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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저희를 시련에 빠뜨리지 마시고'-주님의 기도의 난해한 청원에 대하여" - civilta catholica(교황청 잡지) - 피에트로 보바티 신부(예수회)
2018-06-21 13:48:30
박윤흡 (missa00) 조회수 1432

“저희를 시련에 빠뜨리지 마시고”
주님의 기도의 난해한 청원에 관하여

 

«NON METTERCI ALLA PROVA»
A proposito di una difficile richiesta
del Padre Nostro*

피에트로 보바티 신부(예수회, 교황청성서위원회 위원)**
최원오 빈첸시오 교수(대구가톨릭대학교) 옮김

  여러 세기에 걸쳐 권위 있는 교부들과 수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주님의 기도’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특성을 높이 평가했다. 거룩하신 스승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완전한 기도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구약성경의 모든 기도의 완결판이라 여겼고, 또 다른 이들은 기도 형식을 지닌 그리스도교 교리 교육의 종합이라고 정의했다.1) 이러한 평판은 예수님께서 친히 남기신 말씀이자(루카 11,1) 당신 기도의 열매를 신자들이 되풀이하여 바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완전성은 이처럼 공동체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방식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기도와 열망

  주님의 기도가 이른바 가장 탁월한 간구supplica라는 견해에 맞설 의도는 없지만, 주님의 기도에서는 감사와 찬미도, 신뢰와 의탁의 정확한 표현도, 하느님 말씀을 경배하고 묵상하는 경청의 표현도 발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에서 본질적 요소로 여기셨던 것은 열망의 방향2)을 잡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당신 제자들이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실 참된 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은 인간의 청원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맞갖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일곱 가지의 이어지는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간구들은 기도하는 이가 갖추어야 할 신뢰의 토대를 분명하게 세워준다. 첫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남겨주신 순명의 본보기를 체험하게 한다. 여기서 기도하는 이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곧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실현되기를 청한다. 이어지는 네 가지 청원은 인간이 기대하는 바를 표현하면서도 구조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합치되며, 본질적으로는 주님께서 이미 하늘에서 완성하신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기도로써 청하는 법(“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 마태 7,7)을 가르쳐 주신다. 간구란 궁핍한 자녀의 호소라는 특성을 지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궁핍이라는 이 조건은 가난한 이들을 부유하게 하시려고 몸을 굽히시는 분을 찬송하는 데 도움이 된다(시편 113,5-9; 루카 1,51-54).3)

  그럼에도 하느님께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모호한 점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기도하는 사람 스스로 거룩한 기도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잘못된 기도를 바치는 경우뿐만 아니라, 간청이 하느님을 향한 하나의 ‘명령’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문제이다. 마치 주님께서 당신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독촉 받을 필요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행동 수칙을 낱낱이 일러주는 꼴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고(마태 6,8.32), 언제나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시며(이사 30,19), 기도하는 이가 청하는 바를 입술에 올리기도 전에 들어주신다(이사 65,24)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은 공격적이며 부적절한 행위일 수 있고, 역설적으로 신앙의 결핍을 드러낼 수도 있다. 소리를 질러 주무시는 하느님을 깨우려는 것인가?(1열왕 18,27) 아니면 당신 눈으로 보시지 못한 무언가를 알려 드리려는 것인가? 아니면 혹시라도 망설이고 계신 그분이 선을 행하도록 확신을 드리려는 것인가?

  열심히 바치는 청원 기도, 특히 고집스레 바치는 기도가 하느님에 대한 신앙 행위라고 합리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서 베푸시려는 선물을 기도하는 사람이 점진적으로 깨달아 가는 과정의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선물의 가치를 겸허하게 인정할 줄 아는 이에게 아버지께서는 온갖 것을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선사해 주신다는 사실(1요한 5,14-15)을 깨닫기 위해서는 더 오랜 기도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15,28 등)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한없이 너그럽고 전능하신 사랑의 확실성에 궁핍한 이의 마음이 열릴 때 비로소 청원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이다. 

