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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감사, 감정을 훨씬 넘어서는 것" - civilta catholica(교황청 잡지) - 루이스 로페스 야르토 S.J
2018-12-20 21:26:49
박윤흡 (missa00) 조회수 1148

감사, 감정을 훨씬 넘어서는 것

 

LA GRATITUDINE, MOLTO PIÙ CHE UN’EMOZIONE1)

루이스 로페스-야르토 S.J.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옮김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감사는 보통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덕’(virtù)이다. 감사를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연구하기 수백 년 전에도 종교 창시자들과 위대한 예술가들이 ‘감사와 배은망덕’(gratitudine-ingratitudine)의 차원을 다루었다. 세르반테스는, 그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1615년에 감사의 근본 요소를 열거했다.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에 대해 말하기를, 어떤 자들은 교만함이라고 하지만 나는 배은망덕함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보아도 ‘지옥에는 배은망덕한 자들이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이 죄악을, 나는 가능한 한, 이성을 갖게 된 순간부터는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만일 나에게 베풀어 준 좋은 행동을 다른 행동으로 내가 갚을 수 없다면, 그런 행동을 하고자 하는 소망으로라도 그것을 대신하지요.”2)

  감사는 과거의 전통은 매우 길지만 학문적 역사는 매우 짧다는 점에서 심리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사상, 문학, 특히 종교에서는 언제나 감사(라틴어 은총gratia)를 ‘무언가를 무상으로 받았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태도’로 다루어 왔다. 그것은 행위나 말로(‘선행’ 또는 최소한 돈키호테가 말한 것처럼 거저 받았음을 안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 드러내는 정신의 상태이다. 많은 학자들이 긍정심리학을 연구하고자 할 때 안타까워하는 점은 감사에 관하여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시편 』3)이나 종교 창시자들의 어록, 또는 이냐시오 성인의『영신수련 』4)과 달리 심리학 분야에서 감사에 관한 학문적 연구의 부재이다.5)

 

 

 

  최근에야 많은 심리학자들이 감사가 온전한 인격의 근본 요소임을 증명하고자 했고, 또 많은 이들이 감사를 전반적 성숙, 더 나은 대인 관계,6) 그리고 행복과 연관시키려 했다. 하지만 인간답게 만드는 바탕을 규명하고자 인격의 기능에서 감사나 그 반대편(배은망덕)이 가지는 심리학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일시적 감정을 훨씬 넘어서는 것

  감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사심 없이 행동하고 있음을 알 때 경험하는 예민하고 강렬한 느낌’이다. 그러나 느낌은 일시적이기에, 깊은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우연히 체험한 느낌만으로 어떤 사람이 한결같이 고마워하는지 아닌지를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감사가 한 사람의 인격에서 지속적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 감사의 체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무상으로 선물을 받았음을 알게 된 사람이 갖게 되는 놀라움이다. 그 선물은 그를 분노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에게도 긍정적이고 이타적으로 반응하는 정서 상태를 갖게 한다.

  태도, 곧 습관이 된 자세는 생각, 감정, 행위를 포함한다. 고마워하는 사람은 사심 없는 증여자에게 무언가 받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선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상호성이나 다른 어떤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 무상성에 감동할 줄 안다. 그러기에 예의나 외부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선을 선으로 갚으려는 진실하고 깊은 동기로 선을 행하게 된다.

  감사는 동시에 선행에 관하여 시간이 지나도 변하게 않는 특성을 지니게 해 준다. 기억은 흔히 감사하는 태도를 안정적으로 길러 준다. 그래서 우리는 항생제를 발견한 과학자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경의를 표할 수 있다. 감사가 집단 기억 속에 꾸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7)

  감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받은 선물이 이타적이며 사심 없이 주어졌음을 인식해야 하는데, 이는 처음에는 믿기가 어렵다. 이를 믿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 행위는 이기적이라는 역동 심리학에서의 신념과 어떤 행위도 보상 없이는 안정적일 수 없다는 행동주의에서의 신념을 물리쳐야 한다. 그래서 고마워하는 태도 안에는 놀라움의 의미가 들어 있다. ‘왜 나에게?’라는 놀라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러한 관대함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놀라움이 담겨 있다.

