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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교종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 - civilta catholica(교황청 잡지) -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2018-08-08 23:00:29
박윤흡 (missa00)

교종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

돌봄, 공감, 위로1)

IL VIAGGIO DI PAPA FRANCESCO NELLA REPUBBLICA DI COREA:

Custodia, empatia, consolazione

안토니오스파다로신부(예수회)

이창준로사리오수사옮김(예수회)

  2014년 8월 14일 오전 10시 15분, 교종 프란치스코를 태운 알이탈리아 항공은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하였고 한국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교종은 비행 중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벨라루스, 러시아, 몽골, 중국 영공을 거치며 각국 지도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중국 영공을 비행한 것이다. 교종이 중국 영토 위를 비행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로마에 돌아오면서 그 순간의 감동을 되새겼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안부를 전하며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축복하였다. 2014년 8월 14일 오전 10시 15분, 교종 프란치스코를 태운 알이탈리아 항공은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하였고 한국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교종은 비행 중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벨라루스, 러시아, 몽골, 중국 영공을 거치며 각국 지도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중국 영공을 비행한 것이다. 교종이 중국 영토 위를 비행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로마에 돌아오면서 그 순간의 감동을 되새겼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안부를 전하며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축복하였다.
  교종의 방문 목적은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대전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의 참석이었다. “아시아의 젊은이여, 일어나라! 순교자의 영광이 너희를 비추고 있다(Gioventù dell’Asia, alzati! La gloria dei martiri brilla su di te)”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에서 교종은 23개국의 참가자들을 만났다. 이들 중 60명은 중국 젊은이들이었다. 반면 북한은 누구도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 방문은 프란치스코 교종에게는 세 번째 사도적 순방인 동시에 역대 교종의 세 번째 한국 방문이다. 이전에는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가 두 차례 방한하였는데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103위 한국 순교자들을 시성하였고, 이어서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 다시 방한하였다.

