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 20200616 연중 11주 화요일 (아합과 엘리야, 악인과 원수)
2020-06-16 01:19:22
김준형요한사도 조회수 181

매일미사 http://missa.cbck.or.kr/DailyMissa/20200616

유튜브 https://youtu.be/Rdt7SLOn9ZA

 

어제와 오늘 우리는 아합과 엘리야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배경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집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뭉친 유다지파와 벤야민 지파는 다윗왕조를 계승하는 남유다왕국이 되고,

나머지 10지파는 사마리아를 수도로 북이스라엘을 건설합니다.

영토의 크기나 인구, 경제력 등은 북이스라엘이 우위였으나,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정통성이 없었죠.

분단된 뒤 남유다는 다시금 야훼신앙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했지만, 북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하여 가나안의 여러 신들을 함께 섬기는 혼합종교의 노선을 타게 되죠.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과 아세라 목상을 세우고,

이웃나라 시돈의 공주 이제벨과 결혼하여 바알 신앙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하느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그런 북이스라엘에 다시금 야훼신앙을 일으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해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죠.

지난주에 바알의 예언자들과 싸웠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 위에 올려두었던 황소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 전에는 이스라엘에 큰 가뭄이 있을 것을 예고한 뒤에

사렙타의 과부 집에서 오랜 시간을 지냈던 이야기도 있었지요.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며 비를 관장한다고 믿고 있던 바알 신앙을 무너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 오늘의 이야기가 놓여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북이스라엘의 왕비인 이제벨이 더 부각되는데요.

어제의 독서를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밭을 탐내던 아합이 말 한 마디에 돌아서는 장면입니다.

아합을 막아선 것은 나봇의 이 한마디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면서 각 지파에 따라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것은 사고 팔 수 없도록 정해진 것이었죠.

팔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줘야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봇이 얘기한 ‘상속재산’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땅은 하느님께로부터 우리 조상이 받은 땅이니 함부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죠.

아합이 아무리 이방신을 섬기면서 막나간다고 하지만, 그도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 무서운 줄은 알고 있었죠.

그러니 하는 수 없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가지고 싶었으면 거래가 무산되고 나서 속이 상해 음식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제벨이 나서지요.

아합은 그래도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아내 이제벨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옆나라의 공주였고, 하느님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겠죠.

‘아니, 왕이 원하는데, 그것도 제 값보다 훨씬 더 쳐주겠다는데 그것을 거절한다고?’

그녀는 아합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녀의 생각 속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존재는 하느님이 아니라 저 초라한 왕 아합이었습니다.

그녀는 나봇이 사는 성읍에 편지를 써 보내죠.

물론 아합 임금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나봇이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고발하며 그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편지로 인해 나봇은 죽임을 당합니다.

 

여기까지가 어제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그렇게 나봇의 땅을 차지하게 된 아합에게 엘리야 예언자가 나타납니다.

아합은 당연히 질색을 하죠.

앞서 긴긴 가뭄을 예언했었고(1열왕 17,1), 바알의 예언자들을 450명이나 쳐 죽인 사람이니 말입니다(1열왕 18,40).

아합은 엘리야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얼마나 보기가 싫었으면 그랬을까요?

엘리야는 앞선 북이스라엘의 임금들을 거론합니다.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북이스라엘에는 반란이 많았습니다. 200년 역사 중에 왕이 20명이었죠.

재위 기간이 일 년이 채 안 되는 사람이 일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조는 아홉 번 교체되었구요.

남유다처럼 정통성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유대인 이야기』, 183).

예로보암은 초대 임금이었지만, 자기의 아들까지만 왕위를 물려주었고, 바아사에게 몰살당합니다(1열왕 15,29 참조).

이어서 왕이 된 바아사도 자신의 아들까지만 왕위를 물려주고 지므리에게 몰살당하죠(1열왕 16,11).

엘리야는 아합의 최후도 그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합은 그 땅, 나봇의 포도밭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내 이제벨이 어떤 수를 써서 나봇을 죽였다는 것도 쉽게 짐작했을거구요.

그런데 아무 말 없이 그 땅을 그냥 차지하려고 합니다.

요즘 법대로 하면 살인방조죄에 해당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그에게도 나봇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죠.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그녀가 범죄하는 것을 막지도 않고, 오히려 거기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취했으니 말입니다.

아합은 자신과 이제벨을 향한 엘리야의 예언을 듣고 나서는 옷을 찢으며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시죠.

 

 

어제와 오늘, 복음의 말씀은 악인과 원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역시 지난주 말씀처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하고 율법의 핵심을 짚어주시죠.

어제와 오늘의 요지는 맞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뺨을 때리고, 옷을 뺏어가고,

억지로 먼 거리를 가자고 하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맞설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만큼 해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을 얘기하지 않으십니다.

없는 것을 구해서 주라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냥 있는 것 안에서 해줄 만큼 해주고 나면 그만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우리의 마음까지 다칠 필요는 없습니다.

 

설사 그 사람이 지나가는 악인이 아니라 원수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는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게 원수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원수도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하시죠.

말만 쉽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것도 엄청 어렵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벌이 필요하면 벌을 주실 것이고, 상이 필요하면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기도는 내가 중심이 되어 주인이 되고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이뤄지길 바라는 것이 기도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길을 계속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잘못 가고 있으면 때려서라도 바르게 가도록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이제벨, 아합이 원한다고 나봇을 죽여 그 포도밭을 가지게 합니다.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엘리야의 행동이 더 사랑에 가깝지요.

아합에게 엘리야는 원수였습니다.

엘리야에게 아합도 원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아합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그를 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겠지만, 그가 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지 그를 저주하거나 해꼬지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아합을 회개로 이끌어주었지요.

그것은 분명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취해야하는 행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악인은 맞서지 말고 그냥 지나가게 두고, 매번 나타나는 원수에겐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악인이나 원수 때문에 우리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행복을 찾아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누구누구 때문에 화가 나서 하루를 날려서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행복을 추구하십시오. 악인과 원수에게서 자유로워지십시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이끌어주십니다. 그분께 맡겨드립시다.

설사 그분께서 하시는 것이 나의 뜻과 조금 다르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분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닮기에만 힘쓰면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마음 쓰지 말고, 하나씩 비워내면서 오늘도 더 행복한 하루되시면 좋겠습니다.

 

댓글 8개

top 뒤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