  여기서 결론을 두 가지 도출할 수 있다. 첫째,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 다른 이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감사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진정한 이타심을 보더라도 거기에 기만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둘째, 감사는 우리가 받은 호의의 결과와 무관하다. 예를 들면, 행방묘연하게 사라진 어린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비록 아이를 찾아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밤낮으로 아이를 찾는 데 스스럼없이 참여한 모든 이에게 크게 감사하는 사례를 들 수 있다.8)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을 때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를 도와주려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어떻게 애썼는지 알아차렸을 때도 진정한 감사를 체험한다. 이타적인 노력이 때로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기도 한다. 이는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받을 능력이 우리한테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태초에 자아도취가 있었다

  감사와 같이 본질적으로 대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태도는 삶의 초기 단계에는 아직 불가능하다. 어린아이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 사이에 경계가 불분명하기에 타자와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서 오랫동안 우리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고, 눈물 두 방울로 (무소부재한 어머니로 환원되는) 온 인류를 자신에게 봉사하게 할 만큼 모두가 인정하는 전능함을 지녔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힘들고 실망스러운 물리적 현실과 충돌하고, 다음에는 자신과 다른 뜻을 가진 사람과 충돌하면서 비로소 고통스럽게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다. 이 같은 한계 인식을 거치면서 자신의 성장과 실현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배우게 된다. 그래서 흔히 성년이 되어서도 지속되는 어린 시절의 자아도취는 감사에 큰 적이 된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진정으로 고마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전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무상으로 받았음을 결코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을 위하거나 사심 없이 줄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삭막한 세상에서 살아간다. 자아도취에 빠져 대화 없이 혼자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의 단계를 넘어서면 감사가 생겨나서 친밀한 관계가 쉬워진다. 내가 전능하지 않고 성장 능력이 다른 이들에게 달려 있다면 내 앞에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또한 관대하게 아무런 조건 없이 이타적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지닌 뜻밖의 풍요로움으로 둘러싸일 수 있는 놀라운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며 삶이란 주고받는 것이고 자신의 한계에 대한 실망을 견디면서 자신을 넘어 드넓은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임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의식’(rendersi conto)의 출현은 이미 일부 영장류에서 관찰되며, 문화를 넘어서 대개는 언어와 상관없이 발전한다.9) 그렇다면 감사의 주된 기능은 서로 간에 이타적 행위가 많아지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감사하는 사람과 정반대인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이러한 기능이 위축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사심 없는 행동도 인정하지 못하고, 그 자신도 자기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는 행동하지 못한다.

  카라바조(Caravaggio)는 사랑스러운 나르키소스(Narciso)를 그렸다. 나르키소스는 황홀경에 빠져 순진하게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나’(io)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찾는다. 그의 전망은 매우 단순하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평에 나타나는 다른 누구의 감정과도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한다.10)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자만의 ‘웅대한 환상’(fantasie grandiose)에 빠져, 사회에서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매우 유능할 수도 있다.11) 그의 문제는 언제나 성공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하고, 그 성공을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보증으로 여긴다는 데 있다.

  1975년에 이미 휴건(Hougan)12)은 미래가 없이 지금 순간을 즐기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사회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과 자신한테서 나가는 것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는 의식으로 인해 자아도취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마도 이러한 지적은 21세기 초인 지금 더욱더 사실이 되었을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불균형에 관한 보도에서 보이는 파국이 일어날 수 있다는 느낌과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매우 발전한 기술로 인해 사람들이 전능함과 무력함을 동시에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자아도취와 반대되는, 잃어버린 인격적 균형을 회복하는 태도를 연습하고 성숙시켜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감사는 그러한 태도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 실험 연구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능력이 자아도취와 반비례함을 상세히 보여 주는 결과가 반복해서 나왔다.13)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부 영신수련 동반자들이 피정하는 이를 영신수련 첫 주간에 깊은 체험을 하도록 안내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한탄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14) 자아도취의 시대에 생기는 이러한 어려움은 자기 한계와 관련된 모든 것에 현실 감각을 갖고 대응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계와 오류를 인정할 때 자신의 표상이 위협받는 것을 본 피정하는 이는 영신수련 셋째 주간 후에 자신이 즐거워하지 못하고, 또한 자신을 기쁘게 들어 높이기보다는 자신을 위축되게 하는 현실 앞에서 감사의 느낌을 갖기가 어려울 것이다.

