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 2020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예언자)
2020-08-01 00:41:24
김준형요한사도 조회수 146

매일미사 http://missa.cbck.or.kr/DailyMissa/20200801

복음말씀 http://maria.catholic.or.kr/exGB/down.asp?type=3&menu=missa_pds1&id=179844&fileid=2

유투브 https://youtu.be/B9ZzY9IQM_8

 

예언서를 읽다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세상은 어둡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언서가 쓰일 때의 상황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언서들은 대부분 유배를 전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앞서 들어온 아모스서와 호세아서 등은 북이스라엘의 패망과 아시리아 유배와 연결되고,

오늘 말씀드릴 예레미야서부터는 남유다의 패망과 바빌론 유배가 주된 배경이죠.

간략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습니다.

예루살렘이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유다의 사람들은

비교적 오래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못했던 북이스라엘은 비록 넓은 영토와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더 일찍 멸망하고 말았지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아시리아는 남유다를 침공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완전한 멸망은 피했지만,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어 살아가야만 했죠.

하지만 근동 지방을 장악하던 아시리아도 영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시리아가 약해짐에 따라 당시 남유다의 임금이었던 요시야는

잃어버렸던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하고, 성전 개혁을 단행하면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하느님 중심으로 세우려고 했죠.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때를 즈음하여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름은 ‘주님께서 던지시다. 급히 보내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너질 듯 위태한 유다왕국을 향해 하느님께서 파견한 사람이었죠.

그의 출신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는 아나톳이라는 지방이었죠.

지방 세력의 중심지였고, 예루살렘 전통신학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의 출신인 예레미야가 수도 예루살렘에 와서

기득권 세력인 성전의 사제들과 임금의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하나하나 그들에게 반대되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그가 미웠겠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는 아주 외롭고 고독한 싸움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 대적했던 기득권 세력은 이집트를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요시야가 목숨을 잃고 이집트가 임금으로 세운 여호야킴 때문이었죠.

이집트가 세운 왕이니 당연히 그쪽을 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국제 정세는 이미 바빌론 쪽으로 기울어 있었죠.

바빌론은 군사를 몰고 와 이스라엘 땅에서 이집트를 몰아내고는

남유다를 바빌론의 속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었을텐데, 이집트와 바빌론이 싸우고 있을 때, 반기를 든 것입니다.

결국 여호야킴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과 고위관리, 상류층과 장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갑니다.

그것이 바로 바빌론 1차 유배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게 승복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전했지만,

기득권층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빌론이 잠시 군대를 철수했을 때, 다시 반기를 든 것이죠.

이것으로 남유다는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바빌론으로 끌려갔죠.

길고 긴 바빌론 유배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활동도 바빌론 유배가 진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멈추게 되었죠.

이제 독서를 통해 그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목요일부터 다음주 수요일까지 약 2주간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독서로 듣게 됩니다.

본래대로라면 그 앞에 하루를 더해서 무려 15일 동안 예레미야서를 만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부분만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보여준 이스라엘의 순정과 사랑을 기억하십니다(2,2).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온 뒤 하느님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하죠(2,7).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2,13) 

그들이 섬겼던 가나안 땅의 이방신과 아시리아나 이집트와 같은 강대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고 그것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지만(3,14), 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저버릴 뿐 아니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고

무죄한 이의 피를 흘리며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말았죠(예레 17,1-11).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시고자 예레미야를 통해 아마포 띠를 강가에 숨기게 합니다(13,4).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이스라엘이 어떤 최후를 맞게 될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썩어버린 띠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13,7).

이스라엘의 처참한 최후를 목격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14,21)

사실 예레미야나 그 예언을 믿고 두려워했지,

당시 유다의 사제나 예언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백성이고, 이 땅은 거룩한 땅이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죠.

실제로 임금의 예언자들은 그렇게 거짓 평화를 하느님의 말씀인 양 전했고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18,6)

예레미야는 이런 하느님의 말씀을 성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합니다(26,2).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서지 않는다면, 실로처럼 된다고 하십니다.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도착했을 때 처음 주님의 궤를 모셨던 곳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계약의 궤를 모시고 그곳에 주님의 집을 세웠죠.

사무엘이 판관으로 있을 때, 필리스티아인들의 침략에 사람들은 실로에서 계약의 궤를 모셔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죠.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계약의 궤도 빼앗겼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이용하려 할 때, 결과는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비어버린 실로의 집처럼 폐허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성전에서 예레미야가 던진 그 말은 충분히 사람들의 분노를 살만한 일이었습니다(26,9).

 

드디어 오늘의 독서말씀까지 왔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분노한 사람들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고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것뿐인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예레미야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뭔가 떠오르시지 않나요?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 성전이 곧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신 예수님, 그것 때문에 성전 모독죄로 붙잡힌 예수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대신들과 온 백성의 증언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었죠.

그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수요일까지의 독서도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월요일에는 거짓 평화를 예고한 하난야와의 대결이,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유배 이후에 맞이할 희망찬 미래가 예고되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30,22)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31,7)

앞서 배경에서도 설명해 드렸듯이 유다왕국은 결국 바빌론에 멸망하고

성전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고 맙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진 것이죠.

그 예언의 끝은 다시 희망을 보여줍니다.

비록 금방 찾아올 미래는 아니지만,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고 있죠.

예레미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언자의 삶은 무척이나 고된 것입니다.

외로운 길이고 사람들의 반대와 외면을 받을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그것은 분명 사명입니다.

사람들을 다시금 깨어나게 만들고,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지 되돌아보게 하죠.

공교롭게도 오늘 복음 말씀도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옳은 말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죽으면 다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을 불사하면서도, 자신이 받을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를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언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제가 욕심이 많아서 참 많은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 합니다.

때로는 지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을 때가 있는데,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알폰소 성인의 말씀이 제게 약간의 힘을 주었습니다.

성인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고자 합니다.

제가 계속해서 이 정신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강론할 것,

하느님 말씀의 빵을 배움이 부족한 사람들도 받아먹고 배부를 수 있도록 잘게 나누어야 한다.”

오늘 하루도 기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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