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신앙생활)

궁금해요? (신앙생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2017-06-22 09:54:14
범계성당 조회수 24

최양업(崔良業) 신부(1821~1861)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 세례명은 토마스, 본관은 경주, 아명은 정구,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

 

[최양업 신부 연표]

1821. 3. 1

충청도 홍주 다래골 새터에서 성 최경환과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6형제 중 장남

1836. 12. 2

동료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순명과 복종서약

1836. 12. 3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로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1839. 4. 6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칼르리 리브와 신부 등과 함께 마닐라로 피신

1839. 9. 12

부친 최경환 기해박해로 포도청에서 옥사 순교

1840. 1. 31

모친 이성례 마리아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

1844. 4~12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와 제1~5품까지 받음

1847 초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1849. 4. 15

서가회 신학원 성당에서 예수회의 강남 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

1849. 5.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백령도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 상해로 귀환

1849. 12. 3

페레올 주교의 며여에 따라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입국 13년 만에 귀국

서울서 하루 유숙한 뒤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주고 충청도로 가서 페레올 주교와 상봉

1850~1861

전국에 흩어져 잇는 교우촌 신자들을 순방함

1854. 3

3명의 신학생을 페낭 신학교로 보냄

1861. 6. 15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차 상경 중 경북 문경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

1861. 11월초

베론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가 최양업 신부의 시신을 베론으로 옮겨 안장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사상] 최양업 신부의 어린 시절에 영향을 준 사람들은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였고, 다음으로 학생 시절에는 스승들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는 베르뇌 주교가 설명한 것처럼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훌륭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르뇌 주교는 언제나 ‘최양업 신부와 같은 한국인 성직자 10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보곤 하였다. 최 신부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정신과 신심의 바탕에는 자비로운 하느님과 수난 받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리고 선교 활동을 위한 여정 속에서 언제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희망을 두고, 자비로우시며 전능하시고 지선하신 하느님의 뜻이 자신과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들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다. 그가 말하는 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은 자신들의 안위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었으며, 그는 끊임없이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최양업 신부는 겸손과 순종, 인내의 덕행은 물론 예수 성심 신심, 마리아 신심, 성인 신심도 지니게 된다. 그는 성심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자주 고백하면서 예수 성심의 온유하고 겸손된 마음을 따라 겸손한 마음을 드러내곤 하였다. 선교 활동 중에는 스승 신부들에게 묵주나 성인들의 성패와 상본들을 청하여 신자들에게 널리 보급하고, 마리아 신심과 성인 신심을 장려하고 가르치는데 힘썼다. 최양업 신부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굳은 신심과 덕행은 박해받는 조선 교회의 상황 아래서 그에게 강한 순교 영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비록 혈세의 영광을 얻은 순교자는 아니지만, 박해 와중에 있던 한국 천주교회의 방인 성직자로서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고 생활한 ‘백색(白色)의 순교자였다. 십자가의 생명력을 굳게 믿었던 최 신부는 순교한 동포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자신도 여기에 참여하여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교회관] ‘그리스도의 양 우리’로 표현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으로, ‘일치’안에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주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거룩한 신전을 치르는 교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순교 신심은 이 영신의 전쟁터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천주가사 안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교회의 양들은 주 하느님의 자비와 전능 안에서 일치하여 마지막 전쟁터를 향해 나가는 용사로 이해되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영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선교 영성이다. 그는 일찍부터 선교에 대하 열망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으며, 중국에 머물러야만 하였을 때는 귀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한없이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귀국한 뒤에는 선교에 대한 열망을 교우촌 순방으로 표출하기 시작하여 귀국하자마자 1850년 1월부터 9월까지 거의 5천리를 걸어다니면서 교우촌을 순방할 정도였다.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메스트르 신부도 이런한 최양업 신부의 선교 열정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신부는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은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나 성 베르나르도의 선교열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한계와 부족함을 고백하곤 하였다. 그는 한국의 바오로 사도와 같았으니, 꾸준한 열성과 거룩한 땀을 바탕으로 복음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치다가 결국 과로로 선종한 이 땅의 사제였다. 최양업 신부는 억압당하는 민초들을 신앙으로 구제해야 한다는 위민 사상도 지니고 있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억압받는 하층민과 신자들의 비참한 생활이었다. 민초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고 믿은 선각자였다. 이를 위해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선교 열정을 보여준 의인이요, 땀의 순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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