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풀을 약간 잘라내야 한다. 어떤 토론에서 목소리 톤이 너무 높아지고 상처를 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할 때,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를 원한다면 목소리를 낮추고 “언어를 돌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추잡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말하고 있는 사건 자체가 추잡하기 때문에 그런 언어를 사용한다고 정당화한다. 만일 이러한 정당화가 훌륭한 것이라면, 교종이 바티칸 안에 부패가 있다고 단언할 때나 스캔들을 단죄할 때 똑같은 일이 발생했어야만 한다. 그러나 진리는 단지 ‘사실’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누가 듣거나 읽는지 신경 쓰지 않고, 아무나 주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실’만으로 진리를 구성할 수 없다. 이런 종류의 뉴스에 관한 일부 논평을 분석해보면, 무엇보다 “진리의 광채”를 공격하는 특정 형식의 언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큰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돌보는 것은 지구 공기의 질을 돌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와 같은 언어에 대한 보살핌은 합리적인 담화를 구상하는 데 필요한 개념과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며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서로를 주의 깊게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공적인 담화가 진행되고 보호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닌 상호 존중의 태도 덕분이다. 이는 테러 행위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책임지는 군대가 공공장소를 보호하는 통상적인 방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인 담화는 언어를 악용하지 않고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지한다. 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더럽히지 않고 자신도 오염시키지 않으려는 선택은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식별력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언어의 정교함을 고려한다면, 언제 기만적 담화가 이루어지는지 분명히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거짓으로 남을 속이려는 담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악의적인 개념이나 이미지를 암시하기 위해 경박한 언어를 분명하게 사용하며 ‘가십성 기사’를 다루는 잡지와 같은 장르부터,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기 위해 악마가 성경을 사용한 것처럼 그리스도라는 육화된 진리를 혼란시키고 왜곡시키기 위해서 신학적인 개념과 같은 진지한 언어를 사용하는 장르까지 다양하다. 이런 형태의 기만적 담화를 통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일관된 태도에서 그의 경건함이 속임수라고 호도할 수 있는 꼬투리를 찾으려고만 애썼다. 그래서 자기 안전이 신앙인 양, 소유가 희망인 양, 자기중심주의가 사랑인 양 행세하였다.”2)

진리의 정신으로 진리를 말할 것

  이렇게 언어를 식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한 여정에서 우리는 성 이냐시오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초기 예수회 동료인 성 베드로 파브르가 제시한 몇 가지 기준을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냐시오에 따르면, 파브로는 최고의 영신수련 지도자요 영적 대화와 식별의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 대화할 줄 알았고 반대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설득하는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가 설명한 첫 번째 기준은 다음과 같다. “미사 동안 또 다른 열망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즉 거룩하고 선하신 성령의 중재를 통해서 내가 해낼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실행해야만 한다는 열망입니다. 그리고 이단들3)이 교회 안에서 개혁을 행하는 방식을 하느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악마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실제로 참된 것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성령이신 진리의 정신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4)

  베드로 파브르는 “참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진리의 정신, 곧 성령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그 참된 내용으로 실수나 악행을 구체적으로 고치도록 돕기를 진실로 원했다고 볼 수 있다. 실천적인 면에서 파브르는 ‘진리’를 세 가지로 구별한다. 즉 참된 것(사실), 진리의 정신(다시 말해서 ‘참된 것’을 말하는 정신 자세), 그리고 삼위의 한 위격으로서 진리의 성령이다. 물론, 사실의 진리와 진리의 성령 사이에 진리의 정신 또는 ‘선한 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진리의 정신은 죄를 포함한 삶의 사실들을 만사를 선으로 인도하는 은총과 연결시킨다.

