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신앙생활)

궁금해요? (신앙생활) 가톨릭 교회 칠성사에 대하여 - '고해성사'를 중심으로
2018-02-23 11:57:45
박윤흡 조회수 1715

가톨릭교회 칠성사에 대하여

-‘고해성사’를 중심으로-

 

박윤흡 윤일요한

 

 

 

1. 성사란 무엇인가?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보이는 지표로 드러내주는 표지’입니다.

 

 

 

2. 성사의 종류

 

  가톨릭 교회는 성사를 총 7개로 규정합니다.

세례, 견진, 성체, 고해, 성품, 혼인, 병자성사입니다.

이 7개의 성사를 통해 하느님은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당신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 또한 요한 세례자를 통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온전히 하느님의 아들로 공생활을 살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내 삶에 하느님을 중심으로 두는 삶이 바로 세례성사를 통해 거듭난 신앙인의 삶입니다.

 

  견진성사는 쉽게 말해 세례성사의 심화입니다.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다시금 하느님의 자녀됨을 삶 안에서 구현할 가능성의 사명을 부여받는 것이 바로 이 견진성사입니다.

견진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는 성숙된 신앙인으로 태어납니다.

 

  성체성사는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축성함을 기념하는 성사인데,

초월적이시며 절대적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최후의 만찬 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이자 기억의 성사입니다.

성체와 성혈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단순히 ‘나 자신’이 그분의 사랑을 기억함을 넘어서

그분께서 나를 기억하고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의 성사입니다.

궁극적으로. 성체성사는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루도록 해주어,

옛 자아(거짓 자아, 피상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하는 성사입니다.

 

  고해성사는 ‘화해와 용서’의 성사입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끊임없이 죄를 짓고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소외됨’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상처투성이 되어 있죠.

그런 상처투성인 나를 치유해주는 성사가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느냐구요?

죄를 짓고 토라지고 미워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이미 나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용기의 성사이며,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에 나 자신을 다시 의탁하는 화해의 성사입니다.

 

  성품성사는 2,000년 전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제2의 그리스도, Alter Christus)을 살고자 하는

사제 지망생들에게 주어지는 성사입니다.

자신의 삶을 내어 놓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에 의탁하며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성사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거듭나는 다시 태어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인성사는 ‘일치’, ‘정결’의 성사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둘의 결합을 통해 인류로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신약성경의 도입부, 예수님의 탄생 사화를 보면 마리아와 요셉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신의와 의탁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혼인성사는 일치와 정결의 성사입니다.

혼인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축복하시고

가정을 꾸리는 신랑과 신부를 당신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 일치시키십니다.

궁극적으로, 혼인의 목적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에 동참하는 창조의 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희망의 성사입니다.

어느 인간도 죽음 앞에선 두렵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것들을 밝혀내고 있지만

죽음의 영역 앞에서는 겸손하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이미 죽음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영역임을 드러내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믿음 안에서 죽음까지도 희망으로 승화시킵니다.

바로 이 죽음을 초월한 희망을 선취시켜주는 성사가 병자성사입니다.

 

 

  지금까지 가톨릭교회의 7성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성사는 앞서 보았듯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주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남’이라는 주제인데요, 성사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혼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 성과주의 등의 가치관은 태초에 인간성을 상실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현실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많이 버는 것, 좋은 가방, 명품 등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과연 내 행복의 절대적 지표가 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들은 소모품이고 한철장사와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말이죠..

더 나아가서 만약에 좋은 가방, 시계를 샀다고 합시다.

그걸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없어지고 말 물질 등에 맡기고 살다보니 더 이상 의탁할 곳이 없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우리는 불안을 통해 성장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를 돌아봅시다.

때때로 거짓말을 하거나 돈을 쓸쩍 빼는 등 쉽게 말해 윤리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내 마음이 편했을까요?

나의 만족은 나의 만족으로 인해 피해 받을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거나 위협이 되겠죠.

우리는 이미 내재적으로 그런 마음을 품고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이미 태초부터 윤리적인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가봅시다.

우리 삶을 혼돈케하는 오늘날의 가치관의 궁극점에는 바로 이것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자기중심주의’죠.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원인이자 문제인 것입니다.

내 중심에 따라 살아갈 때 분열과 소외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과 분열, 소외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함께 붙어 다니는 단짝입니다.

 

  성사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은

바로 이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다시 태어남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삶을 통해

분열(하느님-나, 인간-인간, 세상-나)을 극복하여 일치로 나아갈 수 있으며,

소외(고립)로부터 탈피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사는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이며,

단순히 중요성을 넘어서 내 삶을 온전히 변화시켜주는 완전한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표지입니다.

 

 

 

3. 고해성사의 이해

 

 

  이제 ‘고해성사’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고해, 견진, 성체) 중 하나입니다.

이 입문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습니다.

 

왜 고해성사를 해야하나요?