감사와 인간적 성숙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의 비참함을 다루는 출판물이 많이 나타났다. 인간관계를 진지하게 다루는 첫 학술지는 Journal of Social and Abnormal Psychology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여기서는 관계를 맺는 것이 정상적인 성인들에게 큰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점차로 1980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그해 나온 Psychological Abstracts에는 ‘복지’(benessere), ‘행복’(felicità), ‘삶의 만족’(soddisfazione vitale), ‘이타심’(altruismo)과 다른 긍정적 변수들이 나오는 논문 제목이 780편 들어 있었다. 오래지 않아 1990년대에 셀리그먼(Seligman)이 제시하는 ‘긍정심리학’(Psicologia positiva)의 물결이 일어났다.15) 그때부터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중 많은 연구가 감사에 관심을 집중하며 명시적으로 긍정심리학에 관해 말했다. 이제는 이타적으로 주고 감사하며 받는 일이 우리의 온전한 발달에 속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감사는 ‘삶의 만족’(soddisfazione vitale)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실험들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16) 감사드릴 수 있는 참된 능력이 발달한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목표를 기쁘게 추구할 수 있으며, 삶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도 더 잘 견뎌 낸다. 이렇게 하여 심리학에서는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감사를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17)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역사에 관해 실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고,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스스로 양도할 수 없는 내적인 부유함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지금의 그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 다른 이들에 대해 평균 이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누리지만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데 비해서 감사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은 만족과 즐거움을 뚜렷이 중시하는 경향은 주목해야 한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인성을 다섯 가지 근본 요소로 이해하는 방식이 확산되었다.18) 경험에 대한 개방/폐쇄, 책임/무책임, 외향성/내향성, 다정함/적대감, 정서적 안정성/신경증이 그것이다. 그런데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은 일정하게 더 외향적이고, 더 개방적이며, 더 책임감이 있고 더 다정하게 나타나며,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신경증적인 성향이 적다.

  이처럼 긍정적인 자료들로부터 얻게 되는 중요한 결론은 인격적 성장의 전 과정에서 그리고 성숙한 인성을 만드는 데 진정한 감사의 체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감사의 체험은 기쁘게 고마워하는 태도를 안정적으로 지니게 해 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이타적인 선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을 깨닫는 법을 배우는 일을 포함한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지 않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특정한 표상을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의무감이나 죄책감이 없이 기쁘게 주는 선물을 다른 이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고, 분노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감사가 생겨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위험 요인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한다.

감사는 쉽지 않다      

  장차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으려면 감사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학자들도, 은혜를 입은 후에 자주 나타나는 일부 반응에 대해서는 경계한다. 예를 들어 흔히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의혹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다. 일종의 의무감과 속박을 나타냄으로써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감사를 훼손하기 때문이다.19)

  사회 규범은 다른 이들과 우리의 상호 작용을 인도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더 쉽고 예측 할 수 있게 해 주어 보편적 행동 지침이 된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두는 사회 규범은 ‘상호성의 규범’(norma della reciprocità)이다. 호의를 입고 나서는 이에 한 번도 호의로 응답하지 않는 사람과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상호성의 규범은 적어도 “우리는 우리를 도와준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고, 우리에게 선을 행한 사람에게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보인다.20)

  그렇다면 선물을 받은 다음에는 내 안에 어떤 의무감을, 즉 응답하려는 요구가 생겨남을 보게 된다고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응답할 수 없는 데 대해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유감을 느낄 수도 있고, 불편한 상황에서 항상 그렇듯이 일어난 현실을 달리 보려고 방어하기도 한다. 극적으로 말한다면, 감사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방어적인 망각으로 중단되거나 문제가 있는 죄의식으로 왜곡될 위험이 있다.

  이를 증명하는 예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예는 학문 세계에서 ‘장학생 증후군’(la sindrome del borsista)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장학금을 받는 것은 중대한 혼돈에 처하게 될 만큼 삶에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기진맥진할 만큼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 ‘은혜’(il favore)를 갚으려 한다. 아니면, 자신의 의무를 모두 면하게 해 줄 작은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장학금을 “내가 획득했다.”거나(나의 공로가 되기에 주는 사람은 사라진다.), “그들이 나에게 힘든 일을 요구했다.”(그러니 나 자신의 수고에 대한 보상일 따름이다.)라는 것이다. 사실 장학생은 때로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나야 한다.

  두 번째 예는 원조와 관련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관련된 학자들이 더 많이 연구했다. 부유한 협회들은 곤궁한 사회 집단을 매우 관대하고 사심 없이 아주 꾸준하게 원조한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매우 많은 자선을 베푼 일부 단체들은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전혀 감사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선을 받은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분열적 증세를 보이거나 의심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저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는 조종당할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일 것이다.” 하는 식이었다. 특이하게도, 주는 사람의 동기를 의심하는 경우가 가장 흔했다.21) 그래서 ‘갚음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원조자’로 보이는 사람을 ‘교활한 사람’(machiavellico)이나 순진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이제 우리는 더 높은 차원에서 몇 가지 주장을 제기하려 한다. 이는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탁월한 증여자이신 하느님과 갚음을 요구하지 않고 당신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점이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진정하고 놀라운 감사가 생겨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증여자가 제시하는 표상과 선물이 이루어지는 맥락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어떤 선행을 했는지 아는 것으로는 누구에게도 충분치 않고 대신에 선행을 행한 사람에 대해 정확한 표상을 형성하고 선물을 하게 된 배경 또한 인식해야 한다.