  청원 기도는 적절한 언어 형식을 사용하여 그 대상에게 특별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반드시 해석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지극히 높으신 분께 “이것저것을 하시고, 잊지 마시고, 서둘러 주시고,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주님에 대한 불평 따위를 에둘러 늘어놓기도 한다. 탄원 시편에서는 종종 기도하는 이가 분명한 비난의 어조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2), “언제까지 저를 계속 잊으시렵니까?”(시편 13,1), “왜 위험한 순간에 숨어 계십니까?”(시편 10,1)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한다. 분명히 이와 비슷한 표현들은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 현실에서 끌어온 문학 형식을 빌린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현실은 고통을 겪는 이가 죽을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누군가 개입해 주기를 절박하게 간청하는 자리이다.(시편 22,16; 28,1 참조) 기도하는 이는 외로움을 느끼고(시편 22,12; 25,16), 자기 존재를 알아차리실 수 있게 하려면 더 크게 부르짖어야 한다고 상상하고, 구조 받기 위해서는 부르짖음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편 유형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암호 해독이 필수적이다. 사실 극적인 어조를 지닌 탄원은 자신이 믿는 분의 놀라운 구원 은총을 찬송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실하게 기도하는 이는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그에게 베풀어 주시는 선물을 간구 형식으로 읊조리는 셈이다.

  문제가 되는 청원: “저희를 유혹에 이끌지 마시고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주님의 기도의 두 번째 부분의 청원들은 주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두 대표하는 ‘우리’를 그 응답의 분명한 수신인으로 삼고 있다. 그 공동체는 위험과 궁핍과 영적 비참에 짓눌린 채 사막을 떠도는 나그네이다. 그러나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당신 나라가 실현되며, 당신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청원은 아직 “세상에”(요한 17,13) 있는 이들에게 은혜롭다는 사실이다. 비록 특수한 청원들로 진술되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열망을 표현하게 하신다. 이 열망이야말로 아버지께서 주시기를 원하고 마침내 자녀가 받아 누리게 되는 참된 삶을 향한 소망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가 아우르려 하는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열망의 정겨운 일치는 끝에서 두 번째 청원에서 단절되는 듯한데, 그 청원은 라틴어로는 이렇게 표현된다. “저희를 유혹에 이끌지 마시고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여기서 기도하는 이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자기가 빌고 있던 하느님께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마치 아버지의 지향과 계획이 자녀가 바라는 대로 제어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게다가 주님께 덧씌워진 이미지는 정말 불만스럽다. 얼핏 보기에, 주님은 기도하는 이에게 위험하거나 해롭기까지 한 행위의 주재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지막 측면은 사목적 어려움을 낳는 동기가 된다. 교회 주석가들과 교종 프란치스코를 포함한 교회 책임자들이 전례 기도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사용된 문구를 고치도록 (요구)함으로써, 오늘날 널리 공유된 감수성에 부응하는 더 올바르고 더 존경스러운 하느님 개념을 세우려 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교회 역사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교 초세기에 돌아다니던 한 라틴어 번역본은 마태오 6장 13절의 본문을 머잖아 나타날 대중판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 성경과 다른 방식으로 옮겼다.4) 그 라틴어 번역본은 “저희가 유혹에 이끌리도록 허락하지 마시고Et ne passus nos fueris induci in tentationem5)라고 기도한다.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같은 권위 있는 서방 교부들의 해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주해에 영감을 주었는데, 그 주해들은 모두 성서 신학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해설하고 있으며, 문제가 되는 표현에 “저희가 유혹에 들도록(그리고/또는 굴복하도록) 허락하지 마시고” 또는 “유혹에/속에 내버려두지 마시고”6)라는 의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아마도 현대 번역들은 하나같이 이런 의미로 가는 것 같다.7)

  우리의 연구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전망 속에 있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보태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복음서 본문에서 글자 그대로 전해주는 바를 더욱 치밀하게 분석하면서도, 이 난해한 청원의 의미를 깊이 성찰할 것이다. 이 청원은 우리의 영적 투쟁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호소하게 만드는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 분석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청원은 마태오 복음(마태 6,13)과 루카 복음(루카 11,4)뿐 아니라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 8,2)에서도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다. 마태 6,9-13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의 긴 본문과 루카 11,1-4의 짧은 본문 사이에는 다양하고도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문제 삼는 대목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이는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청원은 구약성경 문헌과 어떠한 병행구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는 예수님의 독창적 가르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석을 위한 저본(底本)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어 본문(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8)은 네 개의 문법적 요소들(앞의 청원들과 연결하는 접속사 καὶ로 구분된)로 구성되어 있다.