 

고해성사는 정말 나를 용서해주는 효력이 있는 것인가요?

 

이밖에도 수많은 물음이 우리 마음속에서 차오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해성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3.1. 죄와 원죄

 

 

  ‘죄’란 ‘하느님과 멀어짐’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와를 지으셨는데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끄러움도 없이 천진하고 순결했던 그들이지만

‘호기심’으로 발동한 인간적 탐욕은 자기중심성으로 변모되어 결국 하느님의 사랑에 흠집을 낸 것이죠.

그 원죄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온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원죄 교리입니다.

 

  구전된 문장 하나가 떠오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왜 죄는 미워하는데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죄’가 그 사람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가능성은 있지만,

죄가 그 사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겠지요.

 

 

 

 

3.2. 성찰의 중요성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성찰할까요?

죄를 짓게 하는 원천, 7죄종을 주제로 성찰합니다. 7죄종은 아래와 같습니다.

 

교만(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김),

인색(하는 짓이 소심하고 지나치게 탐하여 인색함),

음욕(성욕의 노예가 됨),

분노(이성을 잃을 정도로 몹시 화를 냄),

탐욕(음식을 지나치게 먹고 마심),

질투(사람을 시기함),

나태(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함)

 

 

  이상 7가지를 중심으로 성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7가지를 통해 인간-하느님의 관계성이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3.3. 고해성사에 임하는 자세(참회자의 행위)

 

 

  “죄인은 회개하기 위하여 기꺼이 다음과 같은 참회의 행위가 필요하다.

마음에는 통회가, 입에는 고백이, 행위에는 온전한 겸손과 유효한 보속이 있어야 한다.”

 

고해성사를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통회’입니다.

통회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성찰’에 요구됩니다.

성찰에는 두 가지 종류, 양심성찰과 의식성찰이 있습니다.

양심성찰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

곧 일상적 삶 안에서 하느님과 멀어지게끔 한 나의 이기적 욕망’을 되짚어 보는 것이고,

의식성찰은 ‘나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하느님은 어떻게 사랑으로 다가오셨는가?’를 되짚어 보는 것입니다.

양심성찰과 의식성찰이 함께 이루어질 때 통회는 자신의 완전성을 더합니다.

 

  둘째, ‘죄의 고백’입니다.

어느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악습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이걸 말했을 때 저 사람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한 사조가 우리 삶에 만연합니다.

하지만 고해성사에는 죄를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제에게 하는 고백은 고해성사의 핵심 부분”입니다.

 

  셋째, ‘보속’입니다.

죄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약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관계까지도 해칩니다.

용서는 죄를 없애 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 주지는 못합니다.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인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죄를 갚기 위해 무언가를 더 해야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여야 하는 것이죠. 이 갚음이 바로 ‘보속’입니다.

 

 

 

 

  3.4.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관계

 

 

  ‘자비’의 메시지는 교회의 사명이자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강생)의 신비는

자기를 비우신 완전한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사명은 마땅히 자비의 표지가 되며,

동시에 모든 성사는 자비의 성사가 됩니다.

 

  특별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고유성 안에서 자비성이 더욱 드러납니다.

‘회개’는 ‘마음이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다시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린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은 회개를 요청하는데 여기에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의 연관성이 숨어 있습니다.

미사는 ‘참회 예절’과 ‘사죄를 청하는 기도’(자비송)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미사는 성찬전례로 접어든 후 성체성사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맑고 건강해야 하겠지요.

그렇기에 고해성사는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오늘날 신앙형태는 고해성사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에 대해서 어느 거리낌도 없고,

고해를 하면서도 형식적인 죄목만 고백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만 이는 인간적 나약함과 두려움, 불안함에 기인합니다.

‘저 신부님이 내 죄를 알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성체성사를 재현하고 고해성사를 집전합니다.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성체성사는 정말이지 하느님이 나를 위해 빵과 포도주 안에 계신다는 것,

고해성사는 진정으로 날 위한 하느님 자비의 성사라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한 마디로, 이 믿음은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그밖에 다른 성사들과 나의 일상적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4. 고해성사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 - 사랑

 

 

  고해성사의 중심은 ‘죄’가 아닙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복된 죄’라고 말하였습니다.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내려 받을 수 있는 전제로서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죄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날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기비움적 사랑입니다.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대죄-소죄, 영벌-잠벌

 

  교회에서는 ‘죄’를 ‘대죄’와 ‘소죄’로 구분합니다.

대죄는 우리에게서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박탈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게 하는데,

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것을 죄의 ‘영벌’이라고 합니다.

한편 모든 죄는(소죄까지도)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을 초래하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나 죽은 뒤에 연옥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정화를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정화로 이른바 죄의 ‘잠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렬한 사랑에서 나오는 회개는 죄인을 온전한 정화에 이르게 하여

아무런 벌도 남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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