  오래전 행한 실험을 예로 들 수 있다.22) 그 실험에서는 중요한 호의를 입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 주고자 했다. 호의는 ‘관대한 원조자’(soccorritore generoso)가 베풀었는데, 그는 ‘매우 부유하여 그런 호의를 전혀 힘들지 않고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그런 호의를 베풀기 위해 실제로 희생을 하는’ 사람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때로는 호의가 ‘원금 상실’(a fondo perduto)의 형태, 곧 어떤 보상이나 호의로 갚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이자를 함께 갚도록’(fosse restituito con interessi) 주어질 때도 있었다. 때로 증여자는, 가능하다면 ‘이자 없이’(senza alcun interesse) 그의 손실을 갚아 주도록 요구했다.

  그러한 호의를 받은 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관찰한 결과, 은인에게 참으로 감사해하고 진정한 고마움을 느끼는 이들은 그들이 받은 선물이 ‘자신의 것을 잃어버린’(si privava del suo) 사람, ‘이자를 걱정하지 않고’(senza preoccuparsi di interessi) 갚도록 베푼 사람으로부터 왔음을 알았던 이들이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선물을 주는 은인은 불신과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주고받는다는 사실에는 복잡한 지각 과정이 개입된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 순간 즉시 어떤 성찰이 일어나는데, 이를 통해 무언가를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선물을 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선물을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또한 이 선물이 받는 사람에게 어떤 의무를 수반하게 하는지에 대해 표상을 형성한다. 진정한 감사가 일어나는 때는 다른 이가 선물을 나눌 때 참으로 어떤 수고로움을 겪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우리 자신이 의무적으로 따로 행할 필요가 없지만 자신의 처지에 따라 자유로이 응답할 수 있을 때이다.

  이 ‘다른 사람’(altro)은 누구인가? 그의 관대함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나는 그가 진실한 의도로 나를 도와주는지를 알아야 하고, 나의 한계와 비참함으로 인해 필요한 다른 사람의 도움이 내 인격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필요에 대한 의식이 언제나 선행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율적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다른 사람과 마주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이 어째서 자신의 가족에 속하지 않는 사람보다 가족에게 더 적게 감사해하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혈연관계인 사람들은 서로를 심리적으로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기에 가족들이 행하는 관대함을 관대함이라기보다 의무로 여기는 것이다.23)

  위대한 타자이며 모든 선을 주시는 분인 하느님을 향한 감사를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여기고 그분에 관해 어떤 표상을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초월성과 현존하시는 내재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보다도 그분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신비로운 무상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감사를 향한 여정

  2009년에 사라 브레스낙(Sarah Breathnach)은 『혼자 사는 즐거움』(Simple Abundance)을 출판했다. 저자는 현실에 기반한 실용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혼자 살아가는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한다. 그리고 늘 삶의 충만함에 이르기 위한 원칙으로 ‘매일 감사 일기 쓰기’(diario quotidiano di gratitudine)를 제시한다.

  어떤 비평가는 이냐시오의 의식성찰에 관하여 흥미로운 재발견을 하는데 이 성찰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가장 열렬한 변화의 힘’(più appassionante forza di trasformazione)이라고 말했다. 브레스낙의 소위 위대한 발견이란 우리 각자가 매일 매순간을 살아갈 때 다른 이들에게, 삶에,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할 동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브레스낙의 책이 출판된 뒤 단순히 내성(內省)의 한 형태로 제안한 일기가 실험 도구가 되었는데, 특히 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사회적 태도로서 감사 체험이 어떻게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할 때 사용한다.