방문 일정

  교종 프란치스코의 여정은 바쁜 일정으로 채워졌다. 요컨대 교종의 동선은 그의 해외 방문이 지닌 의미를 온전히 반영한다. 첫날인 8월 14일,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교종은 청와대에 들러 대통령과 주요 공직자들을 만났다. 이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현지 주교들을 만났다.
  둘째 날에는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대전 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했다. 미사 참석한 신자들 중에는 세월호 침몰 사고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이 있었다. 이 사고는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해상에서 발생한 사고로, 299명의 희생자와 5명의 미수습자가 발생하였고 이들 중 대다수가 어린 학생들이었다. 교종은 유가족들이 받은 무거운 고통에 같이 슬퍼하였고 여러 방식으로 연민을 드러냈다. 교종은 자신의 흰색 수단에 그가 받은 노란 리본을 달았다. 이는 참사가 일어난 날부터 정부에 진실과 정의를 촉구하는 유가족을 지지하는 상징으로 정파적 행위가 아니라 깊은 연대의 표시였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로마로 돌아오는 기내 기자 회견에서 세월호 리본을 들어 보이시면서 이 리본을 착용한 것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밝혔다. “그대가 인간의 고통을 마주할 때, 그대의 가슴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Quando ti trovi davanti al dolore umano, devi fare quello che il tuo cuore ti porta a fare).2)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 중 한 명의 아버지이자 예비 신자로 십자가를 지고 900km 순례를 마친 이호진 씨를 만났다. 교종은 8월 17일 교황 대사관 경당에서 직접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교종은 미사 후 삼종기도에서 이 침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였다.3)
  교종은 제6차 아시아 청년 대회에 참석한 이들을 만나기 위해 대전에서 솔뫼 성지로 이동하였다. 이곳은 첫 한국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가 태어난 곳이다. 이 만남은 아시아 23개국에서 온 6,000명의 젊은이들이 성지 근처에 자리한 대형 흰 천막 아래 모여 어우러진 다채로운 행사였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입은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로 메시지를 던졌는데, “Papa Speranza (희망의 교황님)”, “Svegliati (일어나라)”, “Alzati e risplendi (일어나 비추어라)” 등 행사의 주제어를 담은 것이었다.
  셋째 날 교종 프란치스코는 조선의 초기 천주교인들이 사형당했던 서소문 순교 성지를 들러 기도하였다. 이어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하여 윤지충 바오로와 123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시복하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첫 세대로 한 명의 사제를 제외한 모두가 평신도였다. 유일한 중국인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시복식에 참석하였다. 약 백만 명이 광화문 광장부터 시청 광장까지 이어지는 넓은 공간에 운집하였다. 이 공간 전체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넘쳐났지만, 모두가 작은 방석에 앉아 고개 숙여 귀 기울여 듣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매미 울음소리만 들렸다.
  이날 오후에 교종은 꽃동네를 찾았다. 이곳은 희망의 집이라는 장애인 재활 시설을 운영하는 기관으로 오웅진 요한 신부가 1970년대에 설립하였다. 장애가 있는 고아들 틈에서 교종은 온전한 편안함을 느꼈다. 교종이 큰 고통을 짊어진 젊은이들과 어린이들과 만나는 모습에 수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 몇몇은 교종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지역 언론은 교종이 보인 자세에 주목하였고 특히 한 아기가 교종의 손가락을 입에 넣은 장면에 집중하였다. 이들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프란치스코는 “낙태된 아기들의 정원”(Giardino dei bambini abortiti)이라 불리는 작고 하얀 십자가들이 가득한 잔디밭에서 잠시 기도하며 머물렀다. 교종은 또한 꽃동네에서 한국 수도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만났다.
  나흘째에는 조선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산 채로 매장당하기도 하였던 해미 “무명 순교자 성지”(Santuario del martire ignoto)를 방문하였고 이곳에서 교종은 아시아 주교들을 만났다. 오후에 교종은 해미 읍성으로 이동하여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를 집전하였다. 미사 직전에 마련된 제대가 눈길을 끌었는데, 실제 각국을 대표하는 23명의 젊은이들이 가져온 나무 십자가들을 조립하여 제단을 구성하였다. 저녁에 교종은 계획되지 않은 개인적 일정을 결정하였다. 서강대학교에 자리 잡은 예수회 공동체에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예수회원들은 이 소식을 불과 24시간 전에 전해 받았다.
  닷새째이자 마지막 날인 8월 18일, 교종 프란치스코는 서울에 있는 명동 대성당에서 한국의 종교 지도자들과 짧게 만났다. 공간은 협소하였고 간단히 인사를 나눴지만, 교회 공동체 지도자와 다른 종교 지도자 모두에게 정감 있는 인사였다. 그리고 교종은 한국의 모든 주교들과 함께 이번 방문의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며, 한국의 평화와 화해를 기원하였다.
  미사 전에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들과 인사를 나누었다.4) 그들은 젊은 시절에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몸을 빼앗겨야 했던 이들이다. 한국의 언론은 교종의 이 만남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미사 후 교종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있는 곳에 들렀다. 이어 성남 서울공항에서 로마로 다시 떠났다.