  어떤 것이 참된 것인지 또는 거짓된 것인지 판단할 때 이런 종류의 식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유익하다. 어떤 담화의 역할을 고려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담화 전체 또는 담화에 사용된 개별 단어들이 성령에 따라 선을 위해 사용된 것인지 여부이다. 다른 한편, 담화 전체에서 혹은 어떤 부분이 선한 영의 활동을 방해하거나 악한 영의 활동을 강화하지는 않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담화의 역할을 가늠해야 한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며 타인을 평가하기 위해 ‘악당’과 같은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스승은 그 제자에게 웃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이 말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이때 주님께서는 형제에 대한 모욕과 경멸을 엄중하게 단죄하신다는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이 제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제자는 자신의 언사가 악한 영에 의해 ‘시험을 받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렇듯 적절치 못하게 사용된 말에서 악한 영이 존재하고 있음을 식별할 수 있다. 비록 객관적인 사실과 그럴듯한 추론으로 짜여진 논쟁일지라도, 어떤 형제를 향해 화를 발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논쟁을 부추기는 것은 나쁜 영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선한 영으로 말한 진리와, 성령이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어주거나 악을 고치기 위해서 이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결하는 것이 핵심 과제이다. 이를 부정적인 관점으로 말한다면, 내용의 진위를 떠나서 악한 영에 의해서 표현된 문장과, 성령이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어주거나 악을 고치기 위해서 이를 사용할 수 없음을 연결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이러한 식별은 또한 사실 인식에서 출발해서 언어적 표현에 이르는 과정을 고려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듣고 있는 연설이 참되다는 분명한 표지는 자기 안에 선을 향한 이끌림이 생기거나 자기 삶에서 어떤 잘못된 것을 고쳐야할 필요를 깨닫는 현상이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단순한 언어를 듣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같다. 성령께서는 이런 언어를 합당한 사용 범위 안에서 축복하셨다. 또, 어떤 순간에 교회의 삶과 한 개인의 삶을 인도하기 위해 성령께서 이런 언어를 사용하시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특정 텔레비전 방송을 보거나 신문 기사를 읽을 때처럼 우리 안에 선을 행하려는 열망이 가로막히고 구체적인 문제 해결 가능성에 대한 불신과 어둠이 떠오른다면, 기만적 담화가 진행 중이라고 인지할 수 있다. 그런 말들은 성령의 선한 활동을 가로 막기 때문에 성령을 슬프게 만든다.

  어떤 함정을 무해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우선 그 함정을 전체 안에서 식별해야 한다. 뇌관을 제거하려고 손을 대면 폭발해버리기 때문에 해체할 수 없는 폭탄처럼, 어떤 담화는 분석할 수가 없다. 그런 담화는 단지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악이 스며들고 퍼지게 하려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영혼을 해롭게 하는 언어다. 이런 경우에, 그 독이 든 언어를 멀리하고 그 독을 삼키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이 유일한 상책이다.

  참된 것을 진실하게 말하는 것과, 참된 것을 비웃음과 분노와 경멸을 담아 말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작아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생활의 실제에서 이 차이는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온화함과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진리를 말하면서 내민 손은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반대로 존중하는 마음 없이 냉소적으로 내뱉는 진리는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아서 상호 이해와 대화를 가로막는다.

  어떤 사람이 참된 것을 말할 때 지니는 영은 자신이 참된 것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쁘게 말하는 것은 나쁘게 생각하고 나쁘게 보게 만들고 결국 눈을 멀게 한다. 공격적이고 거짓된 언어의 사용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흐리게 만든다.

  근본적으로, 진리는 ‘사실’ 혹은 ‘추상적인 정의(definizioni astratte)’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존경심과 친밀함을 담은 태도는 진리를 이루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런 태도로 말을 할 때 사람들을 진리의 광채로 이끌 수 있고, 결코 악이 아니라 선을 실천할 수 있게 한다. 우리 모두는 의도적으로 사용된 냉소적인 말투나 시선이 얼마나 치명적인 독성을 지니고 있으며 너무나 평화롭고 순수한 진리를 완전히 뒤집어서 어떻게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는지 경험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을 따르는 진리의 정신으로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

