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신앙생활)

궁금해요? (신앙생활) 병오박해(한국천주교 4대박해)
2017-06-22 09:43:54
범계성당 조회수 66

병오박해(丙午迫害)

병오박해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되어 9월 20일에 종결되었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되었다.

[발단과 전개과정〕

1839년 기해박해가 끝난 이후 1840년대 중반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해 척사윤음이 박해의 법적 근거가 되었으므로 언제 어디서든 다시 박해가 일어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한 ‧ 중의 국경 감시가 엄해졌고 외국 선교사들은 육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가 없게 되었다. 1845년 김대건 신부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때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해로는 매우 위험했으므로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봄이 되자 김대건 신부에게 장차 중국에 있는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입국할 수 있는 해로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마포 ‧ 연평도 ‧ 백령도를 항해 하면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자신이 그린 해로도를 중국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 임성룡,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6월 20일에는 이곳에서 네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임치백, 김중수 등이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포도청에서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으며, 현석문 ‧ 남경문 ‧ 한이형 ‧ 김임이 ‧ 이간난 ‧ 우술임 ‧ 정철염 등도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의 문초에서 중국의 광동 출신 우대건이라고 하다가 여섯 번째 문초에서야 비로소 용인 태생 김대건으로 신학 공부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였음을 실토하였다. 그러나 교회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권면하는데 힘썼고, 선주 임성룡의 부친 임치백에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주었다.

〔순교와 시성〕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이끄는 클레오파트르호, 빅토리외즈호 ,사빈느호 등 군함 세 척이 충청도의 외연도에 나타나 편지 하나를 조선 정부에 전하도록 하였다. 세실 함장은 기해박해 때 조선에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해 항의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충청 감사의 장계로 곧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김대건 신부도 옥중에서 판관으로부터 이 사실은 전해 듣게 되었다. 세실의 조선 원정이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판결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한강변의 노들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만 25세였다. 그로부터 3일 뒤인 9월 19일 현석문이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같은 날 장사로 순교하였다. 병오 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겪어 온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자마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일시 활동을 중단하고 안전한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을 색출해 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1801년이나 1839년의 박해 때처럼 새로운 척사령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 순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이들의 순교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었고, 1846년 11월 3일자의 서한 즉 <병오일기>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이 자료는 그곳에서 다시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최양업 부제가 번역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함께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었으며, 이후의 시복 절차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9명의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1925년 7월 5일 기해박해 순교자 70명과 함께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 : 한국 가톨릭 대사전 5권 3412~3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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