한국, 아시아의 관문: 최전선이자 관문

  교종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계 청년 대회 후에 한국 대전교구의 유흥식 라자로 주교에게서 처음 초대를 받았다. 이때 교종에게는 이 초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분명한 확신이 내면에서부터 올라왔다. 교종이 이 초대에 응답한 것은 이성적 판단에 따라 동기가 유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적 결단이자 식별의 결과였다. 왜 하필 한국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종 프란치스코 자신이 특별히 최전선을 선호한다는 점과 교종의 세 번째 국제적 방문으로 한국을 결정한 것을 연결 지을 필요가 있다.
  제28회 세계 청년 대회는 교종 선출 이전에 이미 예정된 방문이었으며, 예루살렘을 방문(2014년 3월 24-26일)하고 나서 교종은 알바니아, 필리핀, 스리랑카에 방문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첫 번째 여정은 말할 것도 없이 이탈리아의 람페두사를 방문한 일이다. 람페두사는 지중해에 위치한 작은 섬이지만 “유럽의 관문”(Porta d’Europa)이란 특성이 있다. 이는 2008년에 조각가 도메니코 팔라디노(Domenico Paladino)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확인된 특성이다.5) 람페두사는 지리적으로 개방적인 곳이며 문화적 교류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난민들이 다다르는 곳으로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난민들의 삶의 극적 긴장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변방인 동시에 관문, 최전선, 국경, 입구이다.
  매우 유사하게도, 교종은 한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이탈리아의 람페두사처럼 대조적인 특성들을 제시하였다. 청와대에서 공직자들을 만날 때를 돌이켜 보면, 그는 한국의 자연과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폭력에 관하여도 언급하였다. 한국은 아름다움과 폭력의 양립이라는 긴장의 최전선에 있다. 이 때문에 유럽의 관문인 람페두사와 같이 한국에서도 아름다움과 비극이라는 모든 차이점을 상기시킨다. 프란치스코는 전임 교종 베네딕토 16세가 여행하지 못했던 대륙인 아시아의 관문인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또한, 교종의 한국 여정의 시작은 아시아 젊은이들의 여섯 번째 만남에서 비롯하였으며 그는 이곳에서 아시아 전역에서 온 주교들을 보았다. 오늘날 이 지역은 그리스도교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최전선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교회의 현실과 부르심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큰 숫자는 아니지만 괄목한 만한 성장을 보여 주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지역 교회 공동체이다. 
  프란치스코는 원형의 구체가 아니라 다면체를 사랑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구체에서 표면의 모든 점은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고 다면체에서는 모든 면이 제 모습을 지닌다. 그리고 “거의 세상 끝에서”(quasi della fine del mondo)라는 표현이 교종에게 다가왔고, 아시아는 다면체의 면으로서 마테오 리치가 같은 방법으로 정확히 “세상의 끝”(fine del mondo)이라고 정의하였다. 교종의 이 시각에서 주변부와 최전선은 단지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류에게 복음을 나누기에 보다 적합한 강론대이다.
  한국의 역사는 동시에 두 가지 영향을 받은 최전선으로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하나는 문화적으로 평화로운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비롯한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영향이다. 한국에서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냉전에서 오는 긴장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20세기 후반에도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 영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한국은 무엇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유교적 전통을 지닌 지역이다. 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은 유교나 샤머니즘과 같은 데서 비롯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감성 역시도 마찬가지이다.6) 불교와 도교도 그렇다. 
