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신앙생활)

궁금해요? (신앙생활) '상선벌악', 선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2018-03-07 00:36:23
박윤흡 조회수 913

 

(20180307 나해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강론 발췌)

글이 길어 밑부분이 조금 짤리는 듯 합니다. 강론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한 교우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 우리 가톨릭 교회 4대 교리에는 ‘상선벌악’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향해 ‘자비’하심을 드러내시는 분이신데 왜 선한 사람만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상을 받지 않죠?’”

 

 

 

  제게는 이 질문의 포인트가 다음의 물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 상선벌악의 원천은 어디인가? 

 

2. 하느님의 자비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3. 상선벌악의 구체화된 모습이 십자가 대속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인가?

 

4. 고해성사로 용서를 받으면 죄 사함이 되는 것인가?

(악의 속성으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인데, 고해성사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 

  신앙이 윤리, 도덕적 차원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1. 상선벌악의 원천은 어디인가? 

 

  상선벌악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비롯됩니다.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힘이 뛰어나신 분. 그러나 벌하지 않으신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나훔 1,3)

구약성경의 인물들과 예언자들에게 '정의로운 하느님상'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를 비롯한 수많은 병자들이 ‘병치레’한다는 그 자체로 ‘죄인’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2. ‘하느님 자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느님의 자비가 없이, ’정의로운 하느님‘만 현존하셨다는 것인가?’

 

 

  결코 아니죠!

우리가 매일미사에 화답송으로 노래하는 시편, 하느님 찬미의 성가라고 불리는 시편은

‘구약성경’에 속해있지만 ‘하느님 자비를 갈망하는 인간의 부르짖음’입니다.

분명한 것은 구약시대에 정의로운 하느님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상’도 있었다는 것이죠.

 

  그 모습은 신약(Anno Domine)에 와서 구체화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사랑하셨다!’

그 결과가 바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강생수속’ 혹은 ‘육화’Incarnatio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는 신앙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요.

잘 생각해 보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육을 취하시어 나약한 인간이 되셨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하느님의 자비성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했던 병자들을 수없이 고쳐주십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들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더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4,24)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

 

 

이 밖에도 수많은 사랑의 기적치유가 일어나지만..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벳자타 못 가..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르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 5,2-7)

 

 

  38년 동안 이 사람은 주변사람들의 무시와 멸시에 압박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본인에게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희망을 발견했고 더 이상 과거의 심판에 메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바로 그 믿음과 용기가 이 사람을 낫게 합니다.

그 용기의 원천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3. 상선벌악의 구체화된 모습이 십자가 대속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인가?

 

  ‘상선벌악의 구체화’라고 한다면,

‘선한 사람은 상을 받아 천국에 가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 지옥에 간다’는 것이죠.

‘아니,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완전한 선’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언행에 신뢰를 두고 따라간다는 것이죠.

이처럼 그리스도 신앙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선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세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스스로 고해성사를 갈망하고 지난 날의 반성과 회개를 할까요?

우리는 모두 천국에 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 24장에 나오는 좌도와 우도의 이야기를 참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내세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현세에 살면서도 악을 저지른 사람은 왠지 모를 두려움에 빠져있죠.

언젠가 다가올 벌에 대한 두려움, 드러나지 않을 벌일지 몰라도

분명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게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양심’을 장착해 놓으셨어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하는 것은 우리가 악을 선택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유와 해방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선과 악의 기로에서 악을 선택할 때 부자유와 더불어 구속이 우리 영혼을 지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 모든 것을 부수기 위해서였어요.

 

상선벌악은 하인리히 덴칭거(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범-2,000년 공의회 역사의 총망라)에도 나오는 것처럼,

‘윤리적 규범’과 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건 또한 윤리적 인간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법, 자연법에 따른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윤리규범을 올바로 지켜 살아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4. 고해성사로 용서를 받으면 죄 사함이 되는 것인가?

(악의 속성으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인데, 고해성사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 

  신앙이 윤리, 도덕적 차원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사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동시에 ‘악의 속성’을 입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선하신 하느님’을 묵상하고 갈망하며

일상에서 마주하는  선악의 기로에서 선을 택할 때 ‘하느님화’(Deificatio)된다고 표현하지요.

 

  신앙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는 용서받지만, 그 죄는 인간의 영육에 그대로 남아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해소 밖을 나가서 내가 성찰하고 고백한 내용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제는 새로운 사람으로 나를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 죄가 내 영육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몸이 기억한다’라는 표현처럼 말이죠.

 

  교회법은 사회법과 손을 맞잡고 나아갑니다.

인류 공동체는 사회 구성원이며,

그들이 머물고 사는 곳이 또한 교회이기 때문에 사회법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 신앙은 사색과 묵상 등의 키워드를 필요로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이죠.

삶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어요.

아무리 교리지식과 신앙내용을 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면,

이미 그런 나는 내 안에서 스스로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그분이 누구신지’ 묻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그 완성의 종점은 ‘사랑’입니다.

평생을 들어도 어려운 그 사랑,

여기에 빠지면 정말 어쩔 줄 모르겠는 그 사랑,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그 사랑,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나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철저히 이타적인 태도로 드러낸 그 사랑...

 

 

교회가 상선벌악을 4대 교리로 둔 것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더 나아가 ‘선하신 하느님의 깃발 아래 서서 신화로 나아가라’는 부르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은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자비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몰라요.

'죄 많은 나에게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Tv에 나오는 저 추악한 사람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실까?

내 주변에 있는 나를 못되게 구는 저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실까?'

 

우리들이 하느님 자비에 대한 묵상과 이해없이 던지는 의구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나약함이 숨겨져 있어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요한 3,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 사람'과 '나', '이 사람'의 죄몫의 경중이 있을지라도..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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