‘보다 작은’이라는 함정

  성 베드로 파브르는 진리의 성령에 따라 말하는 방식을 식별하기 위한 두 번째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는 성령의 영향 하에서 하느님의 일을 바르게 말하도록 가르쳐 주십사 주님께 청했다. 그리고 ‘보다 작은’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하지 않고 전달할 때, 자신의 말에 그가 받았던 은총의 효과를 없앨 수 있는 요소가 들어 있음을 느꼈다. 파브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서나 다른 이들을 위해서, 이전에 통찰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선한 영에 이끌려 말할지 가르쳐주시기를 [주님께 청했습니다]. 사실 처음에 느꼈던 통찰을 가져다 준 영에 주목하지 않은 채, 나는 계속해서 말하고 글을 쓰고 많은 양의 일들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전에 마음에 동정심과 내밀한 고통을 일으켰던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체험을 들뜨고 익살스러운 마음으로 가까운 이들에게 표현해 버렸습니다. 내가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 보다  선한 영에 따라 그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사람은 더 작은 결실을 얻었습니다.”5)

  파브르는 이런 결과를 은총을 받아들였을 때 지녔던 영보다 ‘덜’ 선한 영으로 그 은총을 표현한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 선함이 더 작아진 원인을 ‘어조의 변화’로 간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전에 자신의 내면에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을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담화의 형식이 있다. 이는 실제보다 ‘더 작은’ 것으로 여겨지도록 ‘더 큰’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축소시키는 담화 방식이다. 다른 사람을 평가절하하고 손상시켜서 ‘작게 만드는’ 방향으로 어조와 논조를 변화시키는 표현이 여기에 해당한다. 중요한 일, 심지어는 거룩한 일에 대해서 단순하고 축소된 방식으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성 이냐시오는 악한 영이 항상 최대 악을 찾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별 규칙으로 이런 형태의 유혹을 설명했다. “만일 떠오른 생각이 나쁜 일로 끝나거나 무의미하게 끝나거나, 또는 그 영혼이 처음에 행하려고 결심했던 것보다 덜 좋은 방향으로 끝이 난다면, 혹은 처음에 지니고 있던 평화와 안정과 고요함을 앗아가면서 그 영혼을 약화시키거나 불안하게 만들거나 또는 혼란스럽게 한다면, 이는 그 생각이 악한 영에서 나왔다는 분명한 표지이다.”6)

  더 나아가, 만일 더 큰 악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종종 이 ‘보다 작은 악’을 의도적으로 찾는다. 교종과 교회에 대한 담화에서 이런 의도가 자주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독을 마시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보다 작은 악을 지향하면서도 타인의 마음에 “들어가는 데” 효과적인 표현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 선(善)의 축소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 이 선의 축소를 우리가 읽거나 듣는 담화의 어조에서 나오는 “잡음”에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통계자료에 따르면, 4년 동안의 교황직을 수행한 후에 조사된 프란치스코 교종에 대한 대중성 지표는 전 세계에 걸쳐 “아주 높게”7) 유지됐다. 그의 조국에서도 교종의 이미지는 대단히 긍정적이다.8) 그럼에도, 일부 지역 미디어 자료에서 “교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고 아주 실제적으로 소개됐다. 통계자료에 대해 언급한다면,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 안에 프란치스코 교종에 대한 사랑이 전혀 감소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떤 이가 “교종에 대해서 지금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말하는 것이 싸움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방식이 제법 퍼져 있다. 이런 것이 “보다 작은” 속임수에 해당된다.

  이러한 유혹을 프란치스코 교종이 정치하는 방식을 다루는 담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교종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랑의 가장 고차원적인 개혁으로 ‘정치 회복’을 항상 추구해왔음을 기억하자.9) 이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교종은 모든 것이 정치이고, 강론까지도 그렇다고 단언했다. 폴리스(polis)라는 단어로 표현된 모든 것, 즉 공동선을 다루는 모든 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다. 과연 누가 공동선를 추구하는 고차원적인 정치를 칭송하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봉사에 전념하는 대신에, 정치의 ‘최상위’에서 움직이는 숫자상으로 소수에 불과한 권력자들, 말하자면, 돈의 권력, 군사력과 테크노크라시(기술관료제)의 권력자들만이 거기에 관심을 둔다.