  게다가 오늘날 한국에 관하여 더욱 눈여겨볼 만한 소설 중 하나의 이탈리아판 제목이 흥미롭다. 한말숙 작가의 “최전선의 찬가”(Cantico di Frontiera)가 그것이다.7) 교종도 솔뫼에서 청년들과의 만남에서 다양성을 해치지 않는 일치를 강조하면서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어 더 풍요롭게 하는 일치를 이루도록 하라”고 주문하였다. 한국은 수많은 대립이 실재하는 상황에서 이를 조화를 이루어 일치에 도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 복잡한 현실 속에서 영적으로 풍부한 그리스도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였고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학자인 한국인 평신도들로부터 은총을 키웠다는 점을 발견한다. 17세기 초반부터 북경에 파견된 조선인 사절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나 그들과 종교적 주제를 토론하였다. 그들로부터 한국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선포한 이들이 작성한 글들을 받았다. 특히, 예수회원인 마테오 리치가 작성한 “천주실의”(1603)는 유교가 진리에 이르는 하나의 길임을 제시하였다.
  1784년에 이르러 학자들 중의 한 명이 베이징에서 천주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귀국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1836년 첫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공동체는 평신도의 신앙과 증거로 지탱하였다. 교종이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 교회는 본래 “성직주의의 유혹”(la tentazione del clericalismo)에 빠지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 나아가는 평신도들이 있었다”(andavano avanti da soli).
  이렇듯이 그리스도교가 “지적 호기심에 자극”(fu stimolata dalla curiosità intellettuale)을 받아 한국에서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광화문에서 열린 첫 순교자들의 시복 미사 중 프란치스코 교종이 언급한 것처럼 지혜를 향한 인간의 탐구가 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인간적 지혜와 추상적 신앙의 충돌과 같은 경계와 도전 역시 분별할 수 있다. 이 지혜에서 신앙으로 나아가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촉발한다.
  이는 마테오 리치가 시도한 길이며, 그의 유산은 한 세기 반이 흐르고 중국에서 다른 지역까지 멀리 전해졌다.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은 리치의 길이 열매 맺었음을 확인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 맥락에서 한국은 아시아의 관문이다. 사실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아시아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풍요로운 철학적 종교적 전통을 지닌 아시아 대륙은 여러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여야 할 거대한 최전선으로 남아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계층과 위계 안에 사회를 이룬 유교 사상으로 교육받은 첫 한국 신앙인들이 그리스도교를 증언하고자 모두가 형제로 지낸 점은 인상적이다. 세례받은 모든 이가 똑같이 존엄하다는 신념은 “당시 그들이 살던 시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도전하면서도 그들을 형제적 삶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시복 미사 중 교종의 강론에서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이러한 혁명적 가치의 메시지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 안에서 또한 박해와 순교의 원인 중 하나였다.
  교종은 마치 사회적 긴장에 놓여 있는 듯한 한국 땅에서 순교자들이 보인 형제적 연대의 증거가 빛을 비춘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사회 제반의 문제, 정치적 분열, 경제 불평등 및 환경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당면한 필요를 충족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 영적 성장을 하도록 북돋워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 문화적, 영적, 사회적 긴장과 같이 모든 최전선에서 오는 긴장은 프란치스코에게 한국을 방문하라는 확신을 주었다. 교종은 그의 공감하는 태도로 이 갈등들을 어루만지며 인정 있는 이웃이 되어 주었다. 특별히 한국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주목하였다.