  내성에 관하여 20세기의 심리학은 거의 한 세기 동안 관습적으로 ‘트라우마’(trauma)라는 단어를 특징으로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안에 무의식적 과정이 존재하고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발견은 심층 분석 활동을 크게 촉진했다. 그래서 우리 행동의 기초가 되는 ‘피할 수 없는 상처들’(ferite inevitabili)을 발견하도록 이론적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개인 역사의 근본적인 트라우마를 인정할 수 있다면 “신경증적 비참함을 보통의 불행으로 바꾸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24) 인간은 그 이상 많은 것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은 지극히 약한 자아로 충동이라는 불타는 악마와 이성이라는 차가운 악마의 지배 아래서 평생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운 위기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 고생한다. 그러기에 다만 자기 개인 삶의 드라마를 의식적으로 너무 순진하지 않게 살아내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트라우마적인 과거를 찾는 일의 이면에는 인간이 약한 존재로서 언제나 위협을 받고 있어 방어하는 처지에 있다는 비관적 관념이 숨어 있다. 즉, 인간은 애정 어린 돌봄을 받기보다는 인생길에 내던져진 수동적 대상으로 남들 앞에 내보일 만한 것이 못 되는 삶의 흉터들을 지니고 산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감사의 동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즉, 개인의 역사가 호의적 도움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하며 그 도움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만큼이나 우리의 인성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점을 뜻한다. 또한 인간이 다른 이들의 이타심으로부터 (그리고 그 첫 시작에서는 타자이신 하느님의 이타심으로부터) 태어나고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도움을 제공한 은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으면서 우리가 자신을 극복하고 자신과 비슷한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내어 주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을 마련해 주었다.

  사람의 중요한 특성을 형성하는 요인은 의무나 속박이 아니라 오히려 놀라움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갖게 하는 무상으로 받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데 있다. 그러기에, 모든 개인의 성장 목표란 단순히 신경증적 비참함에서 벗어나 보통의 불행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도취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이타적 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 해결을 향한 길은 쉽지 않다. 여러 저자들은 매일같이 감사하는 작은 행위가 지속적인 감사 상태로 변화하게 하는 방법을 꾸준히 실천하라고 제안한다.25) 그러나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이가 동의한다.

  a) 무엇보다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감사의 동기들은 트라우마적인 실재에 비해서 잘 지각되지 않는다. 그 동기가 인간 삶의 당연한 전제처럼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흔히는 자기연민적인 생각들로(“나는 이 모든 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어.”) 가로막히기 때문에 잘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거저 받는 것과 무엇이 자신의 참존재를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가에 관해 주의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b) 마음의 기억을 작동할 필요가 있다. 감사는 관계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여러 측면들을 가능케 도와주었던 이들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며 함께하도록 초대한다. 마음의 기억은 은혜를 받은 체험을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되풀이하여 재창조함으로써 길러진다. 아마도 많은 종교에 감사를 드리는 기도문이 있는 심리학적 동기는 마음의 기억을 유지할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c) 마지막으로, 상호 간에, 그리고 제삼자에게 이타심의 행위를 실현해야 한다.26) 감사하는 태도가 삶의 비극을 무시하는 전략이 될 수는 없다. 실제로는,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이란 자신에게 어떤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다른 곤궁한 이에게 선을 행하는 능력을 발전시키게 된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선을 행하는 자신의 이타심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에게까지 선을 행할 수 있는 개인은 사회적으로 확장된 감사의 태도를 완성하게 된다.

동일화의 모델들

  마태오 복음서(11,25-27)는 감사하는 마음의 가장 생생한 예 하나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실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때문에 깊이 괴로워하신 뒤에 이러한 노래를 시작하신다.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구절에서는 고양 상태를 보여 주는데, 이는 어떤 구체적 자극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 앞에 나오는 어떤 내용도 뒤에 나오는 노래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노래는 일시적 감정을 넘어서는, 놀라운 감사로 가득한 항구한 상태에서 솟아 나왔다. 그것은 깊은 데서 오는 감사의 상태이며, 코라진과 벳사이다 전체의 배반과 불충실도 그 기쁨을 흐리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의무도 수반하지 않는 감사의 기쁨이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게 당신과 대화를 나누시는 하느님의 거저 주시는 관대함을 기뻐하시며, 당신을 따를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질 선을 두고 기뻐하신다.

  여기에는 마치 가까운 친구와 말할 때처럼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는 인자하신 아버지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이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무상으로 받은 선물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관대함에 관해 말하고 모든 사람과 피조물이 반복될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게 되는 지평으로 시선을 고정하게 하는 진정한 타자성의 관계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받아들인다. 분명 자신의 이익은 개입되지 않으며, 어떤 해석이나 의심의 여지도 없고, 오직 감사하는 마음만이 남는다.

  “이것을〔유일하게 참으로 중요한 것을〕 …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철부지들은 자기도취적인 교만과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이다. 철부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받았는지 깨닫게 됨으로써 그 모든 것을 마음의 기억에 간직하고 그들 역시 인생길에서 만나는 많은 이웃에게 사심 없이 좋은 증거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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