  동시에, 실천적인 차원에서 교종은 많은 이들의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되고, 수많은 대화의 시도를 통해 분쟁 중에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해왔다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과연 누가 분쟁에서 그와 같은 중재역할의 중요성을 실추시키는 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오로지 대화와 민주적인 합의가 아닌 다른 해결책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만이 그럴 것이다.

  여러 선과 가치들 사이의 위계를 기억하고 해석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더 작은 선이나 가치를 제시할 때 이를 식별할 수 있고, 악한 영의 정체를 폭로하는 부조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맥락에서 가져 온 논리와 이미지를 통해 선의 일부를 도둑질하려는 목적을 지닌 담화가 있다. 예를 들면,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면서 심리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담화는 그 순간에는 잠시 빛을 낼 수 있지만, 머지않아 이런 시도가 어떻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초점을 흐렸는지 드러나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아주 대중적이고 인기가 있지만 효과적인 방식으로 통치하지는 못하는 교종이라는 이미지를 퍼뜨리려는 기사가 최근에 발표됐다. 그 기사는 이전과 같이 산타 마르타의 집 식당의 중앙에서 식사하지 않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 채 구석에 앉아 단지 소수의 엄선된 사람들과 식사하는 교종의 모습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만들어내다’라는 동사를 사용한 이유는 이러하다. 비록 그런 모습을 포착한 사진 한 장이 존재할지라도, 맥락과 동떨어진 채 보여질 경우 참된 사실을 반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1,500번 이상이나 점심식사를 했던 것이 실제 역사이다. 교종은 항상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삶을 나누기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늘 식당의 중앙에 앉았다. 그러다가 그가 식당에 들어올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서 일종의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교종은 같은 공간에 계속 머물지만,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알맞은 자리를 찾았다. 사실 교종은 이미 몇 년 동안 그렇게 행동해왔기 때문에,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불쾌하고 악의에 찬 영을 지닌 자가 조금이라도 교종의 이미지를 실추시켜 보려는 의도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사진을 이용해서 잘못된 캐리커처를 만들어 낸 것이다.

구체적이고 좋은, ‘보다 큰’ 무엇인가를 제시하기

  파브르가 제안했던 기준들 가운데 이런 성찰에 유익한 세 번째 기준은 ‘이냐시오의 마지스(magis)’이다. 성 이냐시오는 마지스(‘보다 큰’), 즉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사람이었다. 이는 관념적인 ‘보다 큰’, 즉 추상적으로 완전한 모습을 우선 제시하고 나중에 이를 실현할 방도를 찾아보는 형태의 ‘보다 큰’이 아니다. 반대로, 시간과 장소와 사람들을 인식하면서 삶 안에 육화된 ‘보다 큰’, 즉 구체적이고 가능한 ‘보다 큰’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성부께서 기뻐하시고 성령께서 실천하도록 권고하시는 방향에 따라 진일보하는 것이다. 성 바오로의 회심이나 한 사형수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았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행위와 같은 큰 발걸음을 뜻할 수도 있고, 물웅덩이를 건너기 위해 어린이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작든 크든 간에, 이 발걸음은 “성령 안에서 보다 큰”을 의미한다. 파브르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그대가 어떤 이의 믿음, 희망, 사랑과 활동에 제시할 목표가 더 높을수록 그가 자신의 모든 정성과 역량을 쏟아 부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선한 영과 악한 영이 움직이기 시작할 가능성이 더 클 것입니다. (…) 다시 말해서 힘을 주는 영과 허약하게 만드는 영, 빛을 비추는 영과 흐리고 어둡게 만드는 영의 움직임, 요컨대 좋은 것과 그에 반대되는 것의 활동입니다.”10)

  예수 그리스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가능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도록 초대하는 이 역동성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연설 안에 항상 되풀이된다. 강론을 할 때 혹은 글을 쓸 때, 교종은 모든 주제들이 평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학술 논문을 체계적으로 작성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의 신학은 실천적이고, 케리그마에 바탕을 둔 것이다.11) 어떤 정의(定意)를 내리도록 돕기보다, ‘우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도록 돕는 신학이다. 이 신학을 실행하고, 마음의 밭을 갈아 일구고, 영의 움직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교종은 성령께서 ‘일반적으로’ 전체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대해서 생각하라고 권유하기보다, 성령께서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스스로 식별해 보도록 초대한다.