영적 풍요로움 그리고 승리주의, 번영,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유혹

  한국과 아시아의 주교들에게 교종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영감을 주는 담화를 나누었다. 이 담화에서는 한국 방문에 있어 본질적인 열쇳말을 담았으며, 교회의 밑그림과 한국 교회 공동체가 도전에 직면해야 하는 세 가지 위험을 다루었다. 이 내용을 짧게 요약하고자 한다.
  승리주의(Trionfalismo). 교종은 한국의 주교들에게 가장 먼저 그들의 임무가 “기억의 지킴이”(custodi della memoria)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한국인이 가진 문화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움을 인지하였다. 이 지혜를 간직하고 지키는 것은 고대의 유물로 여기거나 과거의 가치로 박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식견과 결단으로 미래를 향한 희망, 약속,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영적 자원”으로 활용하라는 의미이다. 한국 교회의 풍부한 역사는 도전에 있어 회심과 진전으로 나아갈 장을 열 것이다. 이 기억이 승리주의에 도취되는 태도로 여겨지는 상황에는 주의해야 한다!
  평신도의 뿌리에서부터 자란 한국 교회는 빠르게 성장 중이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는 5백만 명이 넘으며 전체 인구에서 11%에 달한다. 사제는 약 5,000명 정도이며 1,500명의 남자 수도자, 10,000명 정도의 여성 수도자가 있다. 이 교회는 또한 상당한 선교적 자극을 받아, 선교사 또는 신앙의 선물(fidei donum)로 약 1,000명의 사제가 해외에 있다.8)
  이는 미래에 긍정적이고 고무적일 테지만 사목적 “성공”(successo)에 도취하는 유혹이나 영적 마케팅을 촉진하는 위험을 수반한다. 그래서 교종은 한국 교회가 사회의 경쟁적이고 기능적인 모델에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는 점을 자각하였다. 교종은 주교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예언자저적인 복음의 증거는 한국 교회에 특별한 도전들을 제기합니다. 한국 교회가, 번영되었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기업 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 우선하여 취하려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
  번영(Benessere). 한국 주교들은 또한 “희망의 지킴이”(custodi della speranza)로 부름을 받았다. 교종은 희망의 덕목을, 즉, 미래에 그리고 현대에 온전히 몰두하려는 교회가 처한 모든 긴장을 다루었다. 이 긴장은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려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 난민들, 이주민들과 교회가 결속하여 예언자적 증거에 더욱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나타난다. 교종은 주교들과의 담화 중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긴 설명을 이에 덧붙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연대는 “복음의 중심”(il centro del Vangelo)이라 하였다. 그러나 번성하려는 그 순간에 유혹이 떠오른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스스로 사회화’(si socializzi)하여 신비적 측면을 잃는 것이다. 신비를 거행하는 임무를 잃어버리고, 그리스도교의 가치는 지녔으나 예언자적 누룩이 없는 그리스도교적인 조직으로 탈색된다”. 교회가 변화할 때 걱정되는 모습은 “중산층의 공동체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수치심을 일깨우는 것”일 수 있다. 이를 두고서 교종은 “영적 번영과 사목적 번영의 유혹”(la tentazione del benessere spirituale, del benessere pastorale)이라고 정의 내렸다.
  프란치스코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저는 믿음 안에서 제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할 형제로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선교하는 훌륭한 교회이고, 커다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가라지를 심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바로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하나의 웰빙 교회 . . .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번영의 신학’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저 그런 안일한 교회는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거리(Distanza). 세 번째 유혹은 거리에 관한 것이며, 사목자들과 신자들 사이는 물론 교회 안에 주교와 사제들 사이에서도 가까운 거리를 잃는 것이다. 교종은 이를 주교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여러분의 사제들 곁에 머무르십시오. 당부합니다. 사제들 곁에 가까이 머무르십시오. 사제들이 주교를 자주 만날 수 있게 하십시오. 형제로서 또한 아버지로서 주교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 사제들은 사목 생활의 많은 순간에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주교가 사제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사제들을 멀리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교종은 지금 여기서 강하게 위계 지어진 사회 모델이 교회 정신(mens)으로 들어올 위험을 지적한다. 이 위험은 사용주가 조직을 실행하는 것처럼, 잘 지켜져야 할 규칙이나 관계 안에 세부적으로 따라야 하는 관습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교종 프란치스코의 담화를 다시 주의 깊게 읽어 볼 때에,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가까이 다가가는 교회상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이는 교종의 재임 초기부터 교종이 그의 “예언자적 구조”(struttura profetica)를 이야기하며 제안한 내용이다.