  1) 먼저 동사 에이스페레인(εἰσφέρειν)은 의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접속법 아오리스트 형태로서, ‘(무엇이나 누군가를) 어떤 현실 속에 집어넣다, 이끌어 들이다, 자리 잡게 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어 동사의 능동적 의미를 누그러뜨리는 현대어 번역본들(“저희를 저버리지 마시고”, “저희를 ~의 힘에 내버려두지 마시고” 등)9)은 원문을 온전히 글자 그대로 존중하지는 않은 듯하다. 고대 서방 전례의 라틴어 번역(“저희를 이끌지 마시고Et ne nos inducas”)은 그리스어의 표현을 글자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왜냐하면 ‘inducere’ 동사는 문자자체의 의미로 ‘안으로 이끌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례에서 사용되는 이탈리아어 번역은 라틴어를 단순하게 본뜬 ‘indurre’ 동사로 옮김으로써 적절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이 단어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행위보다는 지향성(志向性)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요소는 앞에 나온 동사의 목적어인 인칭대명사 헤마스(ἡμᾶς)에 관한 것이다. 기도하는 이를 가리켜 ‘저희’라고 부르는데, 이는 주님의 기도 두 번째 부분의 모든 청원에 공통적이다. 우리의 기도에서도 언제나 공동체적 지평을 지녀야 할 일이다.

  3) 전치사 에이스(εἰς ‘안에’)는 이미 복합 동사 에이스페레인(εἰσφέρειν)에 들어 있으며, 무언가를 ‘향한’ 운동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아마도 어떤 구체적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는 더 엄밀한 뉘앙스를 덧붙여 놓은 것일 수도 있다.

  4) 명사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성경 본문 해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론적 요소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올바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용어의 이해(그리고 번역)가 매우 중요하다. 동사 페이라제인(πειράζειν)이나, 거기에서 나온 명사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 모두 폭넓은 뜻을 지니고 있다. ‘시도’(사도 9,26; 16,7; 24,6)에서 ‘시험’(2코린 13,5)에 이르는 의미, (어렵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으로 이해되는) ‘시련’에서 (윤리적 종교적 악의 기회에 사로잡히도록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유혹’에 이르는 의미를 품고 있다. 그 의미 부여는 다름 아닌 상황에 달려 있으며, 특히 행위자들과 그들의 의도에 달려 있다. 고대 라틴어 번역본들과 현대의 다양한 번역본들에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거의 하나같이 ‘유혹’을 선호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장을 “저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또는 내용의 동등성equivalente dinamico을 지닌 “저희를 시련에 빠뜨리지 마시고”10)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그리스어 어근의 근본 뜻은 ‘시험하다’, ‘시련에 빠뜨리다’이다. 신약성경의 다른 상황들(루카 8,13; 22,28; 사도 5,9; 20,19; 갈라 4,14; 2코린 13,5; 히브 2,18; 4,15; 11,17; 야고 1,2; 1베드 1,6; 4,12; 2베드 2,9; 묵시 2,2)에서도 이 동사와 명사는 이렇게 번역되고 있다. 행위의 주체가 악의를 지니고서 목표로 삼은 인물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경우에만―사탄이나 다른 사악한 행위자가 개입하는 상황에서처럼(마태 4,1.3과 병행구; 1코린 7,5)―오로지 이 소수의 경우들에서만 ‘유혹하다’의 뉘앙스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는 꼬드김과 속임수로써 넘어뜨리는 것을 그 목표로 삼은 행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유혹하는’ 행위는 결코 하느님께 부여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선하신 아버지의 본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는 야고 1,12-15에서 특히 분명하게 표현된다. “시련(πειρασμόν)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유혹을 받을(πειραζόμενος)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πειράζομαι)’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유혹을 받으실(ἀπείραστός)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πειράζει)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πειράζεται)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그러나―그리고 이것이 성경 전통이 여러 차례 강조하는 현실이기도 하다―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시련에 빠뜨리신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저희를 시련에 빠뜨리지 마시고” 라고 청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어떤 의미로 “시련에 빠뜨리시는가?”