  교종이 연설에서 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심오함을 추구하는 박식한 이들의 토론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지표가 되어 주는 말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소통하는 체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특징짓는 실천적인 케그리마 신학의 ‘보다 큰’ 관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향한다. 그들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주님께서 각자를 부르신 봉사의 삶 안에서, 그리고 완수해야 할 회개의 여정 안에서, 성령의 ‘보다 큰’ 활동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마음의 회개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어떤 주제를 다룰 때 특정한 요점을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이 때문에, 왜 교종이 강조점 외에 다른 점에 대해 말하지 않는지 의문을 제시하거나, 그 요점을 모두에게 ‘일반화’시켜 볼 때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12)

왜곡된 ‘보다 큰’이라는 논리의 함정

  여기서 어떻게 종종 ‘보다 큰’이라는 논리를 왜곡해서 이용하는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을 포함해서 모두가 스스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프란치스코 교종은 언어를 사용한다. 이런 차원과 대조적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려고 이전 교종이나 신앙의 교리나 회칙을 공격한다는 논점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예수회의 총장이었던 아돌포 니콜라스(Adolfo Nocolàs) 신부는 작년 로마 예수 성당에서 성 이냐시오 축일을 맞이해서 했던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이 예언자의 말씀과 같다고 단언했다. 그에 따르면, 교종의 말씀이 때때로 완고하거나 불쾌한 반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앞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세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항상 선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반면에, 자신의 특별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그 말씀에 마음을 닫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보다 더’ 완고하게 만들고 만다.

  이것이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논리를 따르는 언어를 식별하기 위한 기준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것(마태 12,9-14 병행구절 참조)과 같이 구체적인 선을 행하셨을 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이 언어는 강생의 언어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움직인다. 강생의 방식을 따르는 말씀과 행동은 어느 누구도 공격하려고 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은총을 전하고자 한다.

  강생의 언어와 반대되는 움직임은 왜곡, 축소나 파괴 등과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지만, 항상 똑같은 효과를 내려고 시도한다. 즉 말씀이 어떤 특정한 마음 안에 육화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혹은, 육화되더라도 좋은 토양에 떨어진 씨앗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한다. 또한, 열매를 맺더라도 많은 열매가 아니라 더 적은 열매를 맺게 한다. 그리고 만일 이 모든 것을 전혀 얻지 못한다면, 적어도 평화를 빼앗고 영혼을 약화시키려고 애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VS)를 비난한다고 암시하거나 단정하는 담화에 대해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겨질 것이다. 단지, 평범한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분개하게 만들려고, 이 내용이나 유사한 내용을 단정적이고 근엄한 방식, 즉 바리사이식 장엄성에 따른 ‘보다 큰’ 방식으로 언급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가정에 관한 두 차례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결과를 모아 발표한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AL)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리나 도덕, 또는 사목에 관한 모든 논의를 교도권이 개입해서 처리할 필요가 없습니다.”(AL 3)라고 말했다. 이 권고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진리의 광채」의 정신과 온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늘의 윤리 신학에 나타난 일부 경향에 대한 식별”(VS 28-83)에 담긴 「진리의 광채」의 결론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친애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우리는 윤리적 이론들의 오류와 위험에 대해 신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진리’의 매력적인 광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VS 83)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이 회칙을 자신의 ‘교황 권고’에 더 폭넓게 적용했다. 사실 진리는 개념 정리를 통해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진리의 광채」의 개념 정의마저도 빛을 발산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빛을 발휘한다.13) 진리는 예술 작품이나 비유, 자비로운 행동이나 ‘케리그마’ 선포에서 빛날 수 있지, 추상적으로 내리는 정의(定義)에서는 빛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를 내리는 경우에는 정의의 대상이 되는 실재를 관상(觀想)적인 방식으로 향유하는 대신에, 계속 그 실재의 한계와 범위를 결정하는 판단에만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본질적이지 않다고 간주된 측면을 제외시키면서 진행되는 추상화 작업은 이 진리의 광채와는 다르다. 이 광채는 세상에 존재하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는 모든 실재를 활용하여, 그 실재들 안에서 자신의 빛을 발휘한다.