“우정”의 정치와 외교

  교종 프란치스코의 한국 사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외교적이나 정치적 접근으로부터 사목적 접근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은 점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이라는 지역은 위도 38도선 국경을 따라 73년간 드러난 상처로 특징지어진다. 남한과 북한은 평화를 이루지 않았다. 단순한 휴전 중이며 이는 이론적으로 어느 순간에든지 깨질 수도 있는 것이다. 비무장 지대로부터 남과 북을 가르는 철조망을 보는 것은 눈에 선한 고통스러운 한국의 비극을 떠 올린다. 
  하지만 교종 프란치스코는 “남한”이나 “북한”이란 말은 전혀 하지 않았고 한국(Corea) 또는 한반도(penisola coreana)라 일컬었다. 솔뫼에서의 젊은이들과의 만남 중에 교종은 한 청년의 질문에 답했다. “하지만 두 한국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한 한국이 있으나 갈라져 있습니다. 가족이 갈라져 있습니다. 여기 고통이 있고 …… 이 가족이 하나가 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는 조언과 희망을 주었다. 그 조언은 “주님,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우리를 도우소서. 당신이 하실 수 있으니, 하나 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오직 한 가족만이 있고 오직 형제들만이 있게 하소서”라는 기도이다. 희망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은 하나이고, 하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같은 언어를, 가족의 언어를 씁니다. 여러분은 같은 언어를 말하는 형제들입니다. (성경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먹을 것을 사러 이집트에 갔을 때 – 그들은 굶주렸고, 돈은 있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 양식을 사러 그곳에 갔을 때, 그들은 형제를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발견했을까요? 그것은 요셉이 그들과 같은 언어를 말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북한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같은 언어를 말합니다. 가족 간에 같은 언어를 쓸 때에는 인간적으로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의 두 가지 외재적 관점에서 이 대답은 조심스럽게 검토된다. 첫 번째는 교종이 승자와 패자, 희생자와 가해자의 논리를 무너뜨려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구성한 점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땅에서 통일에 관한 그의 예언자적 발언은 모국어에 기초를 둔다.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기에 한국인은 단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이 관점은 프란치스코가 예루살렘에서 행동에 옮긴 방식과 같다. 예루살렘 방문 중 그의 담화는 기하학과 논리학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어 희생자를 가해자로부터 구별하였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게끔 하는 미래에 대한 모든 긴장을 치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통곡의 벽 앞에서 오랜 시간을 넘어선 세 벗이, 즉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인 오마르 아부드(Omar Abboud), 아브라함 스코르카(Abraham Skorka), 포옹한 것과 같은 상징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9)
  결국 교종은 마테오 리치(Matto Ricci)의 길, 즉 그가 우정에 관하여 중국어로 남긴 “교우론”(Sull’amicizia, 1596)의 방식을 택했다. 이 책은 예수회원에게 유럽의 국가 간 교류를 활발히 하게 한 센겐(Shengen) 조약과도 같은 역할을 하며 “영감을 받은 이론”(saggio ispirato)인 셈이다. 여기서 가시 돋힌 경계선 앞에 선 프란치스코의 태도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는 철조망을 어루만졌으나 “헐뜯지”(pettinarli) 않았다. 우정은 외교 전략의 의미를 넘어 가치를 지니며 어떤 때에는 위선을 베일로 덮어 감추기도 한다. 교종은 해미에서 아시아의 주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대화는 한갓 협상의 형태나 서로 서로 표면적인 합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표면적인 합의 . . . 이러한 피상성은 우리에게 큰 해를 끼칩니다.”10)
  그렇기 때문에 우정의 길은 결정적이며 우선적이다. 프란치스코는 우정의 길을 선택하면서, 간단하지만 위선을 지닐 수 있는 위험성에서 벗어난 예언자적 태도를 선호한다. 이처럼, 교종은 모국어라는 관점에서 질문을 제시하고 나서, 때로는 부정되거나 날조될 수 있는 공동체의 뿌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경우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곳 한국에서도 귀중한 응원을 기도로 나누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 8월 18일 아침 미사를 집전하며 평화 그 자체와 한 가정을 이루는 “이 한민족의 화해”(la riconcilizaione in questa famiglia coreana)를 지향하였다. 교종은 강론 중 언급한 것처럼 “온 민족이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청을 하늘로 올려 드리는”(un intero popolo innalza la sua accorata preghiera al cielo)이란 표현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기도하였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불가능하고 비실용적이며 심지어 때로는 거부감을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무한한 능력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또한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분열의 간격을 메우고, 모든 상처를 치유하며, 형제적 사랑을 이루는 본래적 유대를 재건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한국 방문을 마치며 여러분에게 남기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
  교종이 제의를 입기 위해 제의실에 들어섰을 때 선물 하나를 발견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 선물은 한반도의 남북을 갈라놓은 철조망을 떠올리는 가시관이었다. 꽤 설득력 있는 이 선물은 한국에 있지 않고 교종이 직접 챙겨갔다. 그리고 이 주제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다시 상기시켰다.11)

복음화의 길: “공감”