  이교적 개념에 따르면 신적 존재는 자신에게 헌신하는 이들에게 특혜와 호의를 베풀면서 보호해 준다. 인간들이 겪은 재앙과 불행은 인간들과 신들의 경쟁적 존재 방식 때문이라고 여기거나(이타카 섬으로 돌아가는 여정 속에 있는 오디세우스를 생각해 보자), 역사의 운명들에 대한 절대 권력자인 운명의 신이 내린 명령 탓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면 이스라엘 전통은 모든 사건을 주재하는 하느님에 관해 말한다. 모든 피조물의 삶과 죽음은 그분의 손아귀에 있다. 아무것도 그분의 권능을 피할 수 없다. 아니, 신비로운 방식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그분 은혜의 표현이며 거룩한 부성의 섭리이다.

  인간이 자유가 결핍된 존재로서 자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계시가 이른바 ‘제2원인들causae secundae’을 개념적으로 배제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반대로 성경은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북돋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악하게 행동하며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곳에서조차 모든 존재를 은혜로운 종말을 향해 이끌어 주시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심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종으로 팔려갔다가 자기 형제들을 위한 생명의 원리가 되는 요셉 이야기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창세 45,4-8) 이 인물은 당신 동족의 어리석음과 악행으로 말미암아 돌아가셨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편적 구원의 중재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예형(豫型)이다.(사도 2,23-24; 3,17-18; 4,27-28).

  역사에서 벌어진 얄궂은 일들을 거룩한 전통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본다면 폭넓은 성과를 얻게 될 것이다. 고통과 죽음의 수수께끼는 다양한 성서해석학적 시도에도 언제나 물음거리로 남아 있으며 영원한 학문적 논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종합하자면, 인간이 겪은 어떤 고통들은 성경에서 죄의 결과로 해석된다고 할 수 있다.(창세 3,16-19; 신명 29,21-27) 이 경우 역사 속에서 맞닥뜨린 고통의 효력은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행하신 것이다. 그것은 범죄를 벌하는 정의의 당연한 실현일 뿐 아니라, 특히 죄인이 악을 포기하고 선에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의학적 처방이요 교정적이고 교육적인 섭리다.(잠언 3,11-12)

  반면, 매우 흔히 볼 수 있듯 고통에 관한 어떤 체험들은 죄와 전혀 상관없지만, 그 고통은 주님께서 언제나 지혜로운 의지로 내리신 것이고, 인간 안에서 선한 결정을 돕기 위해 그리하신 것이다. 여기서 성경 전통의 ‘시련’이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 개념은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을지라도,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의인’을 치는 악의 알쏭달쏭한 드라마를 수용할 독해의 열쇠를 신자들에게 제공하는 데 유익하다. 금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욥의 이야기이다. 본문이 전하는 바, 그에게 비길 만큼 정직하고 신심 깊은 사람은 땅 위에 아무도 없었다.(욥 1,1.8; 2,3) 그럼에도 사탄이 알려 주는 바와 같이, 그의 올바름은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흠숭의 표현이었다기보다는, 오직 주님의 상급과 은혜를 받아 누리려는 이해타산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재산과 자녀와 자신의 건강을) 박탈당하는 시련만이 이 인물이 지닌 지향의 투명성과 종교적 자질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섭리는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실 인간은 자기 존재가 (실제로나 가상으로나) 손실을 입게 되면 반항하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막 체험(신명 8,2)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시련의 어려움을 보여줄 것이다. 다른 한편, 하느님께서는 일부러 당신 백성을 모든 박탈의 상징인 이 고립된 광야로 이끌고 가신다. 거기에는 빵도 물도 없고, 돌아다닐 번듯한 길도 없다.(예레 2,6) 혹독한 기후조건에다가 교활한 세력(신명 8,15)과 잔인한 원수들의 공격(신명 25,17-18)을 겪어야만 했다. 다른 한편, 사막에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신명 8,3)는 것을 깨닫고 인식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사막 사건은 성경이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으로 소개하는 인간 역사의 예형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선택된 이도 결코 무사하지 못했고, 오히려 주님의 종은 맑디맑은 의식과 지극히 선명한 순교 의식을 지니고서 자발적으로 시련을 받아들였다. 정의와 그 행복은 이처럼 신비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예언자들과 영감 받은 현자들의 증언을 요구한다. 이는 유딧이 자기 동족들에게 말한 바와 같다. “이미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시련에 빠뜨리시는 주 우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이사악이 어떤 시련을 겪게 하셨는지, 그리고 야곱이 시리아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외숙 라반의 양 떼를 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시험하시려는 목적만으로 그들이 불도가니를 지나가게 하셨듯이, 그렇게 지금 우리에게 보복하시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당신께 가까운 이들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채찍질하시는 것입니다.”(유딧 8,25-27)

