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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독후감>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마음의 기도(The Climate of Manostic Prayer)를 읽고.
2018-07-13 19:02:45
박윤흡 (missa00) 조회수 1743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마음의 기도’를 읽고.

 

박윤흡 윤일요한

 

 

1. 왜 이 책을 '다시' 선택했는가?

 

  영성 심화의 해(2015년)를 마치고 한 달 피정이 끝나고 나서, ‘아! 이제 잘 살아보자!’라며 다짐했었던 나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러한 다짐도 작심삼일로 끝나 버린 지 오래 되었고, 이리저리 관계와 업무에 치이는 나 자신을 마주하였고 동시에 영성생활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영성생활의 결핍이 내면에서 문제로 제기되어 매일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자기중심적인 불신과 교만이 나를 지배하였다. ‘기도해야 하는데...’라는 소극적인 외침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한 권의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책은 바로 토마스 머튼의 ‘마음의 기도’(원제: 토마스 머튼의 관상기도The Climate of Monastic Prayer)다. 다시 읽게 된 머튼의 저서! 이 책의 저자인 머튼은 누구인가?

  토마스 머튼은 반평생의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엄격한 트라피스트 수도 사제로 남은 반평생을 살았다. 머튼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방탕한 삶마저도 자신의 신앙 안에서 수용하여 모든 시간을 하느님 자비의 순간들로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를 ‘요나의 표징’으로 드러낸 사람, 활동과 기도의 조화를 자신의 삶으로 이루고자 하였으며 과거 수도자에게만 유보되어 있었던 ‘관상적 삶’을 인간 존재론적 차원으로 밝혀내어 모두가 관상가임을 설파한 사람,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를 인본주의적 차원으로 이해함으로써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이 지니는 보편성의 가치를 드러내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강조한 사람, 말년에 이웃종교와의 대화를 주창하며 이웃종교와의 대화 가능성의 문을 열고 자신의 신앙을 보다 더 심화시킨 사람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사랑의 징표인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구체적이며 실존적인 복음을 선포한 사람, 바로 토마스 머튼이다.

  이 사람은 내가 직면한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성 결핍, 삶 안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 속에서 처절하게 무너지는 나 자신, 기도에 대한 물음 등 여러 가지 영성적인 실존적 물음들을 이미 경험하고 답을 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을 다시 선택하였다.

 

2. 책의 구성

 

  이 책의 서문에서 불교의 승려인 틱낫한Thich Nhat Hanh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놀라운 책 ‘마음의 기도’에서 토마스 머튼은 자신이 터득한 기도에 대해 심오함과 비이원론적인 이해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이 서문에서 드러나듯이, 머튼은 교의적이거나 이론적인 차원에 바탕을 두지만 그것만으로 영성적인 열매들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본디 ‘직관적 존재’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머튼이기에, 그는 인간의 체험을 중요시하였다. 이 책 또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체험의 객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막 교부들의 체험과 명언들을 첨언하였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의 물음들을 통해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왜 인간에게 기도가 필요한가?’,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을 갈망하는, 기도할 수 있는 존재인가?’, ‘기도는 무엇인가?’, ‘마음의 기도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기도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인간적 차원의 마음의 평화인가?’, ‘기도를 통해서 인간은 어떻게 변모하는가?’

  다시 말해, 본 저서에서 머튼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인간 이해를 전제한 상태에서 영성적인 열매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3. 영적 독서를 통해 얻은 열매

 

