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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예로니모 성인의 선종 1600주년 교황 교서
성경에 대한 애정
(Scripturae Sacrae Affectus)
성경에 대한 애정, 곧 기록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생생하고 감미로운 사랑’, 이것이 바로 예로니모 성인이 그의 삶과 노고로 교회에 남긴 유산입니다. 그의 선종 16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성 예로니모 전례 기념일 본기도에 나오는 표현들은1) 교회 역사상 뛰어난 이 인물과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커다란 사랑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해석의 열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생생하고 감미로운 사랑’은, 수많은 물줄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강물처럼, 학자이자 번역가이자 주석가인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 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예로니모의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 성경의 가르침을 알리고자 하는 열정, 성경 본문 해석자로서 지닌 기량,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열렬하고 때로는 거침없는 옹호, 수덕과 엄격한 은수 생활, 관대하고 섬세한 영적 안내자로서 지닌 전문성, 이 모든 것은, 그가 선종한 지 1600년이 지난 뒤에도, 21세기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소개
예로니모 성인은 420년 9월 30일 베들레헴 예수 탄생 동굴 근처에 있는 그가 설립한 공동체에서 선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자신이 성경 안에서 찾고 알게 된 주님께, 아마 375년 사순 시기에 열병에 시달리며 꾼 꿈속에서 이미 마주한 재판관이신 바로 그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였습니다. 이 꿈은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 곧 회개하고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재판관 앞으로 끌려 나간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떠올렸습니다. “나의 상태에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재판관께서는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키케로의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예로니모는 젊은 시절부터 라틴 고전의 명확한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반면에, 그에게 성경의 글들은 처음에는 투박한 비문으로 그의 고상한 문학 취향에는 너무나 거친 것으로 와 닿았습니다.
예로니모는 이러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여, 자신의 번역과 주해를 통하여 거룩한 글들이 다른 이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삶에 새롭고 더욱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이른바 “성경의 몸”(flesh of Scripture)과 사랑에 빠져 하느님 말씀의 종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특징지었던 지식 추구를 통하여, 학문으로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에게 더욱 큰 봉사를 하도록 그 방향을 재설정하여 젊은 시절 공부와 로마에서 받은 교육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로니모 성인은 교부학의 황금기로 알려진 시기에 고대 교회의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서방을 잇는 가교로서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아퀼레이아의 루피누스의 어릴 적 친구였고 암브로시오를 알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동방에서, 그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장님 디디무스,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성화상 전통은, 예로니모 성인을 아우구스티노와 암브로시오와 대 그레고리오와 함께 서방 교회의 네 명의 위대한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의 선임 교황님들께서는 다양한 기회를 빌려 예로니모 성인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셨습니다. 백년 전 예로니모 성인의 선종 1500주년에, 베네딕토 15세께서는 회칙 「위로자 성령」(Spiritus Paraclitus, 1920.9.15.)을 예로니모에게 헌정하고, 그를 “성경 해설의 가장 위대한 학자”(doctor maximus explanandis Scripturis)3)라고 세상에 소개하셨습니다. 더욱 최근에,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두 번의 연이은 교리 교육을 통하여 예로니모와 그의 업적을 소개하셨습니다.4) 예로니모 성인의 선종 16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저도 그를 기리며 성경에 대한 커다란 사랑으로 시작되는 그의 담화와 가르침의 시의적절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예로니모는 확실한 안내자이며 권위 있는 증거자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 말씀에 관한 제12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정기 총회5)와 저의 전임 베네딕토 16세께서 이 성인의 기념일인 2010년 9월 30일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6)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에서 베들레헴으로
예로니모 성인의 삶의 여정은 유럽과 동방 사이에 놓인 로마 제국의 길을 가로질러 이어졌습니다. 예로니모는 345년경에 달마티아와 판노니아, 곧 지금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경계에 있는 스트리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견실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358년에서 364년 사이 어느 날 그는 당시 관습에 따라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그는 로마에서 수사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로마에 머무는 동안 라틴 고전을 탐독하였으며, 당대의 가장 유명한 수사학 교사들 밑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그는 갈리아 지방을 따라 긴 여정에 나섰으며 현재 독일에 있는, 로마 제국의 도시 트리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먼저 아타나시오 성인이 전파한 동방 수도 생활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 체험에 대한 깊고 지속적인 갈망을 품고 아퀼레이아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복된 이들의 성가대”7)라 불리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공동생활의 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374년 즈음에, 그는 수덕 생활을 더욱 철저히 실천하기 위하여 안티오키아를 지나 칼치스 사막에 은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수덕 생활을 통하여 성경 언어 연구에 매진하여 먼저 그리스어를 익힌 다음 히브리어를 익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습니다. 이 유다인은 히브리 말과 그 발음에 대한 지식을 알려 주었는데, 그 발음은 예로니모에게 “거센소리”8)로 여겨졌습니다.
예로니모는 의식적으로 사막과 은수 생활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막과 은수 생활은 가장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자리이자 하느님과 만나고 친교를 맺는 자리로서 그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는 관상과 내적 시험과 영적 투쟁을 통하여 자신의 약점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한계를 더욱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또한 그는 눈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9) 사막에서 그는 하느님의 실질적 현존과 인간과 하느님의 필연적 관계와 그분의 자애로운 위로를 느꼈습니다. 여기서, 저는 출처 미상의 한 일화를 떠올립니다. 예로니모가 주님께 “당신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여쭙자,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나에게 아직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당신께 온갖 것을 다 드렸습니다.” “네가 나에게 주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너의 죄를 다오. 그러면 나는 그 죄들을 다시 한번 용서하며 기뻐할 것이다.”10)
그다음 예로니모는 안티오키아에서 그 도시의 주교 바울리노에게서 사제품을 받았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