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신앙생활)

궁금해요? (신앙생활) 기해박해(한국천주교 4대박해)
2017-06-22 09:35:58
범계성당 조회수 26

기해박해(己亥迫害) (한국천주교 4대 박해)

기해박해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의 하나 1839년(기해년, 현종 5) 3월에서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참수된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명인데 그중 70명이 훗날 성인품에 올랐다.

〔원인〕시(時) ‧ 벽(僻)의 정치적 갈등,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배경〕순조 재위 초기에 정사를 마음대로 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천주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노론 벽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1802년 안동 김씨로 시파에 속해 있던 김조순의 딸이 순조 비가 되면서 정권이 바뀌어 이후 36년간은 안동김씨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천주교에 호의적이던 김유근이 1836년 무렵 중풍에 걸려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정권은 우의정 이지연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풍양조씨와 손을 잡고 천주교 박해를 계획하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고자 하였다.

[초기상황]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6년부터 시작되었다. 조정에서 공식적인 체포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의 포졸들에 의해 서울 일부 지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1837년 1월16일 권득인 베드로, 3월21일 김성우 안토니오, 4월7일 남명혁 다미아노,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허계임 막달레나 등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지연은 1839년 4월 18일 천주교 박해를 허가해 주도록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아뢰었고 대왕대비전에서 이를 재가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박해의 확대] 박해는 5월말부터 일단 누그러져 약 1개월 동안 평온을 되찾았다. 그 동안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신부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세도가 조만영을 위시한 풍양 조씨에게 넘어 가게 되었고, 7월 5일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배교자 김순성이 밀고로 현석문 가롤로,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조신철 가롤로,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었다. 이어 수리산 교우촌에 살던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 이 에메렌시아등이 체포되었다. 박해가 확대되자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자수를 권유하였다. 당시의 교세가 ‘신자수 1만명, 영세자 1,200명, 견진자 2,500명 고해자 4,500명, 영성체자 4,000명 혼배자 150명, 종부성사 60명, 예비신자 600명’이라고 기록되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압송되어 오자 9월 21일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다.

[박해의 종식] 서울과 지방에서 수많은 신자가 죽임을 당하자 조정에서는 11월 23일 척사윤음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가 사학임을 다시한번 민중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대대적인 박해를 끝내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검교제학 조인영이 지어올린 ‘기해 척사윤음’이다. 당시 조정에서 이를 반포한 이유는 여론이 학살을 중지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신유박해 때와 마찬가지로 이미 대부분의 주동자들이 체포 되어 처형되었으므로 더 이상 박해를 끌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후 새로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기존에 체포된 신자들로 인해 순교자는 끊이지 않고 태어났다. 1840년 1월 31일(음 12월 27일)과 2월 1일, 당고개에서 10명이 참수형을 받았다. 처형지가 서소문에서 당고개로 바뀐 것은 설날 대목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정에서 요청한 때문이었다.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권진이 아가다, 이경이 아가다. 손소벽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 이성례 마리아, 홍영주 바오로, 최영이 바르바라. 회장 이문우 요한 등이 순교하였다.

[박해의 의미와 시성]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수는 적었으나, 그 대상 지역은 더 넓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박해 이전에 신자들이 이미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경상도 등지에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 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사나 장사 병사한 신자수가 60여명이라고 전한다. 더욱이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와 지도자들을 잃음으로써 일시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 공동체는 이전보다 더 가난한 서민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국경 감시를 강화했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거나 신자임을 감추고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결과 신자들이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되었고 신앙 내용은 더 복음적이고 교리 실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그 후 1857년부터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 중에서 79명을 선택하여 시복운동을 전개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가경자로 선포하는 한편 시복에 필요한 사항을 심의하기 시작하였다.<참조, 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2권 1135~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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