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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성 비안네 신부님
2017-12-17 06:43:44
김정태 (raymond) 조회수 928

요한 마리아 비안네(1786. 5. 8, ~ 1859년 8월 4일. 73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불어로는 장 마리 비앙네)는 전 세계 모든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이며, ‘아르스의 본당 신부’라고도 불린다.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열정적인 사목 활동으로 종교적 생활을 멀리하고 세속적 쾌락에 찌들었던 마을 전체를 한순간에 종교적 분위기가 넘치는 마을로 바꿔놓았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에서 가까운 다르딜리라는 마을에서 리옹(Lyon) 근교에서 농부인 마티유 비안네와 마리 벨루제의 여섯 자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1790년경,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종교가 탄압을 받게 되자 사제들이 정부의 눈을 피해 숨어서 어렵게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어린 비안네는 이때 매일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사목 활동을 하는 사제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 후 프랑스에서 다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가톨릭교회도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을 때 20세의 비안네는 발레리 신부 밑에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기초 교육이 부족하고 수학 능력과 특히 라틴어가 부족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09년 비안네는 군대에 징집되어 학업을 잠시 중단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전쟁이 끝난 1813년 가을, 리옹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리옹 대신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이 라틴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라틴어가 부족하였던 비안네는 수업의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결국 학업능력 결격자로 판정되어 추천 신부에게로 되돌려 보내졌고 한 해 동안 열심히 공부한 그는 프랑스어로 치러진 시험에서 무난히 통과하여, 1815년 8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비안네가 사제로서 처음 집전하는 미사는 그 다음날에 이루어졌으며, 비안네 신부의 첫 고해자는 그의 스승이며 영적 아버지인 발레리 신부였다.

 

발레리 신부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자신의 신앙을 굳건하게 유지하였던 사제로서 비안네에게 있어서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비안네는 그러한 발레리 신부의 온유함과 굳은 신앙심 그리고 사제로서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러한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발레리 신부가 죽은 후 비안네는 주민 230명이 거주하는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발령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무관심해졌으며 아르스의 주민들에게 주일은 술을 마시고 춤추며 즐기는 날에 불과하였고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같은 실태에 안타까워한 비안네는 마을 주민들의 회심을 위해 매일 감자와 거친 빵으로만 식사하였고, 자주 금식 고행을 했다. 사제관의 의자, 식탁, 이불과 베개 등 거의 모든 물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는 딱딱한 침대에 짚을 깔아 사용하는 가난과 극기의 삶을 실행했다.

그는 오전 11시에 설교를 하고 성무일도와 식사, 특별한 상담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약 18시간 정도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다.

특히 고해성사를 볼 때 고해자들에게 하느님이 보시기에 불경스러운 행위를 하는 것과 매일 환락에 빠져 지내는 삶을 친절하게 나무라며 훈계를 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을 경우에는 사죄경을 주지 않았다.

그의 성품은 지극히 단순하였고, 설교는 간단명료하였으나 신심이 차고 직선적이었다.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마을 주민들도 이러한 비안네의 한결같은 모습에 감동받아 점차 감화되어 갔으며, 몇 년 후 아르스는 비안네가 처음으로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주민들은 비안네를 크게 존경하였으며, 미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성당은 금방 신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비안네 신부의 명성과 카리스마에 대한 평판은 아르스 주변뿐만 아니라 리옹 전체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그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부터 수많은 사람이 아르스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1855년경, 이 조그만 마을 아르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숫자는 한 해 2만 명에 달하였다. 비안네 신부는 선종할 때까지 10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하루에 최소 16시간에서 최대 18시간까지 봉사해야 했다. 그의 고해소는 늘 붐볐다. 비안네는 하루 평균 두세 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으나 그는 전혀 원망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정성스럽게 고해성사에 임했다고 한다.

 

비안네는 평소에 성녀 필로메나 순교자에 대한 남다른 신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성녀 필로메나를 위한 경당 하나를 지어 봉헌하였다.

1843년 5월 그는 70세가 넘는 고령에 무리한 사목 활동으로 인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직감하고 1859년 8월 2일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날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주민들은 비안네 신부의 마지막 길을 시원하게 해 주기 위하여 사제관 지붕에 계속 찬물을 길어 쏟아 부었다고 전해진다.

이틀 후 8월 4일 새벽 2시,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41년 5개월 동안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향년 73세로 선종하였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는 비안네를 복자로 시복함과 동시에 모든 본당 사제들의 모델로 제시하였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를 성인으로 시성하였으며, 8월 4일을 그의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50주년을 맞아 2009년 6월 19일부터 1년간을 ‘사제의 해’로 선포했다. 사제의 해는 프랑스 아르서포망 교구장 주교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온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의 유해 앞에서 교황이 예수 성심 대축일 저녁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2010년 6월 19일 로마에서 열린 ‘세계 사제의 날’ 행사로 마무리되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들의 참된 모범”이라고 말하였다.

 

천주교 대전교구 솔뫼 성지에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의 성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블랑 신부가 1954년에 기증한 가로·세로 2cm 가량의 옷 조각이다. 유품이 봉인돼 있던 문서는 이 옷 조각이 성인의 유품임을 보증하고 있다.

솔뫼 성지는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유품을 함께 모신 가운데 성인 유해 공경을 위한 신심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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