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신앙생활)

궁금해요? (신앙생활) 병인박해(丙寅迫害)(한국천주교 4대박해)
2017-06-22 09:46:16
범계성당 조회수 40

병인박해(丙寅迫害)

병인박해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이다. 1866년(고종3년 병인년)초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 이어진다.

〔원인과 발달〕벽이단(闢異端)의 전통과 척사의식, 천주교 교리와 유교 사회의 윤리와의 갈등, 천주교 신자들의 대외의식과 이에 대한 위정자들의 반응 등

[박해의 전개과정〕

박해 초기의 양상 : 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다리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조정으로부터 소식이 없자 다시 지방 순회에 나섰다. 이 때 베르뇌 주교는 서울 인근 교우촌을 둘러보고 상경하였는데 1866년 2월 23일 포졸들이 몰려와 베르뇌 주교, 홍봉주, 이선이를 체포하였다. 2월 25일에는 브르트니에르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이 잇달아 체포되었다. 의금부에서는 여러 차례 신문과 형벌이 계속되었다. 그런 다음 판결이 내려져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등 4명은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 하였고 남종삼과 홍봉주는 같은 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충청도에서는 거더리의 손 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이어서 위앵신부, 오매트르신부, 황석두, 제천의 장주기 등 5명이 체포되어 보령이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양요와 박해의 확대 : 1866년 4월과 8월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을 시도하려다 좌절되었고, 6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스호가 평안도 해안에 접근한 적이 있었다. 9월 2일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소각되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병인 척사 윤음>을 반포하였다. 병인양요가 프랑스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덕산 사건의 발생 : 이런 상황에서 1868년 5월 충청도 덕산에서 굴총 사건 일명 ‘남연군 묘 도굴 사건’ 또는 ‘오패르트 도굴 사건’ 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다신 한번 박해가 확대되었다. 대원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자들은 역률을 적요하여 처단하였고, 배교한 경우에도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어 서울의 포도청과 각 도의 감영에 신자들을 수색‧체포하도록 영이 내려졌다. 굴총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goal 일대, 서울의 포도청과 절두산, 경기도의 수원, 남한산성, 죽산, 남양, 충청도의 공주, 홍주, 충주, 청주, 전라도의 전주, 나주, 여산, 경상도의 대구, 울산, 진주, 황해도의 해주, 황주, 함경도의 영흥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신미양요와 박해의 종식 : 무진년의 박해는 1869년에 이어 1870년 말까지 계속되다가 잠잠해지게 되었으나, 1871년 미국 함대가 내침하는 ‘신미양요’로 인해 다시 재개되었다. 이로 인해 1871년과 1872년 사이에 52명의 신자가 다시 포도청에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이 지방에서는 신자들이 체포되지 않았으며, 조야의 상소에 따라 1873년 12월 24일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났고 오랫동안 계속된 병인박해는 끝을 맺었다.

〔시복시성과 박해의 의미〕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는 1895년 시복 수속 담당자 르 장드르 신부로 하여금 그 동안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치명일기>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 책에는 모두 877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29명만이 1차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어 1899~1900년에 교구 재판이 개정되어 증거가 불충분한 이성욱, 이성천, 송성보를 제외한 26명을 대상으로 1921~1926년 교황청 수속이 시작되었다. 26위 순교자 중에서 1964년 푸르티에 신부, 1967년 프티니콜라 신부가 제외되고 베르뇌주교, 다블뤼주교,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위앵, 오매트르 신부, 남종삼, 전장운, 최형, 정의배, 우세영, 황석두, 손자선, 정문호 조화서, 손선지, 이명서, 한원서, 정원지, 조윤호, 이윤일 등 24위가 시복 대상자로 확정되었다.

〔병인박해의 의미〕

교회 내적으로 볼 때 : 우선 병인박해는 최대의 박해로 유례없이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최후의 박해였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병인박해 후 철종 연간에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내면서 교우촌을 재건하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통해 교세 확대에 노력을 하였으나 성직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박해는 다시한번 천주교 신앙을 다른 지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각처에 새로운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참고 : 한국 가톨릭 대사전 5권 3417~3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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