  이 ‘보다 큰’이라는 기준에 관한 마지막 성찰을 해 보자. 프란치스코 교종은 말씀의 힘을 예언자적으로 일깨워냈다. 이 말씀의 힘은 적대적인 이념으로 인해서 귀머거리가 되어 버린 인간들 간의 대화와 추상적인 도식 안에 갇혀 있었다. 교종으로서 그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서로 소통하고 구체적으로 대화하는 사건들을 지지하고 만들어낸다. 정치, 문화와 종교 등 모든 분야의 대담자들과 대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교종은 지리적으로나 실존적으로 변방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과 실제로 ‘접촉해서 연결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런 모습은 첫 순간부터 커뮤니케이션 세계를 매료시켰고, 모든 작가와 모든 강연자는 자신의 말이 현실에 와 닿고, 현실을 고쳐나가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기를 꿈꾸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매력은 프란치스코 교종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인지되었다. 그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을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양극단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독창적인 은유를 발명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시도는 부정적인 형식이기는 하나, 그들의 생각이 대체로 프란치스코 교종의 활발한 창의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좋게 해석하기”

  선한 영으로 담화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데 유익한 사항이 한 가지 있다. 이는 성령께서 그의 말과 연설에 진리의 힘을 더하시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성 이냐시오가 “다른 이들의 의견을 좋게 해석하기”라고 부르는 사항이다. 성인은 선한 영을 가진 이와 대화할 때 준수해야 될 사항 전체를 세 문장으로 제시했다. 이를 실행하는 기술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항상 돋보였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강조한다.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의 의견을 단죄하기보다는 좋게 해석하는 방향으로 더 마음을 써야 한다. 만약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를 알아보고, 그것이 나쁜 것임을 알았으면 사랑으로 교정해 준다. 만약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면 모든 적절한 수단을 찾아서 올바로 이해하여 구제되도록 할 일이다.”14)

  분명히 여기서 성 이냐시오는 어떤 문제에 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이해하기를 열망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사랑을 가지고 질문하고 교정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기만적인 언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이미 뿌리박힌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태도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직면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교종은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대화하려는 몸짓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전화, 이메일 또는 편지로 접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나치거나 공격적인 표현 없이 평화롭게 의견의 차이를 직접 자신에게 전달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프란치스코 교종은 감사하는 자세를 취한다.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정보를 수정해 주어야 하는 경우에는 주의를 기울이면서 관련된 사람과 개별적으로 접촉해서 고쳐주려고 한다. 그리고 아주 공격적인 방식으로 비판받았을 때, 교종은 우선 그 비판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질문한다. 도움이 된다면, 넓은 마음으로 그 내용 자체를 좋게 해석한다. 결국, 프란치스코 교종은 말할 때나 가르칠 때 그 방식에 있어서 항상 온유함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소통하는 전략과 생각을 바꾸는 데에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교종의 태도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런 사실은 상냥함을 지니고 자신의 반대자들의 적개심을 무장 해제시키는 인격의 도덕적인 기품을 드러낸다. 교종은 비판을 받을 때, 자신을 방어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을 공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대화를 향해서 열려진 문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공격적이고 비난적인 언어에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그 언어가 지닌 기만성에 기초한 ‘보다 작은’ 것이거나 ‘보다 큰’ 것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비평적이고 평온한 시선으로 그 언어를 검토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찰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성찰을 하면서 교회와 교종에 대한 사랑을 약화시키거나 빼앗기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V 105-118 | 4016 (21 ott/4 nov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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