  이스라엘의 오랜 지혜(욥 23,10; 잠언 17,3; 지혜 3,5)뿐 아니라, 야고 1,12와 1베드 1,6-7이 증언하는 초기 교회 전통도 똑같은 맥락 속에 있다. 특히 사도는 야고 1,2-4에서 디아스포라 백성을 향해 말하면서 이렇게 썼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완전한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야고 1,2-4)

  예수님도 박해받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셨다.(마태 5,10-12)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명을 보여주시기 위해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광야로 가시어 유혹자의 꼬드김을 물리치셨기에(마태 4,1-11) 우리는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수난의 극심한 시련에 들어가겠노라는 당신 동의를 상징적으로 예고하신 말씀이다.(히브 2,10.18; 4,15; 5,7-10)

   

  저희를 시련에 빠뜨리지 마시고

  성경이 전해주는 대로 인생이 끊임없이 시련에 노출되어 있다면, 그리고 이것이 마음의 지향을 정화하고 의인들의 영적 자질을 담금질하기 위한 하느님의 지혜로운 계획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대놓고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주님의 기도의 청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선 이 논문의 첫머리에서 하느님을 향한 청원들의 의미를 올바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바를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청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당신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는 도움을 청하는 이의 유일하고 참된 열망으로 남아 있다.

  주님의 기도의 둘째 부분의 다양한 청원들은 서로 다른 조건의 필요한 사정과 기도하는 공동체의 비참을 펼쳐놓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구제에 동의하지 않으실지, 아니면 구제하고 싶어 하실지 추측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버지께서 당신의 선하신 연민의 행위를 드러내시는 방법과 상황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할 따름이다. 중요하거나 필수불가결한 어떤 선의 부재에서 비롯한 고통의 체험은 인간 존재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 하느님께 고통을 보여드리는 일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믿음과 희망의 기회를 앗아가는지 표현하는 것 또한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악의 폭풍우에 노출시켜 달라고 기도로 청하는 것이 분명히 교만한 과신 행위라면, 홀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만만찮게 교만한 행위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나약함을 겸손하게 인정한 까닭에 시련의 불에서 무사하게 해달라고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서 용인하시고 들어주시는 행위이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는 사람은 고통의 불도가니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청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하나의 ‘유혹’이 되고, 섭리를 불신하는 위험한 계기가 되고, 더 나아가 생명의 창조자를 위한 찬미의 기회를 앗아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처럼 죽음의 끔찍한 위협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커다란 괴로움을 겪는 사람(마태 26,38)은 기도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렇게 되뇌도록 부름 받는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왜냐하면 죽음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청할 때에야 비로소 기도하는 이는 생명이란 얼마나 간절히 바라야 하는 선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삶을 청할 때에야 비로소 믿는 이는 자신의 청을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히브 5,7)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시련의 극적인 순간을 생생하게 의식하기도 한다. 위협이 다가오고, 끔찍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어둠의 순간이다. 자연 재해일 수도 있고, 경제적 파산일 수도 있으며, 심각한 병이나 수많은 반목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일 수도 있다.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우리의 기도를 잘 살펴본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열면서 결국 무엇을 당신께 청하게 되는지 자문해 본다면, 우리는 번번이 시련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니, 마지막 청원에서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의 본문에 따라) 우리를 초대하시는 대로, 우리는 아버지께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기도한다. 이는 생명에 맞서고 하느님께 맞서는 모든 치명적 현실에서 빠져나가게 해 달라는 지향을 담고 있다.

  유혹을 극복하고 악의 유혹을 이길 정도는 되게 해 달라고―이것도 당연히 필요하지만―아버지께 독선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고 나약한 인간,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당신 도움을 베푸시는 선하신 하느님께 길을 잃지 않고 밤을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십사 간청하는 것이다. 치유를 빌면서 예수님을 향했던 모든 이를 우리는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시편이나 전례 기도문을 읊으면서 날마다 되풀이하는 수많은 청원도 생각한다. 우리가 위험을 느낄 때나 앞날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힐 때, 악의 징후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할 때 우리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간청도 우리는 생각한다. 주님을 향한 이토록 다양한 형태의 청원은 단 하나의 기도, 곧 “저희를 시련에 빠뜨리지 마소서.” 라는 기도 안에 요약되고 압축된다. 