  다른 주요한 아시아에 관한 담화는 8월 17일 아침 해미 성지에서, 한국의 주교들과의 담화 이후에 아시아 주교들을 향한 담화로 이어졌다.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은 담화였다. 교종은 “모든 이들을 향한 대화와 개방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가운데 다채롭고 창의적인”(versatile e creativa nella sua testimonianza del Vangelo, mediante il dialogo e l’apertura verso tutti) 교회의 전망을 제시한다. “열린 문”(porte aperte)에서부터 교회가 지닌 “밖으로 나가는”(in uscita) 교회상을 여기서 확인하고 심화한다.
  먼저, 프란치스코는 대화를 위해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교종이 제시한 “정체성”(identità)이란교종 개념은 고정되거나 박제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려는 조용한 노력에서,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과 소망하는 것을 또 우리가 믿는 그분을 우리의 모범을 통하여 보여 주려는 조용한 노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2티모 1,12).
  교종이 말하는 정체성은 항목이 완성된 목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미래에 초점을 맞춘 역동적인 것이다. 그래서 정체성은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 밝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희망하는 지까지 밝힌다. 그러나 우리 정체성을 의식하지 않고 “공감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대화는 불가능한 채로 남는다.
  여기서 핵심은 “공감”(empatia)이다. 프란치스코에게 정확히 무엇이 공감인가? 그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며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그러한 관심으로 인도하신다”(È una attenzione, e nell’attenzione ci guida lo Spirito Santo)고 상술한다. 따라서 심리적일 뿐만 아니라 깊은 영적인 태도이다. 그리고 교종은 도전 속에서 공감을 잘 이루는 길에 대하여 “(공감은)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말로 하지는 않지만 전달되는 그들의 경험, 그들의 희망, 그들의 열망, 그들의 고난과 걱정도 듣는 것입니다”라고 상술한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잘 정리된 단어들과 담화를 넘어서는 영적 태도를 바란다. 흔히 영적 감수성은 “단어들과 행동을 가로지르고 넘어서 형제자매와 같은 다른 이들을 보고 ‘들어’(ascoltare), 그들의 가슴이 소통하기를 바라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자기 자신, 염려, 개인적 생각으로부터 떨어져 다른 이에게 관심 그 자체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에 경청을 가치 매기기보다는 다른 이의 깊은 감정과 필요를 이해하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
  교종은 대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이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 오히려 의미와 방법을 심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프란치스코는 한 걸음 더 가아가 우리에게 “다른 이들에게 열려 있고 환대하는 관상적인 영혼”(spirito contemplativo di apertura e di accoglienza dell’altro)이 확인되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개방”(apertura)으로 충분하지 않고 환대를 필요로 한다. “내 집에, 내 마음에 들어오도록 해야 하고, 내 마음으로 상대를 맞아들이며,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은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며, 진정한 대화에서는 형제애와 인간애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질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특별히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화를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깊은 성찰을 드러낸다. 복음화는 집과 함께 그리고 그 집에서 환대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교종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어디에서 기초를 찾을 수 있는가? 그는 일반적인 인간성을 인지하는 데 우선적인 기초를 둔다. 그러므로 대화는 생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 때로는 사람다운 것이다. 이러한 점은 모든 면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지닌다. 여기서 모든 한국인을 하나로 묶는 같은 모국어에 대한 성찰의 토대도 발견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교종과 다른 두 벗인 아부드와 스코르카가 서로를 포옹한 근본적인 의미 또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더 넓은 배경을 향해 대화의 전망을 적용하면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다른 이들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저는 아직 성좌와 완전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몇몇 국가들이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주저 없이 대화를 추진해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정치적인 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인 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 . . . ‘그러나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정복자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가져오지만, 그들은 우리와 함께 걸어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때로는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세례를 청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이것이 대화의 핵심입니다.” 기자들의 대다수는 특별히 중국을 향해 손을 내미는 듯한 이 표현에 주의를 기울였다.12)
  아시아 주교들과의 담화에서 교종은 언제나 나누려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이 공감의 신학적 토대 또한 제공한다. “우리가 이에 대한 신학적 기초에 다다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버지께 이르게 됩니다.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근원적인 형제 관계 안에서 대화의 뿌리를 창의적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대화 안에서 우리가 서로 서로를 개방할 때 우리는 우리를 하느님께도 개방한다”13)고 반복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이 공감하는 자세는 대화에 기능적으로 임하는 선교와 대립하기에 끝을 맺게 되지 않을까? 프란치스코는 이를 거부하는 답변을 내놓기 위해, 문답식으로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교황님,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지만 개종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습니다 . . . ’ 그러나 어쨌든 여러분은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앞에서 흠 없이 살아가라.’ 그렇게, 나의 정체성과 나의 공감, 열린 마음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갑니다. 나는 그를 내 편으로 끌어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개종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교종 베네딕토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개종 권유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으로 성장합니다.’”
  교종은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도구적 자세와 결합한 모든 유혹을 떨쳐 낸다. 대신에 거대한 아시아 대륙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땅, 유구한 문화와 전통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자각한다.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정말 작은 양 떼(pusillus grex), 작은 무리이지만, 땅 끝까지 복음의 빛을 전하도록 여전히 선교사명이 주어진”것도 한 특징이다.
  서울 명동 대성당 미사 전 교종은 한국 종교 지도자들과의 간단한 만남에서, 아시아 주교들에게 남긴 이야기를 되새겼다. 교종은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와 짧지만 강렬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다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과 다른 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삶이라는 것은 길입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다른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여러 종교지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함께 걸어가는 겁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향했던 길이기도 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형제들로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걸어가도록 하십시다.”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는 교종 바오로 6세가 1964년 몸바이에서 나눈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교종 바오로 6세는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서 하느님을 찾기 위해 여행하는 순례자입니다”(tutti siamo pellegrini in viaggio per trovare Dio nel cuore umano)라고 이야기하였다.