  머튼은 ‘성찰의 중요성’을 심히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신을 위한 고통의 종파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아-부정과 희생이 기도 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모든 기도의 시작, ‘하느님을 믿는다’는 신앙 명제의 출발점은 ‘비참한 나’라는 실존적인 자기 수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만약 양심성찰 혹은 의식성찰이 없는 삶이라면, 하느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그저 양심성찰에만 빠져있게 되면 나의 나약함으로 저지른 내 죄목에만 몰두하여 나 자신을 그 안에 가둔다. 이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의 결여로 그 자체가 교만함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고 되새기는 의식성찰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성찰조차 없다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 뿐인 바리사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문제는 성찰 없는 삶이 내포하는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태도다. 성찰하지 않을 때 나는 점점 더 하느님과 멀어지고 온전히 ‘나 자신’만 남게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피상적이며 사회적인 자아로서 진정한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으로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렇다면, 성찰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 방향 뿐 아니라 기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의 기도’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가장 깊은 근거이다. 우리는 신앙 교리나 ‘신비’들에 대한 추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직접적인 실존적 파악,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신앙의 가장 깊은 진실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얻으려 한다.”

 

  신학생 시절, 영성강화 중에 신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기도가 무엇이니? 기도는 ‘나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이야.” 머튼도 기도에 대해서 참된 나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나, 곧 태초에 나를 창조하셨을 그 목적에 따른 나이다. 앞서 성찰없이 살아갈 때 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피상적이며 사회적인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나 자신이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이 바로 영성생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은 과연 무엇이며, 내게 요청되는 사안은 무엇인가?

  흔히 나는 나의 영성생활 안에서 위로와 평화만 갈망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가차 없는 심판의 빛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거짓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드러나는 혹독하게 쓰라린 진리를 용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이다. 도와 달라고 열렬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든 노력에 자신을 기꺼이 내맡기면서 우리의 무기력과 이기심을 버리고 성령의 요구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은총이다.”

  머튼은 인간적인 위로와 평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미건조하고 절망의 부르짖음 속에서도 한 마디 말씀 없으신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두고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에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나 자신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거짓 자아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판단치 아니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무상증여로 주시는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내 삶을 봉헌하는 것이 바로 내게 주어진 몫이 아닐까. 이로써 머튼은 기도 생활의 궁극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기도 생활이 우리의 영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기도는 ‘회심’을 수반해야 한다. 회심은 마음의 깊은 변화로서 보다 더 영적인 면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 존재의 어떤 단계에서 죽는 것이다.”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허적인 사랑은 끊임없는 회심을 자발적으로 요청하도록 이끄신다.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완전한 사랑 앞에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나 자신의 불완전한 사랑은 침묵과 함께 무릎을 꿇게 된다. 비참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사랑과 은총을 부어주시는 예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바로 나를 당신께 의탁하도록 이끄시는 사랑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끊임없이 당신께 마음을 향하게 함으로써 몸소 보이셨던 자기비움의 삶을 나 또한 닮아 살기를 바라신다. 예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은 그것이다. 바로 ‘참 자유’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지쳐있는 나를 당신의 사랑으로서, 희망을 절망으로, 죽음을 생명과 부활로 변모시켜 주시는 그 자유를 내가 살아가기를 나의 주님은 바라시는 것이다.

 

4. 열매를 통해 초대받은 새로운 삶

 

  본 저서를 통해 내가 초대받은 삶은 바로 ‘향주삼덕적 삶’이다. 첫째, ‘믿음’이다. 나 혼자서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의 체험은 인간적 절망이지만 동시에 신앙 안에서 희망이 된다. 하느님께 의탁하여 그 분 도우심의 발로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형제 사제들의 도움으로 내 삶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둘째, ‘희망’이다. 나 자신의 나약함 속에 갇혀 내 안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이면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하시고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다는 그 희망이다.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희망하며 나아가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초대받았다. 셋째,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기 이전에 이미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희망의 존재로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믿으며, 나 또한 약소하게나마 나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내어드리는 것. 하느님을 향한 어쩔 수 없는 나의 사랑임을 기억하는 삶으로 초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믿음, 교만-겸손은 불완전한 실존인 내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할 것이다. 그때마다 육화의 신비를 묵상하고, 특별히 미사성제 안에서 당신을 비우신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또한 끊임없이 내 삶의 모든 물리적 시간Chronos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무상은총 안에서 영원의 시간Kairos을 살아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청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앞으로의 삶이 아닐까.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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