  이 청원은 포괄적이며 부정문(否定文)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제를 청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달라는지 말하지는 않는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하고 자기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뜻에 자신을 맡긴다.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이 샘솟는 곳으로 당신 자녀들을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이는 아버지의 지혜로운 선을 찬미하면서 하느님 홀로 아시는 계획을 신뢰한다. 삶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하느님께 애원하면서 신뢰한다. 마음으로 바라는 것 너머에 있는 것까지 이미 들어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신뢰한다.

  복음,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성경 전체는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인생의 더 나은 보증이라고 여기는 다른 실재들과 물질적 가치에 매달리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다. 그러므로 유혹의 극복이란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 신앙 행위인 셈이다. 이런 일은 시련이 사라지고 구원의 도래를 목격한 뒤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순간에 이미 유혹은 극복된다. 기도는 시련이 악의 기회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영적 사건의 (καιρός)가 되게 해준다. 왜냐하면 시련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겸손과 용기로 빚어낸 삶의 요청이기 때문이다. 헤아릴 길 없는 당신 지혜로 자녀들의 선을 위해 유익하고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결정하실 아버지의 은혜로운 개입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의 이 마지막 청원은 사랑 가득한 외침이다. 무엇보다도 신뢰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향하고,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면서 사랑이신 분께 믿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청원은 사랑의 외침이다. 개인적 필요 때문에 억지로 바치는 개별 청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공동체의 기도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거대한 회중인 교회의 기대를 표현하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모든 믿는 이의 기도이다. 아니, 하느님 선의의 표징을 기다리는 지상의 모든 인간의 기도이다.(시편 86,17) 세상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한다는 실질적 표현이며,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기도이며, 입술에 올리는 행위 자체로도 들어주시는 기도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해지고 영광스러워졌으니, 사랑이 땅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8 I 215-227 | 4023 (3/17 febbraio 2018)

** Pietro Bovati S.J.

1) 고대 교회에서는 “신앙 고백”에 관한 가르침인 ‘신경 전수(traditio Symboli)’와 함께 “주님의 기도”에 관한 특별한 교리 교육인 ‘주님의 기도 전수(traditio orationis dominicae)’가 이루어졌다.(V. Grossi, Il Padre nostro. Per un rinnovamento della catechesi sulla preghiera. Tertulliano, Cipriano, Agostino, Roma, Borla, 1983, 23-28 참조)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전에 무엇을 믿는지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분이 믿는 그분께 간청하는 법을 배웠습니다.”(『설교』 57,1,1) 테르툴리아누스도 주님의 기도는 “마치 요약집처럼 그 안에 모든 복음을 담고 있다”고 했다.(『주님의 기도』 1,6; 9,1) 키프리아누스는 주님의 기도는 “천상 가르침의 요약”이며 “구원 계명의 훌륭한 종합”이라고 했다.(『주님의 기도』 9,28)

2)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의 기도에는 “온갖 거룩한 열망의 규칙들”이 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려 준다.(『인간 의로움의 완성』 56,3,4)

3)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열망하는 이에게 주시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시려는 까닭이기도 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설교』 56,3,4)

4) 반면, 루카 복음 11장 4절의 번역에서는 옛 라틴어 번역본들이 “저희를 유혹에 이끌지 마시고”(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라는 번역과 일치하는 것 같다.(A. Jülicher, Itala. Das Neue Testament in altlateinischer Überlieferung, Berlin – New York, W. De Gruyer, 1972, 128 참조)

5) P. Sabatier, Bibliorum sacrorum latinae versiones antiquae, seu Vetus Itala, et Caeterae quaecumque in Codicibus Mss. E antiquorum libris reperiri potuerunt, III, Parisiis, Reginaldi Florentain Typographia, 1751, 34 참조.

6) 『가톨릭 교회 교리서』 2846에서도 이런 해석을 지지한다. 

prev 교황권고 '사랑의 기쁨'에 관한 쇤보른 추기경과의 대화 - civilta catholica(교황청 잡지) -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prev "'저희를 시련에 빠뜨리지 마시고'-주님의 기도의 난해한 청원에 대하여" - civilta catholica(교황청 잡지) - 피에트로 보바티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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