위로하는 영혼

  솔뫼에서 아시아 젊은이들과의 만남 후에 교종은 헬리콥터에 탑승했다. 하지만 교황 대사관에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에 서울 서강대학교 예수회 공동체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아주 친숙하고 단순하며 자발적인 분위기에서 사적인 만남의 형식을 취했다. 교종은 이 분위기를 매우 즐겼으며, 단순하고 힘 있는 담화를 나누었다. 이 담화는 공식 담화문에 보고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정확히 한국 방문 중반에 이루어졌으며, 여기서 그의 말과 행동을 움직인 영혼 깊은 곳에 관한 의미 있는 빛을 엿볼 수 있다. 
  한국 관구의 예수회원들에게는 매우 인상적인 한 단어를 전하였다. “위로(consolazione)란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적 위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부 이냐시오 성인이 늘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선택에서 두 번째 방법, 즉 위로를 통해서 삶의 개선이나 신분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14)4 그 선택의 기준이 바로 위로였습니다. 위로는 그것을 받는 이에게는 정말로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위로를 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을 때, 하느님이 일하시는 바로 그 모습에서 당신 백성을 위로 하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누군가 지극한 고통 속에서 살아갈 때, 사랑으로 위로할 줄 안다면 이 사람에게는 위로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정말로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위로(il consuelo)입니다.”
  복음의 직무를 근본적으로 완수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계속 담화를 이어 갔다. “지금 이 순간 저는 교회가 마치 야전 병원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우리에게 위로를 요청합니다. 많은 상처, 위로가 필요한 많은 상처 . . .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Consolate, consolate il mio popolo!). 하느님 사랑으로 위로 받을 수 없는 상처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야 할 방식은 이런 것입니다. 위로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이 사랑을 전하는 방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교종의 한국 방문 중반에 그리고 이곳 교회에 담화를 전하면서, 야전 병원과 같은 교회상을 반복할 필요를 느꼈다. 야전 병원이란 용어는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와의 인터뷰에서 제시한 단어이다.15)
  솔뫼에서 젊은이들이 만든 연극을 상기하며 다음과 같이 담화를 계속하였다. “오늘 오후 한 청년 모임이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표현했습니다. 이는 우리 상처 앞에 하느님이 지니신 태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위로하시고(consola), 언제나 희망하시고(spera), 언제나 잊으시고(dimentica), 언제나 용서하십니다(perdona). 교회 안에 상처가 참 많습니다. 종종 우리 자신들이, 즉 가톨릭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더 이상 벌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하느님의 백성을 위로하십시오! 주로 우리의 사제중심적인 태도가 교회에 큰 해를 끼치는 성직주의의 원인이 됩니다. 사제라는 존재는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사목자로서 성직자 신분이게 합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성직자 신부(chierici di stato)가 되지 말고 사목자(pastori)가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고백성사를 들을 때, 하느님은 용서에 결코 지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자비로워지십시오!(Siate misericordiosi!)”16)
  이 간략하지만 위로에 대하여 매우 많은 것을 요청하는 담화에서, 프란치스코가 한국 교회에 남긴 말들 중 예리한 핵심을 보인다. 이는 마치 직물을 이루는 실이 연결된 모습을 보여 주는 융단의 뒷면과도 같다. 남북한이 함께 사용하는 모국어(la lingua madre), 가정 안에서의 환대(l’accoglienza in casa), 공감하는 가까움(la vicinanza empatica)등 교종이 남긴 묘사는 여성적이며 모성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는 위로의 성무를 향한 교회의 근본적인 부름 안에서 뿌리를 내린다. 이것이 아시아 대륙을 첫 방문하여 한국이란 관문을 지나면서 교종이 강조한 말들의 밑바탕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이다.


1)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였다.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메시지 일어나 비추어라』,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
2) 편집자 주. 교종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기 자녀, 형제자매를 잃은 이 사람들, 이 부모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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