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복음의 기쁨 2020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2020-04-25 01:47:00
김준형요한사도 조회수 167

매일미사 http://missa.cbck.or.kr/DailyMissa/20200425

유튜브 https://youtu.be/IhWHxIFoAZk

 

아주 길고 깊은 터널이 있습니다. 오래된 터널입니다.

그 터널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길을 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 만큼 말이죠.

여기서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터널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이죠? 우리는 왜 터널로 들어가나요?

 

터널에 있는 그림을 보기 위해서인가요? 아니요.

터널을 통해 반대편에 있는 목적지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아주 오래된 길고 깊은 터널입니다.

2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죠.

그 안에는 수많은 역사와 화려한 볼거리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목적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회법과 전례와 축일과 성인 등

그 모든 것은 바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머물러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한다면 될까요? 안될까요? 안되겠죠.

그건 교회의 본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범계에 온지 이제 네 달 되었습니다.

그중 두 달은 함께하는 시간이었고, 두 달은 떨어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초임 신부로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강론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말씀을 전하는 것, 그것이 저의 존재가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일 년 동안은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고 그날의 말씀에만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우리에게 주어진 독서와 복음말씀 안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정말 아껴주시는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영성적인 내용만 전달하면 듣고 잊어버리게 되니,

그 사이에 외적인 것들도 함께 전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대신에 조금 길어지겠죠? 그것은 이렇게 홈페이지에,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유튜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당 강론 때는 핵심만 전달하는 것으로 하고요.

그렇게 해도 괜찮겠죠? 좋습니다.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전례력에는 기념일이 있고, 축일이 있고, 대축일이 있습니다.

이게 다 등급입니다.

가장 높은 것은 대축일이겠죠? 그 다음은 보통의 주일입니다.

그리고 축일, 그 다음이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이 기념일도 전례시기에 따라 밀리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인들을 하나하나 챙길 수 없는 것이죠.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죠?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은 부활시기 평일보다는 높은 등급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르코 성인을 기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달라지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색깔입니다.

본래 부활시기는 백색이죠? 오늘의 전례색은 홍색입니다.

홍색은 보통 순교자들을 기억할 때 사용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도 순교자였죠.

그는 바오로와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기도 했지만, 베드로의 제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을 보면 그의 이름이 등장하죠?

이것이 축일 때 달라지는 두 번째 요소입니다.

중요한 성인의 축일 때, 그날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평소의 흐름과 달리 그날 기념하는 성인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특히 성경 속 인물의 경우엔 더욱 그러하죠.

마르코 성인을 축일이 아니었다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어제 우리가 들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축일이기 때문에 바뀌는 두 가지, 색깔과 말씀입니다.

듣고 잊어버리지 마시고 잘 기억해서 다음번에 보았을 때,

‘아 맞아! 그랬었지!’하고 기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계속 배우는 거잖아요?

우리 신자분들께서 배우는 기쁨을 얻으실 때가 제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때입니다.

 

마르코 성인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까요?

보통은 이런 축일이면 매일미사 앞부분에 간략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신지, 어디 출신이고, 무엇을 하였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줍니다.

마르코 성인의 경우 복음을 저술한 것이 주요 업적이라 그것을 좀 더 많이 설명하고 있네요.

좀더 알아보려면 가톨릭 굿뉴스에서 성인에 대해 검색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때 꼭 축일을 잘 살펴서 보셔야합니다.

워낙에 동명이인이 많아서요.

자칫하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성인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던 다락방, 바로 그 집 아들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최후의 만찬방에 가면 ‘마가의 다락방’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개신교에서 이름을 그렇게 붙인건데, 마르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에 대한 여러 설명들 앞서 말씀드린, 바오로와의 선교여행, 베드로의 직제자,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한 인물 등등에 대한 설명은 사실 성경을 통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저 동명이인일수도 있거든요.

그럼에도 교회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전승’ 때문입니다.

‘성전’, ‘거룩한 전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사실 이것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입니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만을’ 주장하거든요.

그들이 주창하는 세 가지 ‘오직’이 바로 성경과 은총과 예수입니다.

맞는 말이긴 하죠.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직’이라는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전승없이는 성경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도 전승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거든요.

개신교 사람들은 성경이 쓰여진 과정은 보지 못하고,

그저 ‘성령의 영감’으로 쓰였다는 사실 하나만을 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법사가 아니십니다.

인간을 통해 인간의 손으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완고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꾸 옆으로 새는 것 같지만, 괜찮죠? 다 쓸모가 있는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알아야하는 것이구요.

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부분은 마르코복음의 끝부분입니다.

마르코복음이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죠?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전에는 간과했던 것이지만,

근대에 들어서 복음서를 서로 비교하며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래도 몇 백 년은 된 정설입니다.

마르코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고, 그 뒤로 마태오와 루카복음이 쓰여졌습니다.

둘은 마르코복음과 또 다른 하나의 문헌을 참고하여 각자의 복음서를 저술했죠.

그 또 하나의 문헌을 ‘예수 어록’, ‘Q문헌’ 등으로 부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많이 담겨 있는 어떤 책이었을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추정만하는 것은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복음서를 비교하면 그것이 분명히 있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말씀드리면 아마, 오늘 복음말씀은 한마디도 못할 것 같아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죠.

사명만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표징들이 뒤 따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표징,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 그분께서 보여주셨던 그 많은 기적들이 제자들의 손을 통해서도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적들이 그들이 전하는 그 말씀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해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그냥 떠맡기고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계속해서 함께 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말이죠.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며 그들을 도와주십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저 도구일 뿐이고, 나의 손을 통해 그분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혹은 사회에서 신앙에 따라 선한 일을 하다보면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막,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경해주는 것 같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의해야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분옷자락 놓치면, 그냥 길 잃어버리는 거에요.

그럼 안 되잖아요? 우리 하느님 나라 가려고 사는 것입니다.

항상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느님께 의지하며 겸손하게 살도록 깨어있어야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항상 겸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갑시다.

 

 

저부터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손잡고 이 긴 터널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분께서 두 팔을 벌리고 우리들 모두를 꼬옥 안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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